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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60화 (260/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60화

91. 보전하는 자 (1)

“기침하셨습니까.”

내시의 부름에 눈이 떠진다. 화려한 단청무늬 천장이 나를 맞아주었고 입안은 텁텁하다.

방문 너머로 아침을 알리는 짹짹충들의 소음이 아련히 들린다.

어렵사리 이불을 걷어내고 답한다.

“일어났다.”

“망극하옵나이다. 밖에서 원자(元子)가 문안을 위해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세안부터 하겠으니 기다리라 하여라.”

“예. 바로 냉수를 바치겠나이다.”

눈곱을 걷어내고 기다리니 상선이 금세 냉수를 가져다주었다. 이를 닦기 위한 소금도 함께다.

살짝 적신 손가락 끝으로 거친 소금을 찍어 입안을 성사하게 닦아내고 타구(唾具, 침 뱉는 그릇)에 비운다.

대접의 세안수는 새벽의 우물물을 미리 받아놓아 맑고 시원했다. 비단 수건으로 물기를 떨쳐내고 거울을 확인한다.

간밤에 머리칼은 산발이 되었고 상투도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접이식 거울의 아래 칸 서랍에서 살쩍밀이를 꺼낸다.

살쩍밀이는 구둣주걱처럼 생긴 도구로, 그 이름대로 망건 아래로 살짝 밀어 넣어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데 쓴다.

참으로 정직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용포를 걸치고 익선관을 쓰니 그런대로 조선의 왕 다운 때깔이 났다.

‘내가 어지간하면 외관에 공을 안 들이는데.’

도둑도 제 자식에게는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했다. 아무리 밖에서는 양아치처럼 사는 나라도, 아이 앞에서도 양아치처럼 굴 수는 없었다.

마침 원자의 나이도 보송보송한 스펀지처럼 주변인의 행동이 잘 옮을 때.

각별이 주의해야 했다.

“들라 하라.”

평소답지 않은 엄중하게 이르니, 좌우 문이 열리며 원자가 입장했다.

“안녕히 주무셨사옵니까, 아바마마.”

짧은 혀로도 잘만 안부를 올리는 원자였다.

“너는 잘 잤느냐?”

“예.”

“기운찬 모습을 보니 좋구나. 학문은 잘 배우고 있느냐?”

“어제는 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 군신유의(君臣有義)를 배웠사옵니다.”

“읊어 보거라.”

“왕은 존귀하여 다스리고 신하는 천하니 모시는 것은 천지간의 도리이고 의리이나, 왕과 신하 모두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지극한 정치를 이룰 수 없다 하였사옵니다.”

“원자는 아비가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아느냐?”

“폐주가 부덕하여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므로, 징치하고 옳은 정치를 실현하고자 대신 왕위를 이었다고 들었사옵니다.”

“왕과 신하는 종묘와 사직, 천만 백성의 안위와 미래를 결정짓는 사람이니 만일 모자람이 있다면 왕은 신하를 갈 수 있고 신하 역시 왕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임금이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임금을 해치는 자라 하였으니, 왕은 어떻게 자신의 모자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보전하는 자가 있으니 왕도의 실현은 여러 길이 있으나,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자는 왕도를 실현할 수 없다. 군주는 항상 몸과 마음을 희생하는 자리다. 자신이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일하는지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원자는 명심하겠다며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만 가 보거라.”

“예. 아바마마.”

원자는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상선 김기문이 돌아와 말했다.

“조수라를 들이겠나이다. 그리고, 간밤에 들어온 급보이옵니다.”

상선은 돌돌 말린 권자를 하나 내밀었다.

의주 목사의 장계였다. 명나라와의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통로인 의주에서 급하게 보낼만한 소식은 하나뿐이다.

과연 장계에서는 사신이 입국 허가를 기다린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노수신이 요동 총병에게 양해를 구했다더니 명나라에서는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기로 했나 보군.”

“설마 이번 사신도 신하들과의 논의와 달리 쓱싹해버리시는 건 아니겠지요.”

“동창의 문서에서 언급된 적 없는 이름일세. 다행스럽게도 그럴 가능성은 낮겠군.”

“쓱싹해버릴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는 말씀이시로군요.”

“선을 넘는다면.”

정말로 동창과 연이 없어 무작정 헤매다 수확 없이 돌아간다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동창의 행방을 추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명은 동창 지부와 전 사신 증발의 배후로 이미 조선을 크게 의심하고 있을 거다. 사실, 조선이 아니면 누가 조선 땅에서 그런 짓을 벌이겠나?

이런 상황에서 명백한 물증까지 나오면 곤란하다.

명이 전면적인 공세를 펼칠 수 있는 명분이 되니까.

“사신이 위험한 정보를 확보한다면, 차라리 죽여 버리고 명을 선제공격하는 편이 나아.”

부유한 재정과 끝없는 인구는 명나라가 가진 최대 장점이다.

조선의 무기가 아무리 발전했어도 물량의 간극마저 간단하게 극복해 낼 정도는 아니다.

6.25 전쟁에서도 국군과 파병군은 압록강까지 진격해 한반도 통일을 목전에 두었으나, 중공이 인해전술을 앞세우자 파죽지세로 밀려나지 않았던가.

놈들이 총알보다 많은 숫자로 아군의 시체를 밟아가며 진격한다면 별수 없다.

“의주에, 명령이 떨어진다면 즉시 ‘우발적인 충돌’을 발생시킬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두라 하게.”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시옵니까?”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간다면 놈들이 대응할 틈을 주지 않는 편이 좋지.”

아무리 부유하고 인구가 많아도 인해전술을 쓰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아니, 인해전술이기 때문에 더욱 준비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

그 간극을 노려 빠르게 밀고 들어간다면 명에게 축차투입을 강요할 수 있다.

적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저지하고자 병력을 대충 긁어모아 던지는 축차투입은 인력 낭비나 매한가지다.

명나라가 아무리 수적 우위에 있더라도 축차투입을 계속해서 강요받으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또 북경은 조선 국경에서 멀지 않다.

타지의 병력이 증원 오기 전 요동과 직예의 병력을 갈아버리고 단숨에 수도를 함락시키는 것이, 조선이 명을 이길 최선의 방법이다.

“전달하겠습니다.”

“병판에게도 미리 말해두게.”

“예.”

사신의 방문이 태풍을 만들 나비의 날갯짓이 될지, 양국 사이의 간극을 봉합할 절호의 한 수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점은 조선이 오롯이 서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그늘을 벗어나야 하고, 그것을 명나라가 구경만 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니 사신의 방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경로는 달라도 종착지는 같을 테니까.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난다면, 서둘러서 일어나줬으면 좋겠군.’

양면 전선처럼 불안하고 위협적인 상황은 없다.

지금, 열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배를 굳혀가고 있다.

놈은 기요스 회의에서 경쟁자였던 시바타 카츠이에와 그가 지지한 오다 노부카타를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이겼다.

열도 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없어지자 히데요시는 본색을 드러내 자신이 지지했던 오다 노부카츠를 적대했다.

옛 주인 가문의 혈통들만 없어지면 열도는 자신의 것이니까.

노부카츠는 평판과 달리 아주 바보는 아니었는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력해 히데요시에게 맞섰으나, 패배했다.

이제 혼슈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로막을 사람은 없었고 그는 자신의 패권을 홍보하고자 오사카성 축성에 돌입했다.

‘더 크기 전에 조져야 하지만, 모리(毛利)가 비협조적이니.’

모리는 큐슈에서 혼슈로 들어가는 입구인 주고쿠를 통째로 쥐고 있는 대영주 가문이다.

놈들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패자 등극에 위협을 느꼈겠지만, 큐슈를 단숨에 정복하고 (놈들 기준으로는) 초저세율 정책을 펴는 조선은 더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졌겠지.

그래서인지 모리는 줄을 제대로 서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무력을 동원했다간 즉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붙을 테지.

지금은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 조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와중에도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간다.

명나라는 대대로 조선이 왜나 여진과 결탁할까 두려워하고 견제해왔다. 그리고 지금, 조선은 일부에 불과하나 왜와 여진을 거느리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조선은 명과 왜 양면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

그러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혼슈 장악에 바쁜 지금 미리 명나라와 한 판 해두는 게 나았다.

게다가 지금 황제는 무능하기로 유명한 만력제 아닌가. 언젠가 명나라와 싸워야 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하지만 신하들은 내가 호전광이어서 전쟁을 원한다고만 생각하고 있으니.’

임진왜란을 불러일으킬 열도 통일을 저지하고자 시작한 큐슈 원정도 거친 반발을 샀다.

그보다 중차대한 일인 ‘명나라와의 일전 각오’, 사실상 명과의 전쟁 준비는 더욱 거센 반발을 부를 수밖에 없다.

‘불만 가질 일은 아니지. 전쟁을 환호받으며 시작할 수는 없으니까.’

전쟁이란 당연히 진중한 논의와 거센 반발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게 정상적인 조정이 모습이다.

단지 문제가 눈앞에 닥쳤을 때가 되어서야 뒤늦게 대응하는 상황에 이를까 우려하는 것이다.

“전하.”

고심을 이어가는 가운데 밖에서 상선이 알렸다.

“조수라 대령하겠나이다.”

“그래. 들라 하라.”

윤허가 떨어지자 좌우 문이 열리며 상궁과 궁녀들이 상을 껴안고 나타났다.

* * *

“안 판관은 잘 협조하던가?”

어전회의.

좌우에 시립한 중신 중에서 병조판서 이을룡이 나섰다.

“안 판관은 다소 비협조적으로 나왔으나, 약간의 조처를 하니 적극적으로 협력했사옵니다.”

안 판관.

알폰소다.

다들 발음을 어려워해 비슷한 발음인 안본소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

그를 기용한 이유는 나가사키에서 동족 상인을 통제해 주길 바라서만이 아니다.

안본소는 믈라카의 총독으로 유럽과 인도, 인도네시아의 귀중한 정보들을 알고 있었고 잦은 전쟁으로 발달한 무기와 전술을 배우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귀화한 사람답게 은근히 비싸게 굴었다. 아는 것들을 모두 털어내면 자신은 반쯤 껍데기가 됨을 알아서다.

그런데 약간의 조처를 해서 협력을 얻어냈다니.

“고문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의금부에서 고신이 행해질 때 참관시켰을 뿐이옵니다.”

“너무 겁주지는 않았겠지.”

“아조에는 선택지가 많다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했사옵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

미래에서 사람들의 기대보다 높은 수준의 물건이 나오면 ‘외계인을 고문했냐’는 말이 나온다.

드넓은 우주에 문명이 인류밖에 없겠느냐만 진심으로 외계인을 고문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우스개니까.

하지만 안본소는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고문할 외계인은 없지만 너는 고문할 수 있다고.

관직을 내린 이유는 안본소가 대안 없는 유일한 선택지여서가 아니다. 설령 이익을 위해서라 해도, 많은 것을 포기하고 아조에 협력한 대가이지.

거기에서 ‘협력’이 빠지고도 대가가 남을 줄 안다면 실수하는 거다.

을룡의 말마따나 우리에겐 선택지가 많으니까.

“안본소의 태도가 다시 문제 되지 않도록 얻어낼 수 있는 건 철저히 얻어내도록 하라.”

“예. 염려치 마시옵소서.”

“서양의 일은 이만하면 되었다. 전날 새벽, 의주 목사가 치계를 올려 사신의 내방을 알렸다. 영의정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사신의 일에 사활을 건 노수신이었다.

그의 생각과 의견도 존중할 가치가 있다. 더군다나 한평생 나라를 위해 봉사하지 않았나.

결과가 어떻건 후회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우리가 사이좋게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 미련 없이 나에게 협조해 주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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