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259화 (25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59화

90. 필연적 만남 (3)

“일방적으로 물건을 팔기만 하겠다는 건 아니요. 동방에도 좋은 상품은 많지 않소? 예를 들자면 도자기라던가.”

알폰소가 말했다.

도자기와 비단은 서양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고작 흙을 구워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하여 높은 데서만 떨어뜨리지 않으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표면이 매끈해서 위생적이었다. 오물이 묻으면 쉽게 씻어낼 수 있으니까.

비단은 부드럽고 질기며 색상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강렬하다. 빛을 받으면 윤기가 반짝이니 귀족들은 제복을 비단으로 지어 입었다.

알폰소가 입은 양복 역시 양식만 다르다 뿐, 옷감은 비단이었다.

조선에서 두 상품을 수입할 수 있다면 포르투갈은 막대한 교역 이익을 얻으리라.

명나라에서도 이미 두 상품을 수입하고 있었지만, 놈들은 콧대가 높아 무역량을 깐깐하게 제한하는 데다 복잡한 예법과 절차까지 강요했다.

“수출이라면 우리도 의향은 있습니다.”

긍정적인 반응에 알폰소는 신이 나서 물었다.

“어떻소? 바로 조약을 체결하는 게.”

“불가합니다. 본토에 조차지를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럴 권한도 없고, 그 점은 다른 장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전하를 뵙겠다고 하지 않았소.”

알폰소는 흥이 팍 식어버려 무뚝뚝하게 답했다.

“만일 전하 앞에서 그런 무례한 질문을 했다간 후원 호수에 처박힐 겁니다.”

“조선은 명나라와 풍조가 비슷해 문화와 예법을 숭상한다고 들었소이다만. 그런 야만적인 행동을 궁궐에서 공공연히 하는 거요?”

“사나운 짐승은 매로 길들여야 하니까요.”

을룡의 대답에 알폰소는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들이 사나운 짐승이라는 말 아닌가.

기분이 나쁘다 못해 치욕스러운 발언이었다. 거래를 트기 위해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알폰소는 동양인을 깔보고 있었다.

저들은 스스로를 문명국이라고 포장하지만 조악한 기술과 낙후된 문화, 그리고 저급한 토속종교는 존중해줄 가치가 전혀 없었다.

흑인보다는 나은 수준.

딱 거기까지였다.

“불만스러우신가 보군요.”

“박대라면 지겹도록 당해보았소.”

“어차피 돌아가실 수도 없잖습니까.”

“내가 억류된 걸 알면 본국에서 군대를 보내 구원할 거요.”

“하하하……. 본국에서 군대라.”

가당찮은 농담이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같은 왕을 모시게 되어 이베리아 연합을 구성했다. 지구 곳곳을 정복하고 개척한 양국의 연합체는 분명 위협적이지만.

“제 발로 사지를 찾아간 총독 하나를 구원하고자 지구 반대편으로 함대를 파견하긴 힘들겠지요.”

“당장은 어려울지 몰라도 좋은 구실을 남겨둔다는 점은 사실이지.”

“서양인들은 충성심이 얕다고 들었는데, 한 몸 불살라 국가의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상하군요. 만용을 부리시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대가는 이 사람이 지는 게 아니니까요.”

알폰소는 입술을 말았다.

적어도 믈라카를 버려두고 조선을 찾아온 대가는 챙겨야 했다.

“본토가 불가하다면 나가사키는 어떻습니까? 이미 상행이 이뤄지고 있으니 조차지로 내어주신다면 무역 수익의 일부를 제공하겠습니다.”

“그 역시 불가합니다.”

“본토도 안 된다, 큐슈도 안 된다. 되는 게 뭡니까?”

“아이 수준의 억지를 부리니까 그렇지요. 서양 국가들은 이익에만 눈이 멀어 이국 상인이 입항할 때는 모든 교역품을 내려놓게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경쟁 관계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소.”

나라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국민의 이익을 보장하고 경쟁력을 키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냐.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나라의 부를 기르는 방식이다.

“큐슈의 무역 중심지가 된 나가사키를 그대들에게 내어준다면, 당연히 연합국 외의 상인들은 불합리한 대우를 받게 되겠지요.”

“어차피 동방을 찾아오는 상인의 대부분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이 거의 전부 아니오?”

“하지만 전부는 아니지요.”

“이해관계에 없는 놈들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소.”

“배려가 아니라, 그대들의 과욕으로 나가사키가 몰락할 것을 우려하는 것이지요.”

특정 국가 출신에게만 우대하는 항구가 어떻게 활성화될 수 있겠나.

한동안은 특혜받는 국가의 상인들이 기뻐하겠지만, 다른 국가 상인들의 발길이 줄어들면 결과적으로는 자국 상인들에게도 매력이 떨어지게 된다.

놈들이 조차의 대가로 얼마나 제공하건, 수익의 얼마를 떼서 제공하건 열도와 조선의 무역 중심지가 된 나가사키를 내어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특히나 알폰소가 총독으로 있는 믈라카의 역사를 생각하면 더더욱 불가한 일이었다.

“내가 하는 제안은 모두 안 된다고만 하는데, 그렇다면 뭐가 되는 거요?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나를 붙잡아두는 건 아니길 바라겠소.”

“국적을 바꾸시오.”

“국적을? 내가 포르투갈의 영광스러운 작위를 포기해가며 그대 나라에 봉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오?”

알폰소는 코웃음 쳤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동군연합을 이루었지만, 사실상 부속지나 다름없지요. 분명 이베리아 연합의 궁정은 스페인계 귀족들이 차지할 겁니다. 곁가지인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돌아갈 자리는 없어요.”

“…….”

“나는 그대가 곧 망할 믈라카의 총독이나 지내고 있다는 걸 그 증거라 생각합니다. 박대를 당하는 처지에 공을 세워봐야,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를 놈이 가로채기밖에 더하겠습니까.”

이을룡이 지적하기 전에도 믈라카는 망할 것이며, 그래서 출세를 위한 활로를 찾고자 조선을 방문한 알폰소에게는 정곡을 찌르는 발언이었다.

공을 세우더라도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이미 상인들에게서 포르투갈 귀족은 연합에서 발언력이 거의 없으며, 사실상 포르투갈 역시 스페인의 전신인 카스티야-레온 왕국과 아라온 왕국처럼 연합의 부속 국가로 전락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조선은 다릅니다. 말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지만, 그대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온전히 조선에게 바치는 한, 우리는 성주나 다름없는 오지의 총독직보다는 훨씬 높은 지위로 그대의 충성 살 의향이 있습니다.”

“음.”

알폰소는 쓰게 침음하고는 물었다.

“거부권은 있는 거요?”

“물론입니다. 강요하지는 않아요. 충성이란 진심에서 우러나는 것이니. 마치 내가 그대의 가치를 진심으로 높이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달콤한 말들은 소용이 없소. 정확히 어떤 자리를 줄 수 있소?”

“나가사키의 지방관으로 추천하겠습니다.”

나가사키는 열도와 조선의 국제무역을 전담하는 핵심 지역이고 영화로움은 다 죽어가는 믈라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약간의 사비를 투자해서 유럽 상인들에게 도자기와 비단을 중개한다면 막대한 수입을 거두겠지.

유렵과 열도의 상인들은 큐슈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임기는 보장해주는 건가?”

“위법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임기는 보장됩니다. 능력을 인정받으면 보다 높은 자리로도 갈 수 있지요.”

“개종을 강요하지는 않겠지.”

“이 땅에는 이미 기독교 교단이 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알폰소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 외국인들이 자신을 등쳐먹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믈라카 총독직은 임기의 절반조차 보장되지 않았고, 자신은 공을 세우고자 임지를 떠나기도 했다.

빈손으로 돌아가 봐야 송환이나 당하겠지. 그리고 포르투갈 출신이라면 대귀족도 변변찮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연합에서 자신이 받을 취급은 뻔했다.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 생각도 나지만, 뭐.

나가사키 지방직이 생각보다 안 좋으면 야밤에 배 한 척 훔쳐 도망가면 될 일이었다.

* * *

“포르투갈령 믈라카 총독 알폰소 드 바로스…… 입시이옵니다.”

내시가 어렵사리 혀 꼬인 발음을 해내자 정문을 통해 서양인 하나가 등장했다.

미리 예법을 배웠는지 어색한 움직임으로 절을 올렸다. 알폰소나 대신들이나 피차 유력자들을 마주하는 일은 감흥조차 없겠지만 오늘만은 다들 긴장한 상태였다.

유례없는 이적을 시도하려는 알폰소대로, 오랑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일까 싶은 대신들대로.

“일어나라.”

“예.”

“Sim, 이라 하지 않고 예. 라고 하다니. 그새 조선어 속성 교육이라도 받은 건가?”

알폰소는 대답하지 못했다.

과연 속성 교육의 한계였다. 동행한 역관이 통역해 주자 알폰소가 물었다.

“전하께서는 포르투갈어를 하십니까?”

“não falo português.”

나는 포르투갈어를 못한다는 뜻이었다. 포르투갈어로.

“포르투갈어를 하실 줄 아신다면 편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Nunca(안 돼).”

“…….”

알폰소는 이해했다. 조선왕은 포르투갈어를 못하는 게 아니라, 하기 싫다는 것을.

한성에서 체류한 시간은 짧았지만, 소문 정도는 무수히 접했다. 조선왕은 유능함을 대가로 기행을 일삼는다고 했다.

직접 마주하니 과연 정상은 아니었다.

“전하께서 기회만 주신다면 앞으로는 조선의 신민으로서 살고자 합니다.”

“왜지?”

“소인이 나고 자란 포르투갈은 이웃한 큰 국가와 같은 왕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제 본국에서는 포르투갈 출신은 박대당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정이 곤란하게 됐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여긴 오직 쓸모와 이익에 대해서만 논한다네.”

“소인의 가치에 대해 아뢰자면, 믈라카에서 총독으로 일해 현지는 물론 인도와 유럽의 본토 사정을 상세히 알고, 상업을 일으켜 국부에 기여 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관리로 만들어달라는 소리였다.

어전에서 빈말로도 겸양하지 않고 할 말 다 하는 모습에 관리들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왕의 반응은 달랐다.

“마침 큐슈의 목민관 자리가 많이 비었고 장기(長崎, 나가사키)에는 적임자가 없어 고민이었는데 잘됐군.”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기 판관에 제수하겠다.”

판관은 중간급 실무직.

알폰소는 총독까지 지낸 자신이 실무직을 지낸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이제 귀환한 이국인에게 결정적인 자리를 맡기지 않는 건 당연했다.

중요한 건 관리가 되었으니 나가사키에서 눈치 보지 않고 장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감사합니다.”

알폰소는 다시 절을 올렸다.

그가 물러나자 신하들은 돌아가며 왕에게 불만을 표출했다. 오랑캐 따위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요직을 지낼 수 있냐고.

나가사키가 중요한 무역항이라는 점은 상행에 소극적인 관리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기적인 서양인이 과연 무역항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독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왕이 답했다.

“코쟁이들 다루는 법은 코쟁이가 가장 잘 아는 법이지.”

무역권을 통해 상인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했으나, 완벽한 대안은 되지 못했다.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걸고서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온 상인들은 비싼 무역권을 정직하게 사서, 무역권 없는 상인들을 검열하는 수고까지 들이느니 목숨 한 번 더 걸고 밀항하기를 선호했다.

그 결말은 하나 같이 좋지 않았지만, 부나방들은 동족이 한 줌 재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불길로 달려드는 법이다.

놈들의 생태를 잘 아는 사람만이 놈들을 통제할 수 있었고 믈라카라는 무역거점의 총독직을 지낸 알폰소는 둘도 없는 적임자였다.

그도 허점을 이용해 이익을 실현하겠지만 불특정 다수인 상인들을 쫓아다니는 것보다는, 알폰소 하나를 감시해 법과 제도의 허점을 찾아내 보완하는 편이 빠르다.

결정적으로,

“그는 무기의 진일보를 가져올 걸세.”

수석식 소총과 직사포.

화승총과 장손포와 비교해 일방적인 우위에 선 무기는 아니다. 하지만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대응력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하들은 명과의 충돌을 막고자 애쓰고 있었지만 왕의 생각은 다르다.

잠깐 시간은 벌 수 있을지 몰라도 명나라는 조선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갖은 제동을 걸어올 거다.

곱게 당해줄 생각이 아니라면 명나라를 극복하는 일은 필연이고 무력 충돌도 필연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