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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58화 (258/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58화

90. 필연적 만남 (2)

경회루.

연회를 파한다는 말은 없었으나, 왕이 던진 말에 신하들에게 연회의 행방은 관심 밖이 된 지 오래였다.

‘근자에 들어 서양인들이 허락도 없이 뻔뻔하게 본토를 찾아와 배를 대는 일이 늘었는데, 이번에는 수괴에 준하는 자마저 직접 찾아왔다.’

수괴는 아니나, 그에 준하는 자.

서양인들은 세계 반대편에서부터 꾸역꾸역 찾아왔다.

그들이 움직이는 동기는 단순했다. 탐욕. 무역권을 통해 그나마 조선에 협조하는 자가 비협조적인 자들을 통제하게 했으나, 완벽한 대안은 되지 못했다.

몇몇 놈들은 조선 본토에 대한 허황된 소문을 듣고서 밀항을 시도했다.

적잖은 자가 해협을 지키는 수군의 감시를 피해 남해안에 정박했지만, 이질적인 양식의 배는 눈에 띄기 쉬웠고 놈들은 다시는 뭍으로 나가지 못하게 됐다.

주체하지 못하는 탐욕의 대가로 볕조차 들지 않는 교화소의 최심부 지하에 처박히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저들에게도 조선은 한 번 갔다간 생환하지 못하는 땅이라는 말이 돌고 있을 터임에도, 밀항 시도는 그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놈들의 저급하고 천박한 탐욕에 더욱 불을 지르는지도 몰랐다.

신하들은 밀항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서양 국가들의 수괴에게 서한을 보내고 싶었지만, 조선의 선박과 항해술은 아직 세계 반대편을 찾아갈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래서 곤란해하던 참이었는데.

“놈이 제 발로 찾아올 줄은 몰랐나이다.”

노수신의 말에 왕이 답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총독을 사칭하는 자는 많았지만 진짜 총독이 찾아올 줄은 몰랐으니까.”

“어디에 있답니까?”

“새벽에 보고 받았을 때는 수원이라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도착했겠지. 궐 근처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걸세.”

“소신 중에 의향이 있는 자는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왕이 순순히 받아주자 노수신은 속으로 안도했다. 어쩌면 전하 쪽 사람이 이미 총독과 접촉해서 필요한 말은 다 나눈 뒤여서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수괴에 준하는 이국인이라면 가치 있는 정보를 많이 알려주리라. 그래서 대국에서는 조공을 겸해 사신의 방문을 청하는 게 아닌가.

노수신은 다른 관리들이 선수 치기 전에 나서기로 했다.

‘여러 사신관이 있지만 경중을 생각하면 동평관(東平館)에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

서양인의 방문은 유례없는 일인 만큼, 별도의 숙소가 없고 모화관은 명나라 사신 전용이다.

동평관도 명목상은 열도 사신 전용이지만 유구국 사신이 이용할 정도로 활용에 융통성이 있으니까.

노수신은 달싹이는 엉덩이를 애써 방석에 붙여두고 자리가 파하기만을 기다렸다.

주변 관리들도 눈치를 보기는 매한가지였다.

“고생들 했네.”

왕은 긴말 없이 깔끔하게 자리를 파하고 일어났다.

신하들은 한 몸처럼 일어나 군주를 배웅한 뒤, 그가 멀어지자 서로 안부를 나눴다.

피곤하니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기분이다. 다들 내일 보자. 잘 자고 등청한 뒤 보자. 등등.

정작 서양인 총독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다들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하지만 속에서는 경쟁자들을 줄일 생각뿐이다.

이국에서 한 자리 차지한 유력자와 자리가 만들어지면 고작 몇 마디 인사만 나누고 끝나는 게 아니다.

또한 그 역시 사람이니, 몇 명 만나고 난 다음에는 쉬어야 한다. 같은 말을 계속 하기도 질릴 테니 늦게 방문한 사람들과는 논의가 빈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건 젯밥이지만, 그가 빈손으로 조선을 찾아왔겠는가? 먼저 방문하는 사람이 가장 진귀하며 이색적인 기념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자,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갈 터이니…….”

노수신은 가식적인 인사를 서둘러 끝내고는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능청스럽게.

그러나 탈출시도는 보기 좋게 저지당했다.

“영상 대감.”

“공판 아니시오.”

공조판서 김성일.

과거 왕의 스승으로 명성이 높아 제자만 두 자리를 능가했고, 주조권과 굴포운하 운영권을 쥐어 공조의 위상을 높였으나 그만큼 바쁜 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이 어떻건 노수신은 지금 갈길이 바쁜 사람이었다.

한 시라도 빨리 총독을 보러 가야 하니, 과장 조금 보태서 아버지의 영령이 코앞에서 나타나더라도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어서 쉬러 가지 않으시고?”

“인사는 드려야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중에 자리를 만들 테니 그때 못다한 이야기를 마저 나눕시다. 그럼.”

노수신이 철면피를 깔고 발을 돌리자 김성일이 바로 가로막았다.

“무엇을 그리도 서두르신단 말입니까?”

“아니…….”

김성일이 끈질기게 막아설 동안, 그의 곁을 좌의정 이이가 지나쳤다.

정계란 방심하는 사람은 뒤통수부터 맞고 들어가는 곳. 그새 김성일은 이이와 결탁하여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아오!”

노수신은 체면은 집어치우고 김성일을 밀쳤다.

“아이고.”

김성일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앓는 소리를 흘렸지만 노수신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오히려 괘씸하니 잘 되었다.

상황이 노골적으로 흘러가서일까.

노수신이 경회루를 빠져 나오기 무섭게 다른 신하들도 사지를 섞여가며 앞다투어 나섰다. 노수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헉, 헉.”

인생의 황혼기에 추태를 부리려니 무릎이 시렸지만, 다른 사람들도 추태를 부리느라 바빴다.

경회루를 빠져나오자 십수 명의 장정과 선비들이 주변에 서 있었다. 노수신은 그중에서 자신의 사람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영의정 대감!”

“어찌 알고 기다렸나?”

“대감께서 연회에 참석하시러 간 직후, 서양인 총독이 도성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관심을 가지실 것 같아 미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눈치가 좋군!”

“감사합니다. 자네가 업어드리게!”

선비가 채근하자 저택의 노복이 다가와 등을 내밀었다. 노수신은 펄쩍 뛰어 올라타며 외쳤다.

“동편관으로 가자!”

“예!”

건장한 노복은 노수신을 등에 업은 채 육조거리를 내달렸다.

저 앞에서 내달리고 있던 좌의정 이이와의 거리도 어느새 좁혀져, 말이 오갈 정도로 가까워졌다. 노수신은 외쳤다.

“의정 신분에 두 다리로 뛰시느라 노고가 많네, 좌상! 와하하!”

노수신은 한껏 이이를 비웃어주고는 앞서나갔다.

동평관은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었다. 덕분에 동평관에 도착할 즈음에는, 노수신을 업고 달렸던 노복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고생했네! 이 노고는 내가 돌아가서 제대로 포상해 주겠네.”

“아, 아닙니다요. 허억, 허억.”

노수신은 건장한 노복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쉬고 있으라 명했다. 그리고 자신을 뒤따라 올 경쟁자들이 들이치기 전에 동평관으로 들어섰다.

안에서는 숙소에 상주하는 아전이 맞아주었다.

“영의정 대감께서는 어인 일로…….”

“서양인 총독이 도성을 방문한 걸로 안다. 서둘러 안내하게.”

“소인도 소식은 들었으나 동평관은 아닙니다.”

“뭐?”

뒤늦게 발을 돌릴 수도 없었던 노수신은 차라리 아전이 거짓말이라도 했기를 빌면서 숙소를 돌아다녔으나,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

노수신은 하얗게 불탄 채 동평관 벽에 기대 쓰러졌다.

* * *

북촌 관광방.

흰 벽돌담 집은 때아닌 손님에 어수선했다.

저택의 노복들은 별종 주인을 모신 지 오래되어 놀람에 내성이 있었지만, 오늘만은 아니었다. 손님은 진짜로 별종이었으니까.

살짝 말린 구릿빛 머리칼과 붉은 기가 도는 하얀 피부, 움푹 들어간 눈과 촛대처럼 길쭉하게 난 코.

과거 선교사들이 함거에 태워진 채 입성한 적이 있었지만 서양인의 존재는 여전히 생소하고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말이 통하니 다행이오.”

믈라카 총독 알폰소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맞은편에는 병조판서 이을룡이 자리해 있었다. 그는 어색한 포르투갈어로 답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군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소.”

알폰소의 함대는 먼저 나가사키를 경유, 동방의 뱃길에 능한 열도인 선주를 고용하고 해협을 가로질렀다.

계획은 해안을 따라 조선의 수도까지 닿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최남단에 정박했다간 입항을 거절당하거나, 억류되어 왕은커녕 조선의 유력자 하나 보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알폰소의 이 위대한 항해는…… 당연하지만 밀항자들로 극도로 경계하고 있던 조선 수군에게 귀신 같이 발각되어 무위로 돌아갔다.

배 한두 척이 아니라 아예 선단을 이끌고 나타났으니 그러고도 안 걸리는게 이상할 정도였다.

알폰소는 그가 예상한 가장 최악의 방법대로 조선 수군의 인도를 받아 최남단의 항구에 정박하였으며, 배를 빼앗기고 억류당했다.

알폰소는 포르투갈 총독 지위를 앞세워 최소한의 권리를 요구했으나, 앞선 밀항자들이 어지간히 총독 사칭을 해댔는지 돌아오는 건 뭇매밖에 없었다.

그러다 가까스로 신분이 입증되어 수하들과 배를 모두 수영에 남겨두고서 자신만 조선의 수도에 입성한 상태였다.

생김새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인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점에서는 믈라카와 같았지만, 믈라카에서는 적어도 성벽도 있었고 요새도 있었고 주둔군과 무역하러 온 유럽 상인들이 있었다.

조선의 수도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자신의 몸뚱어리 하나가 전부일 뿐.

알폰소는 인생 최대의 몸고생과 마음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견뎌야 할 이유가 있었다.

“국왕 전하와는 언제 접견할 수 있겠소?”

교역의 수립.

이 일만 해내면 그간의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맞은편의 선비가 답했다.

“이 사람은 장관입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자신에게도 권한이 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나에게 하라. 함부로 왕을 만나게 해줄 생각은 없다. 그런 뜻이었다.

“양국의 미래에 대한 중차대한 논의요.”

“알고 있습니다.”

“병조는 외교가 아니라 군사를 다루는 곳이라 들었소이다만.”

“까탈스럽지 않게 행동하시는 게 이롭습니다.”

알폰소는 실망 섞인 콧김을 흘렸다.

하지만 이만해도 어디인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는 조선의 땅에서 장관급 인사를 만난 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또 그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한다면 왕도 관심을 가지겠지.

알폰소가 입을 열었다.

“무역을 제안하러 왔소.”

“무역이요? 조선은 큐슈를 통해 이미 서양의 상인들과 거래하고 있습니다만.”

“본토와 해협을 사이에 둔 큐슈에서 거래를 해봐야 무역의 규모나 효용 모두 제한적일 수밖에 없소. 인구가 많은 수도 근처에 조차지를 내어 주면 양국의 무역이 크게 활성화될 거고, 좋은 관계도 수립할 수 있을 거요.”

“사양하고 싶군요.”

“단언하시는군.”

“그대들의 문물은 대부분 효용이 낮습니다. 그런 잡다한 것들을 사들이는 창구를 낸다는 건, 자해와 다름없지요.”

“일방적으로 물건을 팔기만 하겠다는 건 아니요. 동방에도 좋은 상품은 많지 않소? 예를 들자면 도자기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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