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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57화 (257/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57화

90. 필연적 만남 (1)

경회루.

풍광 좋은 곳에 세워진 누각에서, 당상 대신들이 상석 좌우에 앉아 각자의 상을 끼고 진미를 맛보고 있었다.

“전하께서 내려주시는 선온상은 오감과 오미의 극치이니 이런 시대에 태어나 관리가 된 것이 복입니다.”

“하하하.”

“선인들은 이렇게 못 드셨겠지요.”

“맞습니다.”

관리들은 고추를 처음 접했음에도 뼈해장국의 위대함을 찬양했다.

과연, 경박하게 보일지라도 뼈에서 살점을 발라내 건져내고 국에 밥을 말아먹으면 이만한 호식도 없다.

오직 영의정 노수신만이 당혹함 가득한 표정으로 호평을 해대는 주변 동료들을 둘러볼 뿐.

바로 곁에서 우의정 심수경이 물었다.

“영상께서는 국을 거의 들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라도 있으시옵니까?”

“아, 아닐세. 나에게는 조금 자극적인 것 같아서 말일세.”

심수경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국이 맵고 짜기는 했으나, 짠맛은 익숙했고 매움은 입맛 돌기 적당했으니까.

노수신은 매운맛에 약한 걸까.

심수경은 자신을 갈궈대는 영상의 약점을 찾아냈다는 생각에 내심 기뻤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아쉽군요.”

“하하…….”

노수신은 애써 웃어주고는 심수경이 고개를 돌린 사이 혀를 쭉 내밀었다.

국이 얼마나 매운지, 거의 눈물이 돌 정도였다. 그런데 신하들은 시뻘건 국물에 밥까지 말아가며 들이키니 노수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혀만 이상한가 싶어서.

맞은편을 바라보니 이이도 잘만 먹고 있었다.

상석의 전하는 체면도 차리지 않고 대접을 입에 대고 기울이기까지 했다. 왕이 직접 마련한 음식이니 당연히 그의 입맛에는 맞겠지.

다들 잘만 먹는데 혼자서 거의 손을 대질 못하고 있으니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영상, 국에 문제라도 있나?”

“신이 나이가 많아서인지 매운맛을 거의 견디지를 못하니 송구하옵니다.”

“허어. 이상하군. 연배가 고작 한 해 차이인 우의정은 잘만 먹고 있지 않나.”

심수경은 자신이 언급되자 수저를 들다 말고 상석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우상이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좋군.”

“망극하옵나이다.”

“그런대 백관의 대표인 영상께서는 거의 들지를 못하니. 으음.”

왕은 곁의 상선을 향해 말했다.

“영의정의 국도 내가 먹는 국과 같은 것이겠지?”

“물론이옵니다, 전하.”

“나는 물론 다들 멀쩡하거늘.”

내시와 잡담을 나눈 왕은 보라는 듯 국대접을 기울였다. 목젖이 몇 번 오르내렸고 왕은 빈 대접을 내려놓았다.

“뼈해장국은 질리지가 않는단 말이야. 귀찮게 해서 미안하지만 숙수들에게 한 그릇 더 올려달라 전해주겠나.”

“물론이옵니다.”

노수신은 자신의 앞에 놓인 시뻘건 국과 대접을 순식간에 비워놓고 매워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한 그릇 더 달라는 왕의 패기에 감탄 섞인 탄식을 흘렸다.

왕이 덧붙였다.

“그리고 영상은 매운 걸 못 먹는다니 고추를 빼서 따로 한 접시 끓여달라 하게.”

“예.”

상선이 허리를 숙여 명을 받들자, 노수신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아니옵니다, 전하. 영의정이 되어서 어떻게 숙수들을 번거롭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숙수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민망해서였다. 영의정이나 되는 사람이 고작 이 정도 매운맛을 견디지 못해 맹탕국을 먹는다고 사람들이 얕잡아 볼까 봐.

노수신은 살점이 붙은 뼈를 그대로 덜어내고 밥을 말았다.

눈 딱 감고, 오기로라도 들이마시자고.

속이 쓰리고 뒷간도 빈번히 오가겠지만 영의정 체면이 있다.

그러자.

“어허.”

왕이 만류했다. 걱정 반, 희열 반 섞인 기괴한 표정으로.

그 모습에 노수신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왕이 자신의 국에 무슨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전하…….”

“내가 장난이 심했지만 괜한 오기를 부려 속을 버리려 하는가? 영의정은 보기보다 자존심이 세군. 바로 새 국을 내어오라 하겠네.”

상선이 아래층으로 왕명을 전하자 궁인들이 새 상을 가져왔다.

노수신 앞에 하나, 왕 앞에 하나.

노수신은 자신의 앞에 놓인 국이 이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왕이 두 번 속이랴 싶어 수저를 떴다.

“오. 으음.”

맛있었다!

이전 국도 매운맛만 덜하면 좋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새 국은 정확하게 바라던 대로였다.

맵고 짠 얼큰한 국물은 갑갑하던 속이 절로 내려가는 기분이었고 절로 밥으로 숟가락이 갔다.

“전하께 또 당하셨군요.”

곁에서 사정을 다 보고 있던 심수경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영상께서 매운 것을 못 먹는 줄 알았지 뭡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노수신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심수경이 조용히 속삭였다.

“명 사신을 상대하는 일로 몇 마디 올리셨을 때의 복수인 모양입니다.”

“쩝. 내 어떻게든 대가를 치르리라 생각은 했네. 이 정도면 싸게 치른 셈이지.”

박순도 주조권으로 왕에게 맞섰을 때, 의정부 당상들은 다 참여한 연회에 홀로 빠지고서 호조와 공조 사이를 조율하는 일을 맡았다.

그에 비하면 자리에는 참석해서 입술만 부어오른 정도로 끝났으니 이만한 게 어디냐.

그런데,

‘영의정의 국도 내가 먹는 국과 같은 것이겠지?’

왕의 발언이 떠올랐다.

모두가 먹는 국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국과만 비교했다. 거짓말은 아닐 거다. 사실을 말하며 남을 속이는 것도 왕의 기술 중 하나니까.

그렇다면 도저히 못 먹을 정도로 매운 국을 전하께서는 좋다고 드시고 계시다는 뜻인데…….

노수신은 혀를 내둘러 경악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비범한 사람 봐 식성마저 비범했다. 고추 없었을 때는 뭐 먹고 살았단 말인가.

주연도 끝자락에 이르렀다.

노수신은 새로 받은 국을 해치운 지 오래였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포식한 관리들은 부어오른 배를 내놓고서 누각의 난간에 기대 잡담을 나눴다. 술기운도 시간이 흘러 다 씻겨나간 지 오래.

자리가 파하면 다들 집으로 돌아가 곤히 잠이나 잘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 사이에서.

“자, 자.”

왕이 입을 열었다.

제신들은 난간에서 등을 떼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제신들이 명과의 일을 의식하느라 심신으로 노고가 많았을 텐데, 다들 바쁜 사람임을 알면서도 굳이 위로하고자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불평하지 않고 어울려주었으니 내가 고맙게 생각한다.”

신하들은 고개를 숙여 겸양했다.

“하지만 내가 제공들의 귀한 시간만 뺏고자 자리를 마련한 건 아니다. 근자에 들어 서양인들이 허락도 없이 뻔뻔하게 본토를 찾아와 배를 대는 일이 늘었는데, 이번에는 수괴에 준하는 자마저 직접 찾아왔다.”

식어버린 술기운과 포만감으로 지쳐있던 신하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 * *

대항해 시대가 시작될 즈음, 동남아시아에서는 술탄국이 난립했으며 말레이시아 반도 남부는 믈라카 술탄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이름에서 따온 믈라카 해협을 꽉 잡은 믈라카 술탄국은 무역 중심지로서 막강한 부와 영향력을 거느렸다.

빛이 나는 곳에는 모름지기 벌레가 꼬이게 마련.

대항해 시대를 시작한 포르투갈은 인도 해안에 이어 동남아시아의 무역을 꽉 잡은 믈라카 술탄국과도 통교를 맺기를 원했고, 디에고 로페즈를 파견했다.

믈라카 술탄국의 무슬림 군주 마흐무드 샤는 수상 툰 무타히르와 논의 끝에 이교자인 디에고 로페르를 암살하고자 했고, 결과적으로 이런 시도는 포르투갈이 믈라카를 침공할 아주 적절하고도 좋은 명분이 되어주었다.

결국 믈리카 왕조는 현지인 병력을 대동한 소수의 포르투갈 원정대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었고, 믈라카 왕조는 반도 최남단으로 쫓겨가 조호르 술탄국을 세웠다.

조호르 술탄국은 지난 70년 동안 포르투갈에 빼앗긴 반도의 중부를 탈환하고자 다른 술탄국과 연합하는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실패만 거듭해왔다.

그만큼 포르투갈령 믈라카는 굳건했다.

최근까지는.

“이젠 망하겠군.”

믈라카 총독 알폰스가 말했다.

그가 자리한 책상에는 먹다 남긴 믈라카식 볶음밥과 함께 하락세인 지표로 가득했다.

포르투갈령 믈라카는 전원이 무슬림인 현지인들을 상대로 강경한 개종 정책을 시행했고, 현지 관리는 부패했다.

바다에는 해적이 들끓었으며 시시때때로 쳐들어오는 주변 술탄국들은 내부 정비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동남아사이아의 무역 허브로 기능해온 믈라카를 장악한 포르투갈은 무슬림 세계에서 무슬림 상인을 배척한다는 멍청하고 놀라운 짓거리를 저질렀다.

이제 동남아시아 무역 허브라는 역할은, 믈라카가 포르투갈에 복속될 즈음 해협 맞은편에서 개국한 아체 술탄국에게 보기 좋게 빼앗겼다.

그러자 웃기게도, 서로의 멸망을 지독히도 바라던 포르투갈령 믈라카와 믈라카 술탄국의 후신 조호르 술탄국은 연대하여 아체 술탄국에 맞서게 됐다.

하지만 망한 무역거점과 망한 나라의 후신 따위가 힘을 합친다고 어떻게 신성을 이기겠나?

십수 년 전 아체 술탄이 조호르 술탄을 쳐죽이고 그의 딸을 부인 삼아 데려간 후로, 포르투갈 믈라카와 조호르는 망할 날짜만 기다리는 처지였다.

“총독 각하.”

문이 열리며 관리 하나가 들어왔다. 요새 아래로 다 죽어가는 믈라카의 전경이 빤히 보이지만 정작 그는 중국산 비단으로 만든 양복에 보석을 금실로 꿰어 만든 장신구를 한가득 걸치고 있었다.

포르투갈령 믈라카의 파멸에 눈앞의 관리가 일조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지만, 총독 알폰소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망할 텐데.

가라앉은 배에서는 판자 하나라도 껴안고 살아남는 게 승리자다.

“무슨 일이지.”

“급보입니다. 조선국이 구주를 침공해 히라도를 장악했다 합니다.”

“조선이?”

알폰소는 눈살을 찌푸렸다.

포르투갈은 오래전부터 명나라와 열도의 영주국들과 교류해 온 덕으로 조선에 대한 정보가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소국이며, 경제가 낙후되어 특산도 없고 화폐도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포르투갈에서는 조선을 무역 파트너 후보에서 철저하게 배제했고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놈들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히라도를 점령했단 말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예상대군.”

알폰소가 빈정대자 관리는 불쾌한 표정으로 크흠, 헛기침하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조선이 알려진 것 이상의 기술력을 갖춘 건 분명합니다. 큐슈에서 귀환한 상인이 전하기를, 거의 수평선에서 포탄을 쏘아 보내 요새를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수평선에서? 자네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살상반경을 떠나 현존하는 어떤 대포도 포탄을 수평선에서 반대편으로 날려 보내지 못한다. 비슷한 짓이라도 가능했다면 놀라기라도 했겠지. 어이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다소 과장이 섞였을 수는 있으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겠지요. 상인이 그런 농담을 진지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알폰소는 침음을 흘리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동방은 유럽보다 장사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는 상인만이 아니니까.

해협과 군도마다 현지인과 유럽인 해적이 들끓었다. 그들을 뚫고 무역하려면 상인이라도 해군 이상으로 전투에 능해야 했다.

그러니 놈들이 호들갑을 떨 정도라면, 과연 과장은 다소 섞였을지언정 조선군의 무기 수준은 생각보다 상당할지도 모른다.

“히라도는 어떻게 되었나?”

“조선군이 군항으로 개조해 버렸습니다.”

“망해 버린 건가? 열도와의 무역은?”

“아직은 건재한 것으로 보입니다. 장소만 나가사키로 바뀌었다는군요. 하지만 조선군 지휘관이 구리 등 희소금속을 대가로 무역권을 팔아서 예전만큼 수익이 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조선과 거래를 이미 텄다는 건가?”

“무역권은 큐슈에만 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흐음……. 조선이 히라도만 아니라 큐슈 전체를 먹었단 소리인가? 하지만 본국으로 가는 길은 막혀 있고?”

알폰소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명과 열도 영주국들이 일부러 조선의 존재를 감췄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방은 예전과 달리 총이 전수되어 만만한 지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큐슈는 열도에서 가장 사납고 야만적인 자들이 사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런 지역을 미개 약소국 따위가 장악했을 리 없잖은가.

놈들은 생각보다 훨씬 발전했을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면, 무역 대상으로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상인들이 다 해먹기 전에 조선과 접촉해야겠군. 선단을 준비하게.”

“조심하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뭔가?”

“몇몇 상인들이 밀입국을 시도했으나 돌아온 사람이 없다더군요.”

“베일에 싸인 나라라니 더욱 흥미가 돋는군. 어차피 믈라카가 망할 날도 머지않았네. 내 총독직도 임기가 다하기 전에 갈리겠지.”

믈라카 총독의 임기는 3년이지만 전임 총독들 대부분은 임기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항의하거나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망해가는 식민지 무역거점의 총독직은 현지 사정을 모르는 유럽에서는 경력이나 자랑거리로서 가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이상의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알폰소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이 어떻건 여기보다야 낫겠지.

더욱이 다른 유럽국가들이 세계를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반분해 먹기로 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완전히 무시하고 주제넘은 과욕을 부리기 시작한 지금, 포르투갈은 결정적인 대안이 필요했다.

조선과의 통상을 열 수만 있다면 믈라카 총독보다는 좋은 자리로 내정될 거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직접 가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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