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56화
89. 작은 고추가 맵다 (3)
“어울리시옵니다.”
병조판서 이을룡이 아뢨다.
“고맙군.”
왕이 답했다.
그는 녹색 용포에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획기적인 변화였고, 이런 변화가 몇 번만 더 있었다간 면식 없는 사람은 왕이 군주인지 광대인지 분간도 못 하게 될 터였다.
대강 이런 말들을 쓴소리 잘하는 신하들이 읊었지만, 왕은 그답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그는 어느 정도는 광대이기도 했으며 본인도 즐기고 있었다.
“영의정이 요동총병에게 서신을 발송함과 동시에, 병조에서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코자 첨병을 국경에 배치하였사옵니다.”
이을룡의 말에 노수신이 지적했다.
“만일 명나라에서 아조가 군사행동을 준비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네.”
“염하시는 바에 대해서는 소관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첨병은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선발하여 소수만 정탐을 위해 배치하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병조판서를 믿고 안심하겠네.”
노수신의 말에 이을룡은 손을 모아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는 무재도 부족하지 않았지만, 계략과 심모원려라면 따라올 사람이 없는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며 전락과 기교도 배웠다.
사태가 지극히 중함은 알고 있을 테니 알아서 잘하겠지.
노수신에게는 병조판서보다 더 걱정되는 사람이 있었다.
“신이 주제넘게 명과의 일을 무마하는 중임을 전적으로 맡게 되었으니, 송구한 말씀임을 아오나 전하께서는 부디 신을 믿고 따라주셨으면 하옵니다.”
“내가 어쩌길 바라는가?”
“성상께서도 아시듯 명은 황제국이자 천하 만방의 종주를 자처하니, 현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자존심을 쉬이 꺾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게 놈들 문제지.”
중원국가들은 다 망해가는 판국에도 자존심을 세우는 게 전통이었으니까.
패전을 당해 굴욕적인 조약을 맺으면서도 끝까지 이쪽이 위에 있다는 식의 고집을 부리는 광경은 희극적이기도 했다.
물론 대대로 천자국을 자처해 온 중원국가들은 황제의 위신이 무너져내리면 나라까지 무너지고 만다.
그러니 상황이 어떻건 비참하리만치 자신들이 황제고 위고 그래서 무엇을 뜯기고 내놓건 하사라고 우겨대는 것이다.
상대하는 쪽에서야 황제와 황제국의 위신을 세워주는 것으로 각종 이권을 싸게 먹을 수 있으니 좋지만, 중원국가에서는 이따금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도 근거 없는 자신과 자만을 부리기도 했다.
“만일 사신이 입국하여 황제를 대행하는 자로서 예를 맞기를 원하거나, 또 사신이 전하께 사과를 요청하여도 어울려 주시옵소서.”
“내가 어울려 준다는 걸 알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 나와 준다면 따르지.”
“저들이 어전에서 결례를 저지른다면 후일에 백 배고 천 배고 갚아줄 수 있을 것이옵니다.”
“선대왕들께서도 명국 사신들에게 행패와 모욕을 당할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셨겠지. 나는 선대왕들께서 생각하신 후일이 이즈음이 아닐까 싶군.”
“전하, 상대방이 계산적이지 못하면 이쪽이라도 계산적이어야지 않겠사옵니까.”
명 사신이 오만한 건 어쩔 수 없다.
저들이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천하만방을 지배하는 국가는 아닐지라도, 일대에서 가장 크고 강성한 나라라는 점은 사실이니까.
그런 나라의 관리를 지내 평소 번국이라 얕잡아보는 나라를 방문했다면 안 그래도 높은 콧대가 더 올라가겠지.
굳이 심리를 예상하지 않아도, 조선을 방문한 사신들은 대체로 오만했다.
문제는 조선의 왕 역시 오만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며, 명 사신과 마찬가지로 이해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금상은 둘도 없을 여러 위업을 세우고 전통적인 외적이자 명나라조차 당해내지 못한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열도까지 제패했다.
저들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지라도 그게 어디인가?
열성조들께서는 두만강을 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진족들의 침입에 영토를 포기한 적도 있었고, 열도 역시 대마도를 형식적으로만 평정한 게 다였다.
내치부터 외치까지 경이로운 업적을 세웠으니 그러고도 겸양을 바라는 건 과욕이었다.
그러나 이해와 납득은 다르다.
왕이 자칫 새로 파견되어 온 명 사신과 오만함을 대결한다면 양국의 관계는 파국으로 직행하고 피를 볼 수밖에 없다.
“작고 볼품없는 노신을 봐서라도 성질을 죽이시옵소서.”
“왜 어울리지 않게 약한 척인가?”
“약한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찌 전하를 감당하겠사옵니까? 혹, 전하께오서 사신을 박대하다 일이 그르친다면 신은 전하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죄를 스스로 벌하고자 한강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박 영의정은 목석처럼 굴더니 지금 영의정은 죽어버리겠다며 나를 겁박하는구나. 이제는 다음 영의정이 무슨 짓을 할까 두렵다.”
“다 나라와 성상 전하를 위하려는 신하들의 궁여지책이옵니다. 자, 약조하여 주시옵소서!”
“경이 이겼다.”
왕이 패배를 시인하자 노수신은 뿌듯한 마음에 허리가 펴졌다.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기분이 상했을 왕에게 위안 정도는 줄 수 있겠지.
“신이 감히 목숨으로써 어전에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전하께서는 책망치 아니하고 보듬어주시니, 세간에서는 인군이 신하를 박대한다고 말해도 모두 사특한 풍문에 지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일 것이옵니다.”
진심이었다.
왕의 취미가 신하들 뒤통수 때리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신하들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단지 심성이 뒤틀리셨을 뿐이지.
만일 신하를 진정으로 싫어하고 증오하며 만사를 자기 의향대로만 처리하고자 했다면, 일개 신하의 겁박 따위를 받아주겠는가.
당장 끌어내어 자신의 손으로 죽여 버렸을 거다.
무례를 저지를 수 있었던 이유는 왕을 믿었기 때문이다.
“두고두고 죽겠다며 난동이나 부리지 않기를 바란다.”
“각골명심하겠나이다.”
왕의 협조를 얻어낸 노수신은 이제 만일을 대비하기로 했다.
가장 가능성이 큰 흐름은 명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전 사신의 증발을 조사하고 그의 역할을 이어가게 하겠지.
아무리 명이 강대한 나라이며 부정한 의도로 보낸 사신이 사라져 제 발을 저릴 판이라도, 다짜고짜 군사부터 일으키지는 않을 테니까.
적어도 사정부터 알려하지 않겠나.
어전회의가 파하자 노수신은 대응을 논하기 위해 두 의정을 대동하고서 의정부로 등청했다.
“다행스럽게도 전하께서 나의 고집을 받아주셨네.”
노수신의 말에 이이가 답했다.
“근래에 성질이 많이 죽으셨습니다. 전하시라면 반격할 방법이 있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 받아주신 것이지.”
“명에서 다시 사신을 보낼 가능성이 큰데, 동창의 지부는 궤멸했고 이전 사신은 미국으로 가버렸으니 어떻게 둘러대야겠습니까?”
“동창은 저들도 찔리는 구석이 있을 테니 대놓고 따지지는 못할 걸세. 대신 이전 사신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겠지.”
“전하께서는 사신이 미국으로 가셨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저승이라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노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저승이 아니어도, 저승과 다를 바 없는 곳이리라.
말이 사신이지 사실상 첩자로서 조선을 방문했으니 왕이 가만히 두지는 않았을 테고, 살았건 죽었건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닐 거다.
“끝까지 잡아떼야 하네. 어차피 우리도 모른다는 건 사실이니까.”
“전하께서 신하들 모르게 사신을 처리하셨다는 게 다행이 될지 몰랐습니다. 사신이 관리들을 추궁하겠지만 누구도 행방을 알지 못하잖습니까?”
“무작정 처분하지만 않으셨어도 이렇게 흘러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반전이라면 반전이겠군.”
사신을 빙자한 첩자의 증발은 모른다 일관한다 치더라도, 진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새로 올 자는 사신만 아니라 동창까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분명 심계가 깊어질 텐데 어떻게 달래야겠습니까?”
이이의 질문에 노수신이 쓰게 신음했다.
탐욕스러운 자는 다루기 쉽지만 이번 경우는 예외다. 억만금을 안겨주더라도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지부가 멀쩡히 잘 있다고 보고할 수는 없으니까.
약간의 조작을 해주면 모를까.
순간 노수신의 머리에 귀신같은 발상이 번쩍 떠올랐다.
“사신을 매수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탐욕스러운 자라도 동창의 지부가 사라진 일을 덮지는 못할 겁니다. 없어진 동창이 보고를 재개할 수는 없잖습니까?”
“동창의 지부를 위장할 수는 있겠지.”
“설마.”
이이는 놀란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역공작이다.
사신의 협조만 얻어낸다면 아조가 없어진 동창 지부의 거적을 덮어쓰고 명나라와 동창과 연결될 수 있다.
새로운 동창 지부가 조선에 신설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중요성 낮은 정보를 대가로 명 내부의 사정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
저들의 꾀로 저들의 발등을 찍어버리는 계책이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공작이라는 게 발각된다면.”
“달리 방도가 있나?”
“그건.”
이이는 입술을 핥았다.
그는 조용히 있던 우의정 심수경을 바라보았다. 심수경은 동조하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가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만일 사신이 매수당한 척만 하고서 본국에 아조의 시도를 사실대로 전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동창의 지부를 없앴다고 시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동창의 지부가 사라진 시점에서 명이 의심할 곳은 한 군데밖에 없네.”
조선이다.
그리고 명나라는 조선을 상대라면 심증만으로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나라다. 첩자를 당당히 사신으로 파견하지 않았나.
“좌상 말대로 사신이 기만술을 펼칠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적절한 대안이 없는 한, 전하께서 나서게 두느니 이런 전략이라도 취하는 게 낫네.”
“음.”
이이와 심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은 신하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직접 나서서 해결했으니까. 그는 진전 없음을 참지 못했다. 뭐라도 해야 얼마 있지도 않은 인내심을 계속해서 발휘하겠지.
그리고.
“대책의 성격을 생각하면 전하께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실 걸세.”
동창의 꾀를 역이용해 그들에게 돌려준다.
솔직하게 평가하면 간사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확실히 전하의 입맛에는 맞겠군요.”
“사신이 심기를 거스르더라도 받아주시겠지.”
“지원도 확실하실 테고요.”
“그렇네.”
노수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심수경에게 향하자, 심수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노수신이 말했다.
“우의정께선 뭘 알긴 알고서 끄덕이는 건가?”
심수경을 갈구는 걸 잊지 않는 노수신이다.
* * *
작전명 ‘지식의 탑’의 시행으로 인쇄소는 민간의 도서를 싼값에 찍어주게 되었다.
이러한 소식이 퍼지기 무섭게 각지에서 자기네 글을 찍어달라는 인간들로 한때 인쇄소 앞은 길바닥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선비와 노비들로 가득했다.
가장 인기가 많은 장르는 족보다.
가문은 대를 거칠수록 가지가 갈라져 짬 좀 찼다는 집안은 족보만으로 벽면을 채울 정도다. 그게 자랑거리가 되는 세상이라, 양반가에서는 어떤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족보를 갖추고자 했다.
없는 놈은 없는 놈대로 본인이 족보를 가져와서 진을 치고, 있는 놈은 있는 놈대로 노비에게 족보와 함께 내수사의 어음을 두둑이 붙여주어 인쇄 순서를 앞당기게 했다.
족보 다음으로 많은 장르는 수기였다.
육신은 죽고 나면 없어지는 것이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족적을 책으로 남기고자 했다.
마지막은 패설이다.
민간에서 돌아다니는 구전설화를 모은 것부터, 자신이 직접 창작한 소설까지. 실화가 아니어도 그런 식으로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지금은.
“이게 끝이야?”
뒹굴거리던 왕은 막 최종장을 넘긴 패설을 내려놓았다.
제목은 ‘조선의 명왕.’
충성스러운 백성 하나가 자신을 찬양하고자 낸 책인 줄 알았으니 단순한 패설이었다. 결말이 얼마나 허망한지 이놈이 글 쓰다 말고 죽어서 다른 사람이 급하게 완결했나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감상을 끝내고 있으니 정면의 문이 열리며 내시가 입장했다.
“전하.”
상선 김기문이었다.
“연회가 다 준비되었나 보군.”
“그러하옵니다. 또한 전하께서 주문하신대로 영의정의 주안상에만 고추가 잔뜩 들어갔나이다.”
“눈치 채지는 않았겠지?”
“신이 직접 보았을 때는 분간할 수 없었사옵니다.”
“좋아, 감히 나를 상대로 겁박한 죄는 치러야지.”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익선관을 챙겼다.
오늘 연회는 일전에 왕을 설득하고자 콱 죽어버리겠다며 겁박한 영의정 노수신에 대한 복수만 아니라, 특별한 손님의 소개도 있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