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55화
89. 작은 고추가 맵다 (2)
“냄새만 맡아도 코가 따가운데, 어찌하여 이런 국을 굳이 드시고자 하시옵니까?”
상선 김기문이 물었다.
내 앞에 차려진 수라상에는 새빨간 국물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오직 뚝배기가 아닌 대접에 담겼다는 것뿐이다.
“딱 봐도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지 않은가?”
“아시면서도 굳이 드시고자 하시옵니까.”
“아니까 굳이 먹으려는 걸세.”
먼저 국을 기미한 상궁은 입술을 살짝 연 채 열심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이런 매움은 생소한만큼 견디기도 힘들겠지.
나는 다르다.
그동안 고추를 맛본 적 없는 순진무구한 나의 입도 처음에는 맵겠지만, 금방 익숙해질 거다. 고추 없이는 못 사는 인간으로 돌아가는 거지.
조금 변태같나.
잡생각은 치워두고 수저로 국을 푹 드니 주먹만 한 뼈가 나타났다.
감자탕은 또 뼈에 붙은 살점을 발라먹는 게 별미지. 서둘러 고기를 해치우고 국물에 밥 말아먹고 싶었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국물부터.
-후룩!
짜릿한 매움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저, 전하.”
곁에서 보고 있던 김기문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수라에 문제라도 있사옵니까?”
“왜 묻는 건가?”
“옥루를…….”
그새 눈물까지 흘렸단 말인가. 나는 손끝으로 눈가를 닦고는 답했다.
“나의 영혼은 구원받았다!”
모든 음식이 짜거나 싱겁기만 한 미식의 지옥에서 말이지.
이제는 수라에 들어갈 모든 음식에 고추와 고춧가루를 뿌리라고 해야겠군. 미친 발상이지만, 달달한 디저트 위에도 풋고추를 썰어놓게 할 참이다.
“전하께서 만족하셨다면 참으로 다행이옵나이다.”
김기문은 긴가민가한 투로 답하고는 기미상궁을 바라보았다. 수라가 얼마나 맛있기에 영혼이 구원받았냐고 할 정도냐고 묻듯이.
고추의 매운맛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상궁도 의아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내색하지는 않으나 시뻘건 국에 밥까지 마는 나를 보더니 은근히 경악하기까지 했다.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니.
식사를 마친 나는 배를 꺼트리고자 후원을 찾았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호수는 잔잔했고 한중간에 만들어진 인공섬과 누각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보는 사람도 궁인과 위사밖에 없겠다. 나는 눈치 보지 않고 잔디 위에 벌러덩 앉았다.
“저, 전하.”
“이미 앉았는데 어쩌겠나.”
“용포가 젖거나 더러워지면 상의원의 관리와 궁녀들이 고생하지 않겠사옵니까.”
“나 정도면 오래되어서 해진 용포 정도는 싹 다 버리고 색조별로 몇 벌씩 갖춰도 되지 않겠나?”
“전하께서 예법을 존중하셔야 다른 사람들도 예법을 존중하고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지금이라고 내가 예법을 존중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일국의 군주라는 인간이 체면도 없이 풀밭에 앉은 걸 제외하더라도 말이야.
“분위기 전환을 위해 용포 한 벌 맞춰야겠다. 붉은색은 질렸으니 녹색은 어떠한가?”
“녹색은 하잘것없는 초(草)의 색으로 옛사람들은 천색(賤色)이라 업신여겼으며, 한때는 경국대전에서도 참하관의 복색을 녹색으로 규정하였으니 군주의 격식에 맞지 않은 듯하옵니다.”
“내가 입으면 달라지겠지. 게다가 녹색이면 내가 풀밭에 몇 번이고 앉아도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이참에 녹색으로 한 벌 지으라!”
상선은 답하는 대신 발을 돌렸다. 명을 받들지 않겠다고 항의라도 하는 건가.
은근한 눈총으로 따지고자 고개를 돌리니 뒤편에 익숙한 사람이 있었다.
중전이었다.
그녀는 풀밭에 덩그러니 앉은 나를 바라보더니 상선에게 말했다.
“일국의 군주가 의자나 깔 것 없이 흙 위에 앉아계시는데 상선께서는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송구하옵니다, 마마.”
김기문은 내가 못 말릴 인간이라고 변명하는 대신 자신의 잘못이라 인정했다.
나는 차마 애꿎은 사람이 고생하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전, 내가 어디 말린다고 말려지는 사람입니까. 상선이 만류했어도 부득불 풀밭에 앉았으니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나라와 만백성의 주인이십니다. 그런 사람이 격식 없이 행동하신다면,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이 혼나더라도 별수 없지요.”
“상선을 혼내는 척하면서 나를 혼내실 생각이셨구려.”
“나랏일의 중대함은 잘 알고 아녀자가 끼어들 일은 아님을 잘 압니다만, 소첩은 전하의 용안마저 잊어버릴 판입니다.”
그래서 직접 행차하셨구나.
신하들이 왕통이 바뀌었으니 하루빨리 국본을 생산하여야 한다고 닦달하여 원자를 보았으나, 이후로는 일이 많아 중궁전의 방문이 뜸했다.
아니, 뜸한 게 아니라 거의 없었지.
아니……,
거의가 아니라 그냥 없었던가?
크흠.
흠.
“간밤에 만기(萬機)의 노고를 호소하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어, 그랬지요. 이제는 나아졌습니다.”
스트레스를 안 받은 것은 아니지만, 뜨끈한 국밥 한 그릇에 치유됐다.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스트레스를 아예 안 받을 수 있나. 중요한 건 잘 푸는 거다. 그리고 나는 나의 미식에 빠져 있던 마지막 퍼즐을 맞춘 참이었다.
“진심이십니까?”
“내가 중전에게 어찌 거짓으로 말하겠습니까.”
“하늘에게서 중임을 맡아 나라를 다스리게 되셨으니, 앞으로 피로를 느끼실 일이 많을 것이옵니다. 처의 역할은 지아비를 지탱하는 것이니 힘드실 땐 신첩의 처소를 찾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중궁은 허리를 숙이고는 궁녀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나는 상선에게 말했다.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은데.”
“무엇이 말이옵니까?”
“피로 말이오. 근래에 귀한 식재를 얻어서.”
“전하.”
상선 김기문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어찌 사내가 되셔서 내시보다 여심을 모를 수가 있으시옵니까?”
“내가? 왜? 뭘 잘못했나?”
* * *
의정부.
삼정승은 막 어전회의를 마치고 등청한 참이었다. 각자 자리에 앉자 좌의정 이이가 입을 열었다.
“전하의 독불장군 같은 성정이 많이 누그러지셨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민망하게 제공들 앞에서 꼬박꼬박 붙이시던 수식어도 아니 말씀하셨지요.”
우의정 심수경이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임 영의정 박순이 직접 지목해서 우의정에 천거되었거늘, 동료이자 상관인 노수신과 이이에게 걸핏하면 첩질하는 인간이라고 욕을 먹어댔다.
원흉은 당연히 왕이었다.
어전에서 대놓고 첩질하는 우의정, 첩질이나 하는 심수경, 하고 갈궈대니 다른 의정들은 물론 당상 대신들조차 첩질한다며 놀려댔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본명인 심수경이 아니라 심첩질이라 부른다는 풍문까지 접했다.
호조판서 이산해가 쌀로 철을 연금하니 미철재상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잘 어울린다면 비웃었는데 이제는 제 코가 석자였다.
그런데 오늘 왕은 평소답지 않게 수식어를 떼고 우상, 우의정, 하면서 심수경이 오래전부터 바란대로 불러주고 있었다.
이이가 노수신에게 물었다.
“대감께서는 알고 계신 것 없으십니까?”
“내가 듣기로는 소주방에 고추를 내리며 새로운 조리법을 알려주셨다고 하네.”
“고추가 무엇입니까?”
“길고 뾰족한 열매인데 익으면 초록색에서 붉게 변한다고 하네. 맛은 원래 이름이 고초(苦椒)가 아닐까 할 정도로 맵다는군.”
“특이하군요. 어쩌면 고추라는 열매에는 사람을 진정시키는 약효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번 먹어보고 싶군요.”
“직접?”
“전하시라면 기회를 주시겠지요.”
왕은 이따금 신하들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하사했다.
과거에는 왕의 체면과 체통을 생각해 자제할 것을 권했으나, 당연하지만 소용은 없었고 왕이 하사하는 음식은 하나 같이 진미라서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단지 원자나 후왕은 금상을 쫓아 이상한 취미를 가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금상이야 별짓 다 하면서도 왕 노릇을 하지만, 동서고금에는 별짓만 하고 왕 노릇을 안 했던 암군이 많았으니까.
“좌상 말대로라면 나는 전하께서 고추를 한껏 드셨으면 좋겠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 조금이라도 죽이실 수 있으시다면 말이네.”
“우리가 실망시키지만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성격을 더 죽이실 수 있으시겠지요. 명나라와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요동총병에게 사신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고하고 사죄를 표하는 서찰을 보내두었네.”
“무작정 말입니까?”
“전하께 인가를 받았네.”
“그걸 인가하셨단 말씀이십니까. 평소의 전하시라면 용납하지 않았을 텐데요.”
명나라가 대응을 수립할 기회를 주게 되니까.
왕이 하고 싶은 대로 했다면 전말을 알려주는 대신 국경지대에 군사부터 배치했을 거다. 명이 도발에 말려들어 유사시가 일어나기를 고대하면서.
그러다 우발적인 상황이라도 발생하면 이때다, 하고 군대를 몰아 침공했겠지.
왕 아래에서 오래 일했더니 예지력이 생길 정도였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전하께서 한 접어주시다니 고추라는 녀석이 비상하긴 하군요.”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나. 전하께서 고추를 한껏 드셨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잃은 게 없지는 않았네.”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있게 마련입니다. 무엇을 내어주셨습니까?”
“용포를 녹색으로 지어 입으시겠다는군.”
“……왜요?”
“내가 어찌 아나.”
노수신은 담담하게 말했다.
진짜 몰랐으니까. 그리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명나라의 일만 신경 쓰기도 벅찼다.
“풀밭에 앉았다가 물이 들어도 티가 안 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설마 그렇겠습니까. 갑자기 녹색이 마음에 드셨는지도 모르지요.”
“전하의 심리는 날카로우나 때로는 어디로 튈지 모르지. 누가 알겠나? 정말로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녹색 용포를 원하실지.”
정계 짬밥이 빛을 발하는 노수신이었다.
왕이 입을 용포의 색상이 녹색인지 무지개색인지는 조만간 상관없어질 예정이므로 (전하께서는 에그머니나, 남사스러워! 하고 반응하는 신하들에게 엿이나 먹으라고 하실 테니) 이이는 본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만일 명이 영상이 아닌 전하의 사과를 직접 받고자 하거나, 약점 삼아 걸고넘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전자는 내가 울고불고 매달리면 가망이 있는데 후자는 답이 없네. 전하께서는 먼저 불의한 행동을 한 명이 큰소리치는 것을 참지 못하실 테니까.”
“이 사람의 생이 길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로 최악의 경우로 흘러가더군요.”
“명이 전하의 성정과 조선의 저력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해준다면 좋겠군.”
아무리 명나라가 크고 강한 나라라도, 조선이라고 약한 나라는 아니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왕의 영도 아래 조선은 일신했다. 무력은 과거의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무기의 발전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편입된 여진족과 열도인들의 흉포함과 위험성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조선의 발전한 무기로 위장한다?
명나라가 아무리 크고 강한 나라여도 조선은 예전과 다르다. 과거처럼 우위를 이용해 무작정 찍어 누르겠다는 건 압정을 굳이 힘줘서 밟는 꼴일 뿐이다.
문제는 그들이 현실을 아느냐, 그리고 인정할 줄 아느냐였다.
“전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아야 할 텐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