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54화
89. 작은 고추가 맵다 (1)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이옵니까?”
노수신이 물었다.
조선을 감시하던 동창의 지부가 증발하자 명나라는 진위를 파악하고자 사신을 보냈다.
왕의 증언에 따르면 해당 사신은 미국으로 갔다. 미국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분명 명나라는 조선을 경계하게 되었겠지.
지난 이백 년 동안 돈독했던 명과 조선 사이에 크나큰 금이 생겼다.
“저들이 조선을 조금이라도 두려워한다면 조용히 있을 테고, 아니라면 큰소리를 치겠지.”
“설마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도 큰소리를 치겠사옵니까?”
무려 우호국에 간첩 한둘이 아니라 지부를 심었다. 큰소리가 나온다면 당연히 조선에서 나와야 했다. 당장 참아주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때로는 뻔뻔한 게 나서는 것이 상책일 수도 있지.”
그래서 평소에 뻔뻔하신 것이로군.
노수신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신은 명에도 전하 같으신 분이 있을까 우려스럽사옵니다.”
과연 명나라에서 큰소리를 친다면 왕이 곱게 대응할까?
거슬리는 것은 뭐든지 없애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산을 무너뜨리고 물길을 만들며 큐슈까지 정토하지 않았나.
고려부터 계획의 수립은 물론 시행까지 극도의 신중함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다.
하지만 왕이 그런 절차를 정직하게 밟았냐고 한다면, 전혀 아니다. 필요하면 행한다는 단순한 논리대로 무식하게 성사되었을 뿐.
신하들은 매번 난색과 곤혹을 표했지만 왕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노수신은 최악의 경우가 떠올랐다.
전쟁!
조선은 왕의 주도로 대대적인 전쟁을 벌인 적이 있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두 눈으로 가서 진위를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왕은 감흥은 드러내지 않았으나 자신이 틀린 판단을 하지 않았다는 확신은 들었을 거다.
그리고 전쟁과 같은 국가 중대사에서 자신과 확신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없다. 명나라처럼 국경까지 붙어있는 대국이 상대라면 특히나.
노수신은 왕의 의향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명이 큰소리를 친다면 어찌하실 것이옵니까?”
“다시는 그 오만방자한 입을 벙긋 못하게 만들겠다.”
“…….”
노수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 이래야 바로 전하시지. 물어볼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사신이 부정한 의도로 방문하더라도 눈 감고 당해주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전하 이전에도 도성에 숨어든 동창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
그럼에도 동창이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최악의 경우만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늑대를 잡자고 호랑이를 불러들였다간 낭패니까.
왕이 절제가 안 되는 사람이라서 문제지.
“사신의 일은 이미 지났으니 어쩔 수 없더라도, 앞으로 벌어질 일은 냉정히 대응하여 최선의 결과를 도모하셔야 하옵니다.”
“소극적이군.”
“사안이 중한만큼 신중하셔야 하옵니다.”
“매사에 당해주는 사람은 우습게 보이게 마련이지.”
“사람이 아니라 국가의 일이옵니다.”
“국가라고 다를 것 같은가?”
왕의 물음에 노수신은 마른 입술을 핥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입밖으로 꺼냈다간 항복이나 다름없이 되거나, 의미 없는 논의만 이어질 테니까.
대신 노수신은 다른 의정들에게 힘을 빌리기로 했다.
좌의정 이이는 왕이 주도하는 일이라면 대부분 지지하는 편이나, 다 종묘와 사직을 향한 충심의 발로다.
명과의 일전까지 각오하지는 않겠지.
노수신이 눈빛을 보내자 이이가 답하듯 한 걸음 나섰다.
“전하.”
“좌의정.”
“전하께서 만일 명과의 전쟁을 각오하신다면 당연히 이길 자신이 있으시기 때문일 것이옵니다.”
“새삼스러운 소리를 다 하는군.”
“하오나 명과의 전쟁은 승패와는 별개로 아조가 잃을 것이 많사옵니다. 군민들 역시 큐슈의 원정이 막 끝나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새로운 전쟁을 바라지 않을 것이옵니다.”
“전쟁은 내가 원치 않는다고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번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명이 아닌 전하께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 사료되옵니다.”
이이의 지적에 노수신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지!’
왕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명나라가 아닌 그에게 주도권이 있다는 식을 포장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겠지.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예상과 달랐다. 최악의 경우도 아니었다.
“경들은 아조의 영화가 사해를 떨친다며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만백성의 홍복이옵나이다.”
“우리는 연해도의 여진족을 복속시켰고 큐슈의 열도인들을 정토했다.”
“개국 이래 이와 같은 영화는 없었나이다.”
“국가 사이의 관계란 관청의 직분과도 같다. 하관이 상관을 거슬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명은 전통적으로 패자의 역할을 맡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아니지.”
세상은 넓어졌고 조선은 일신했다.
남만인들이 살아가는 두 나라는 대양 사이에 줄 하나를 긋고 좌우를 각기의 영토로 선포했다.
그들은 세계 각지를 개척하고 편입했으며 이제는 지구 반대편인 조선까지 넘보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세계를 반분한 오만한 두 나라는 같은 왕을 모시게 되었다.
아직도 명나라가 패자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단지 국경을 마주한 강국일 뿐이다.
“내 생각엔 명나라가 급변하는 세상과 조선을 상대로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할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할 것 같은데.”
왕은 덧붙였다.
“경들은 말하지. 전쟁은 좋을 것이 없다고.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산을 넘지 못하면 더 넓은 세상에서 격리된 채 언제까지고 산 밑에 있을 수밖에 없다.”
명을 넘어야 할 산으로 선언하는 왕의 포부에 신하들은 저릿한 감명을 받으면서도, 냉정한 판단력을 잃지 않았다.
명을 치려는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운 태조 대왕이라고 명나라의 고압적인 태도에 순응만한 것은 아니다.
뒤에서는 욕을 다하면서도 결국에는 참았다.
그리고 여차하면 조선을 정벌해버릴 수도 있다며 겁박을 일삼은 홍무제도, 말과는 달리 조선을 건드리지 않았다.
양국의 오묘한 관계가 어떻건 명과 조선은 야만인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의지할 대상이라곤 서로밖에 없는 문명국이었으니까.
이제 클 만큼 컸으니까 너희들에게 아쉬운 척하지 않겠다는 식의 태도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노수신은 조심스럽게 아뢨다.
“야만인들이 세계를 정복해 나가는 요즘과 같은 시기는 문명의 겨울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아무리 사이가 나쁜 형제라도 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서로 부둥켜안고 체온을 나눠야만 동사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니, 산을 넘더라도 겨울이 지나 볕이 온화해졌을 때를 기약하는 것이 지극히 이로운 줄로 아옵니다.”
영의정의 진심 어린 간청에 왕의 기세가 꺾였다.
그는 눈을 감고서 침묵하더니, 한참이 지나 어렵사리 말했다.
“경의 기대대로 명이 아조와 의존하여 험난한 시기를 함께 견디고자 한다면 동창의 일은 묻어둘 것이나,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심기를 거스른다면 나 역시 냉정하게 있지만은 않겠다.”
“그때까지 명의 일은 신에게 일임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사옵니다.”
* * *
박석이 깔려 풀 한 포기 없는 궁궐에서는 밤이 되어도 벌레 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아득히 먼 곳에서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만이 아련히 들려올 뿐.
편전 집무실에 피워놓은 촛대의 불은 꺼질 줄 몰랐고 왕의 눈도 공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전하. 이미 날이 많이 늦었으니 이만 침소에 드시옵소서.”
상선이 권했다.
“침소에 들고 싶어도 영 심란해서 잠이 안 오는군.”
“명나라와의 일 때문이옵니까?”
“그래.”
“동창과 사신을 처리할 때는 거리낌 없지 않으셨사옵니까.”
“무례를 저지르는 상대에게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건, 계속 무례를 저질러도 된다는 허락이나 다름없지. 나는 후왕에게 문제를 떠넘기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동창이 조선에 언제부터 지부까지 차렸는지는 모른다.
분명한 점은 아주 오래전부터 동창은 도성에서 활동해 왔고, 그것을 눈치챈 왕이나 대신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동창의 지부는 나의 치세까지 존속해 왔다는 거다.
이유야 있었겠지.
동창은 황제의 직속 기관이다. 놈들은 벌집이었고 섣불리 건드렸다간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
명을 상대로는 지고 들어가는 입장이었던 조선으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흘러 사정이 달라지면 후왕이 지금 내가 나서는 것보다는 잘 해결하겠지. 그런 기대감과 방만이 섞인 태도로 내버려 두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중과 조심스러움의 대가가 무엇이었나? 왕이 기거하는 수도에서 이국의 첩자들이 버젓이 활동하지 않았나.
누군가는 매듭을 지어야 했고, 나는 선왕들처럼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후왕들에게 떠넘기는 꼴이 된다.
그래서 없앴다.
“대신들을 믿으시옵소서. 영의정이 자신에게 맡겨달라 청하지 않으셨사옵니까.”
“노수신도 나처럼 걱정과 고민으로 날을 새고 있을까?”
“그건…….”
상선은 곤란해하다 흐릿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노인은 밤잠이 많지 않사옵니까.”
“내가 여기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능력이 아니라 운 덕이라고 믿었네. 그래서 해야 할 일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유능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큐슈를 정복했어도 아직 안심할 수 없어. 현지의 열도인들은 크게 내응했고 육상에서는 변변찮은 싸움이랄 것도 없이 연승만 거두었지. 오히려 신하들이 왜적을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게 됐을까 두렵네.”
나아가 명까지도.
상선이 답했다.
“선대왕들께서도 다 느낀 감정일 것이옵니다. 너무 심열 쓰지 마시옵소서.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으시옵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은 좋군.”
“하오시면 침소에 드시옵소서. 그리 해주신다면 신도 기분이 좋아질 것이옵니다.”
“하하.”
다음 날.
대전으로 향할 때만 하더라도 뜬눈으로 밤을 세울 줄 알았는데, 피곤했던지 눈을 붙이기 무섭게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꿈은 없었다.
“기침하셨사옵니까?”
상선 김기문이 물었다.
“일어났다.”
“조반과 함께 탕약을 들이겠나이다.”
“승전색에게 집무실의 서안을 미리 채워두라 해라.”
“예.”
문을 여럿 열어두고 숨을 돌리고 있으니, 상궁과 궁녀들이 수라상을 끌어안고 입장했다.
자극적인 산해진미는 만기(萬機)라 불릴 정도로 일감에 치이고 사는 왕 노릇에 몇 없는 낙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단출한 식사를 주문했다.
“지친 나의 영혼을 위로해줄 음식이 드디어 등장했군.”
입맛이 없고 지쳤을 때 필요한 건 바로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이다.
고추의 매운맛은 특히나 빠질 수 없다.
그러나 고추는 조선의 토산물이 아니었다.
나는 맵고 짜고 뜨거운 음식에 길들여졌으나, 고추가 도래하지 않은 조선의 음식은 짜거나 뜨거울 수는 있어도 맵지는 않았다.
매운맛 금단현상에 시달린 나는 생마늘과 초피를 씹으며 영혼을 달랬으나 속만 쓰릴 뿐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눈앞에서 새빨간 국물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