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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53화 (25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53화

88. 지식의 탑 (2)

“이건?”

책의 종이는 허준이 평소 보아온 종이와는 겉보기도, 질감도 달랐다.

“양지일세.”

“종이 특유의 섬유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매끈하옵니다. 본디 종이는 닥나무의 섬유가 엉켜서 만들어지지 않사옵니까?”

“기존의 종이는 그랬지.”

한지의 우수성도 엉킨 닥나무 섬유에서 나온다.

흡습성이 좋고 통풍성도 좋아 창살에 바르기도 하고, 물에 젖어도 풀어지지 않아 사용한 종이를 빨아서 다시 쓸 수도 있었다.

섬유 조각마다 색이 달라 만들어지는 특유의 무늬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네. 닥나무 섬유를 푼 물에서 한 장, 한 장 떠서 만드니 공정을 반자동화해도 생산성에 한계가 있지.”

“종이는 충분하지 않사옵니까?”

주기적으로 거리에 신문을 뿌릴 정도니까.

“육조거리를 덮는 데 신문 천 장이면 충분하지. 하지만 도성 백성들 모두가 보기에는 충분한가?”

“아니옵니다.”

도성에는 족히 수십만 명이 사니까.

“나아가, 천 장의 종이를 신문으로 뿌리지 않고 책으로 만들면 몇 권이 되겠나? 한 권에 백 장의 종이를 쓴다면 고작 열 권에 불과하네.”

허준은 끄덕였다. 신문을 뿌리는 모습이 워낙 인상적이라 간과했다.

보이는 것과 달리 종이의 보급량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책을 충분히 찍어내기 위해서는 종이 생산에 획기적인 발전이 필요했네. 활자와 인쇄 기술도 중요하지만 종이가 없으면 책 자체를 만들 수 없으니까.”

그 결과물이 양지였다.

한지를 만드는 절차들을 대폭 단축하고 생략했다.

대가는 내수성과 내구력이었다. 물에 젖으면 뚝뚝 끊어졌으니까. 비가 오는 밖에 잠시만 두어도 떡이 되겠지.

한지처럼 물에 빨아 재활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건 질 좋은 종이로 만들어진 책 수십 권이 아니라, 양산된 저질 책 수만 권이지.”

지금은 부유한 소수만이 지식을 독점한다.

종이가 여전히 비싸고 인쇄가 대중화되지 않아서다. 책을 만드는 주체도 대부분 민간이 아니라 조정이다.

직접 만들기에는 비용과 품이 많이 들어가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었으니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조선은 갖가지 이유로 무수히 많은 인재를 놓쳐 왔다. 역사에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묻힌 천재들이 얼마나 많을까?

신분제가 대표적인 장애물이지만, 지식이 부유한 자의 전유물인 이상 신분제의 유무와 달리 대부분은 자신의 지성을 시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출판에 대해서라면 걱정할 필요 없네. 변화는 종이에만 있지 않았지.”

왕이 건넨 책, 만천명월에 찍힌 글자들의 형상은 활자마저 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활자는 초성과 중성, 종성 단위로 분리되어 자음과 모음 활자로 나뉘었으며 공백 활자와 조합되어 하나의 글자를 만든다.

이제 복잡한 형상의 한자 수천 개마다 사용 빈도까지 고려해 가며 찍어낼 필요가 없어졌다.

수천 가지 조합이 가능한 언문에 대해서도 쉽게 대응할 수 있다. 장인들의 손가락에 굳은살이 것만 감수한다면 말이다.

“신을 위해 새로운 종이와 활자까지 발명해 주시다니, 망극하고 송구스러울 뿐이옵니다.”

“후원해 준다고 했으니 제대로 해야지. 또한 양지와 새 활자의 효용도 원장의 의서 출판에만 있지는 않네.”

눈앞의 만천명월이 증거였다.

의서보다 먼저 찍힌 이 도서는, 개국 3세대 왕인 세종대왕이 펼쳐낸 용비어천가와 마찬가지로 반정으로 즉위한 왕의 정통성을 선전하는 책이었다.

거의 신(新) 왕조 수준의 전설과 가설을 담아낸 만천명월에서는 금상의 기적적인 업적들은 직접적으로, 이따금은 은유나 비유로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만천명월이 전형적인 선전용 도서가 아닌 이유가 있었다.

“백성들이 이걸로 언문을 배우겠군요.”

만천명월은 언문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구절들은 예문이다. 백성들은 스스로 언문을 배우면서 만천명월을 함께 익히리라.

무시무시한 책이었다.

“대다수 백성은 평소 글을 쓰거나 읽을 일이 없어 눈 뜬 장님이나 다름없네. 무작정 책을 찍어내 봐야, 읽을 사람이 없다면 소용없지.”

명분은 좋았다.

“신하들은 알고 있사옵니까?”

“알게 되겠지.”

만천명월이 민간에 배부된 후에야.

허준은 자신이 의원임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관리가 되어 이런 왕 아래에서 일했다면, 기가 빨려 수명이 반 토막 났으리라.

은행에서 우연히 마주한 박순이 영의정직마저 내려놓으며 도망치려 한 이유가 이제야 와닿았다.

“출판은 걱정할 필요가 없네만 가급적이면 원고를 서둘러 완성해 주길 바라네. 만천명월을 민간에 배부한 후에는, 다른 사람들의 책도 인쇄해줄 예정이니까.”

느긋하게 있다간 순번이 밀려 책이 나오는 데 한참 걸리리라는 조언이었다.

과연 왕은 의서 출판만을 위해 새 종이와 활자를 고안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백성이 글을 깨우치고 다양한 지식을 접할 수 있게 되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유학은 예로부터 백성들의 계몽을 권장했지만, 유학자들은 백성 계몽이 소극적이었다. 든 게 많은 사람은 반항적으로 변하게 마련이니까.

그마저도 왕에게는 계획의 일부인 것일까?

* * *

“전하.”

영의정 노수신이 아뢨다.

“말하라.”

“세간에서 만천명월이라는 책이 돌고 있사온데,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전하께서 배부하셨사옵니까?”

“맞네.”

왕의 당당한 대답에 노수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전에서 보일 태도가 아니었지만, 왕은 본인만큼이나 신하들의 당당함에도 관대했다.

일관적이신 걸까, 예법이라곤 밥 말아 먹어 신경 쓰지 않으시는 걸까.

이유야 무엇이건 노수신도 솔직해지기로 했다.

“전하께서 배부하신 만천명월은 선대왕들로부터 내려오는 아조의 종묘보다 전하 자체를 추앙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옵니다.”

“오늘날의 조선을 만든 분은 성상 전하이시나 전하께서 즉위하신 날의 조선은 열성조들께서 만드셨사옵니다.”

“내가 모르겠나.”

단지 신경 쓰지 않을 뿐이지.

이 땅에 조선이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가 세워져 있었더라도, 왕은 옥좌에 있던 사람을 쳐죽이고 찬탈할 사람이었다.

그러니 열성조가 누구건 알 바겠나.

유교 국가에서 패륜이 기본탑재라니? 불씨가 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도 이 정도는 아니다.

“전하.”

“경이 우려를 표하는 이유는 잘 알고 있다.”

“아시면서도 선전을 하셨단 말씀이시옵니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언문을 가르친다는 좋은 의도에 전하를 향한 찬양을 섞어 백성들을 세뇌하려는 시도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사옵니다.”

“아니, 이건 진짜 중요한 문제인데.”

노수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왕이 강조하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일은 맞으리라. 하지만 속이 너무나도 뻔하게 보였다.

“한 번만 속겠사옵니다.”

“깐깐하군.”

“무슨 문제인지나 알려주시옵소서.”

“일전에 명나라의 사신이 방문했다가 사라진 적이 있었지.”

“신들은 여전히 사신들이 어디로 솟았는지 궁금해하옵니다.”

“그들이 동창과 접촉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동창이라 하심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영락제는 다른 자 역시 반란으로 자신의 자리를 노릴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동창(東廠)이다.

동쪽 창고라는 단순한 이름과 달리 동창은 첩보 기관이다.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환관을 수장으로, 하부에는 금의위라는 무장 단체가 있어 동창이 지목하는 황제의 적을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제거했다.

“하온데 명나라의 기관이 어떻게 아조에.”

“명은 조선을 신하국으로 깔보지만, 대우가 박하다고 중요성까지 박할 수는 없지.”

요동 바로 아래에 위치한 조선은 명나라에 우호적이며, 동시에 명의 숙적인 여진족과 왜를 동시에 견제해 주는 나라였다.

하지만 세상 일에 절대란 없는 법이며 나랏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태조 이성계는 여진족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졌고 명은 이성계가 여진족과 협력하여 명나라에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견제했다.

또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왜병들이 파죽지세로 침공하여 고작 보름만에 수도가 함락되자 명은 조선이 왜와 협력하여 명을 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조선이 더럽게 못 싸운 책임이 크지만…….

“명에서는 조선의 행보와 향방을 주의 깊게 살펴볼 수밖에 없네. 당연히 동창에서도 적극적으로 주시하고 있겠지. 그대들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말이야.”

왕이 뒤편을 향해 손짓하자 내시들이 잡동사니를 한 아름 끌어안고 등장했다.

그들은 친절하게 하나씩 물목을 가르쳐주는 대신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 사이에 쏟아부었다. 직접 가져가서 보라는 듯.

노수신은 내시들의 태도가 불편해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

그는 신하들의 대표로 무더기 앞에 나아가 발치에 걸린 문서를 하나 챙겼다.

돌돌 말린 문서는 겉보기에는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은, 대체로 겉과 속이 달리 포장되게 마련이다.

-펄럭!

낡은 종이가 펼쳐지고 내용이 드러난다.

익숙한 한자로 작성되었으나 이질적인 느낌이 있다. 같은 문자라도 필자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문서에 적힌 글자들은, 명나라 사신들과 필담을 나눌 때 받은 느낌 그대로였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었다.

“조선이 구주로 보낼 원정대에 사람을 심어 원정의 규모와 전황, 신무기의 정체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확보하라…….”

이하의 내용도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 조선의 사정을 알아내어 어딘가로 보고했고, 문서는 답서였다. 진정으로 명나라가 동창을 통하여 조선을 감시했단 말인가.

노골적인 내용에 노수신은 의심도 들었다. 용도를 다한 극비 문서를 폐기하지 않고 보관하는 것은 위험하니까.

하지만 그들의 사정을,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이 넘겨짚어서는 안 되겠지.

“도성에 숨어 있던 동창의 굴혈과 함께 확보한 증거들이네.”

“동창이 도성에 숨어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어찌하여 신들에게 알려주지 않으셨사옵니까?”

“보안을 위해서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네. 현직 관리들 중에서도 동창과 직, 간접적으로 협조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신들을 믿지 않으신단 말씀이시옵니까?”

“나랏일에 만일을 각오할 수는 없다. 유치한 말싸움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추궁은 그쯤하게.”

노수신은 쓰게 입술을 말았다. 맞는 말이었다. 불쾌한 가정이지만 현직 관리들 중에서 동창과 협조하는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자신이 왕보다 먼저 동창의 존재를 알았더라도 대응은 다르지 않았을 거다.

“신이 우매하여 코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몰랐사옵니다.”

왕이 나선 것은 신하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죄가 왕이 더욱 나서게 되는 명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잘못은 잘못이다. 신하가 부족하다면 차라리 왕이라도 나서주는 게 맞다.

물론 신하들은 왕이 나설 일이 없도록 제 역할을 다해야겠지.

“등잔 밑이 가장 어둡게 마련이지.”

왕은 덧붙였다.

“동창의 굴혈이 없어지고 몇 달이 흘러 명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냈다. 그간 아조가 명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는 했으나, 질책만 할 뿐이었던 명나라가 시기적절하게 이례적인 대응을 했지.”

“명철한 통찰이시옵니다.”

“사신은 도성에 심어놓은 동창의 지부와 접촉하기 위해 입국했다. 놈의 본의가 그러한 이상, 내가 어찌 관망만 할 수 있겠는가.”

확언이었다.

노수신은 왕이 사신의 저의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다소 합당하지 않고 위험하기까지 한 방식이 동원되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국의 사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큰 결례다.

특히나 상국의 사신이 좋지 못한 경험을 하고서 본국에 돌아갈 경우, 외교적으로 중대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사신은 미국으로 갔다고 했던가?

적어도 그가 명으로 돌아가지 못했음은 확실했다.

그러나 이국을 방문하러 간 사신이 귀환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외교적으로 문제가 된다.

부정한 목적을 가지고서 파견된 사신이라면, 더더욱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심정으로 조선에서 무언가 저질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과연 명이 제 발을 저릴지, 혹은 찔리는 마음에 오히려 조용히 있을지는 미상이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지난 이백 년 동안 돈독했던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는 크나큰 금이 생겼다. 영원히 봉합되지 못할 수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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