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52화
88. 지식의 탑 (1)
“요즘 도성은 잠시만 눈을 잠시만 떼도 바뀐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로군요.”
부원수 이억기가 감상을 드러냈다.
원정을 다녀올 동안 거리는 넓어지고 건물은 높아졌다.
운하공사가 끝나고 갈 곳 없어진 만능분이 민간으로 공급된 것이겠지. 감회가 새로웠다. 조선의 발전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아서.
이억기는 도성을 돌아다니며 무엇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궁금했으나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이 사람은 전하께 보고를 드려야 하니 먼저 입궐하겠습니다. 언제 시간을 내어 통기할 테니 자리를 가져봅시다.”
이억기의 제안에 허준은 고개를 숙였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홀로 덩그러니 남은 허준은 손만 살짝 들었다가 무안함에 헛기침했다.
과연 도성은 눈부시게 바뀌었다. 근 수십 년을 도성에서 일한 허준마저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으니까.
‘저쪽이 육조거리니 금천병원은 이쪽이겠군.’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니 어딘가에 도착하긴 했다. 금천병원이 아니라서 문제지.
커다란 건물이었다.
거의 3층 높이였는데 입구는 광화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웅장했다. 사람들은 분주히 입구를 들락거렸는데 안에서는 쇳덩이를 쏟아붓는 소리가 연이었다.
-우르르…….
-차르르르…….
도성에서 이런 일을 벌이는 사람은 하나다.
왕.
전하의 작품은 평범한 것이 없었다. 항상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허준은 과연 왕이 이번에는 무슨 일을 벌였나, 생각하며 들어섰다.
내부는 드넓었고 3층까지 뻥 뚫려 있었다. 궁궐 부럽지 않은 이곳에서 사람들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안쪽은 칸막이 쳐진 자리마다 사람이 앉아서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입이 연신 재잘대는 것을 보니 제법 중요한 일처럼 보였다.
‘무엇을 하느라 저리 바쁘단 말인가.’
직접 보고자 걸음을 옮기니 한 사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딱딱한 인상이었는데 허리에는 칼까지 찬 채라, 허준은 얌전히 물러났다.
주변 사람들은 사내가 무장한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이번에 도성에 귀환했는데 난생처음 보는 건물이 있어서 말이오.”
“원정에서 막 귀환한 분이시군요.”
“예에. 원정대 소속은 아니었습니다만.”
사내는 안쪽을 향해 말했다.
“여긴 금천은행입니다. 돈을 맡기거나 빌릴 수 있지요. 이름만 들어도 아시겠지만 전하께서 세우신 곳입니다.”
“돈이요?”
“화폐입니다.”
사내는 허리춤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보였다. 금속성 백색 광택이 인상적이었다. 중간에는 요긴하게 쓰일 구멍도 뻥 뚫려 있었다.
이외에도 특징이 있다면,
“작군요.”
동전은 작았다.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크기라 자칫 잃어버리기 쉬울 정도였다.
“동전은 적당히 작은 편이 좋지요. 커봐야 무겁기만 할 뿐입니다. 가치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화폐마다 금과 은이 일정 비율로 섞여 있으니까요.”
큐슈에서 엄청난 양의 금은과 구리를 가져간 이유가 바로 동전을 만들기 위해서였군.
몇 년이나 병원을 방치하고 나다닌 허준이었지만 원장이랍시고 걱정도 들었다.
모두가 화폐를 쓴다면 창고에 둔 포목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현물의 가치가 예전 같지 않을 텐데 여전히 포목으로 썩혀두고 있다면 큰일이었다.
“금천 병원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나가서 왼쪽으로 쭉 가시면 나옵니다. 병원이 워낙 크니 바로 알아보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허준은 예를 표하고는 은행을 나섰다. 즐비한 인파를 헤치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는데, 결국 늙은 선비 하나와 부딪혔다.
“아이고!”
늙은이가 앓는 소리와 함께 넘어지자 허준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됐네!”
“아닙니다. 다치셨을지도 모르니 일단 병원부터 함께 가시지요.”
마침 가는 길이었다.
“됐다니까!”
늙은이는 주섬주섬 일어나며 가슴팍을 매만졌다. 소중한 물건이라도 숨겨둔 걸까. 그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댔다.
“내 어음들…… 잘 있군.”
허준이 상태를 확인하고자 늙은이를 바라보자 두 사람 모두 놀랐다.
아는 얼굴이었다.
“영상 대감?”
박순이었다.
새카맣게 먹을 칠한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영의정씩이나 되는 사람의 하관만으로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쉿!”
박순이 검지를 입에 대자 허준이 속삭이듯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안경은 또 뭐고요?”
“난 영의정이 아닐세. 때려치운 지 오랠세.”
“예?”
“전하께 당하기만 하는 것도 지쳤네. 의정부는 이번에도 당했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종교 문제일세. 이제 귀환한 것 같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듣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조선왕보다는 통수왕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전하께 당하고만 사느니 한적한 곳에서 유유자적 사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걸세!”
박순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허준의 곁을 지나쳐 은행으로 들어섰다. 재산을 환전해 지방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던 걸까.
검은 안경은 위장이었던 모양이다.
딱히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허준은 박순의 탈주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 * *
며칠 뒤.
병원을 방문하고서 미뤄둔 문제들을 해결한 허준은, 왕의 부름을 받아 입궐했다.
휴일이라 그런지 육조거리는 한산했으며 궐 내도 마찬가지였다. 궁인들의 안내를 받아 편전에 입장하니 왕은 어좌에 드러누운 채 얼굴에 서찰을 펼쳐놓고 있었다.
자던 중이었나.
참으로 기품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전하?”
허준의 부름에 왕은 얼굴을 덮은 서찰을 채 치우지도 않고서 답했다.
“왔군.”
“보시는 대로이옵니다.”
“큐슈에서의 경험은 도움이 되었는가?”
“전장을 쫓아다니며 쌓은 경험들은 예상대로 많은 도움이 되었으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도 도움을 받았사옵니다.”
“불편한 진실을 목도한 기분이겠군.”
“야만인이라 치부해온 자들의 문물이 일부 아조보다 앞선다고 눈을 가리고 부정한다면, 꿩이 맹수를 피하고자 머리만 숨기는 우둔함과 다르지 않을 것이옵니다.”
“원장은 진정으로 의학에 열의가 깊군.”
“인명을 살리는 일에 열의가 없을 수는 없사옵니다.”
“많은 사람이 하찮은 가치를 지키고자 실리를 포기하지.”
“가치를 수호하고자 약간의 실리는 포기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요.”
허준의 답에 왕은 서찰을 치우고는 자세를 고쳤다. 자신이 원한 답이 아니어서일까. 그는 허준을 바라보았다.
막 보여준 태만의 극치와 달리 진지한 표정이었다.
“진정으로 인명을 살리는 일에 열의가 깊다면 가치를 위해 실리를 포기해서는 안 되겠지.”
“지킬만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신은 기꺼이 일신을 대신 희생하겠나이다.”
“심지가 굳군. 그러니 어려운 길을 자처할 수 있었던 거겠지.”
“전하만은 못할 것이옵니다.”
왕이 취하는 방식도 보통 심지로는 불가했으니까.
허준이 덧붙인 말에 왕은 작게 웃었다.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지자 왕이 물었다.
“책 만드는 일의 진전은 어떤가.”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으니 큐슈를 다녀온 뒤로 첨삭할 부분이 늘어났사옵니다.”
“올해는 원장의 책을 보기 힘들겠군.”
“최선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당연히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 하지만 과민반응할 필요는 없음을 알려주고 싶었네.”
무엇에 과민반응한단 말인가. 의아해지려는 찰나 왕이 말을 이었다.
“서양이 해부학은 우위에 있겠지만 그뿐일세. 다른 영역들은 대체로 우리만은 못하지. 취할 것은 취하되 버릴 것은 버리게.”
“그들의 의서를 보셨사옵니까?”
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의미 없는 질문이로군.”
왕이 웃으며 답했다. 긍정이 아니라면 부정이라는 걸까?
만약 서양의 의서를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들의 의술을 아는 걸까.
왕은 신비한 사람이었으며, 열 길 물속도 알고 열 길 사람 속도 안다는 노회한 신하들도 왕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해부학 역시 서양의 의서에 전적으로 의존할 정도는 아닐세. 우리와 서양인은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체격이나 장기의 크기 등은 차이가 있으니까.”
“혹시…….”
“내가 해부해본 적이 있냐고 물을 생각이라면, 그건 아니라고 대답해줄 수 있지.”
해부해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안단 말인가?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왕이었으나, 맞는 말이었다.
서양의 해부학서를 처음 접했을 때는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전장을 쫓아다니며 두 눈으로 확인한 인체와 미묘하게 달랐으니까.
“최선은 우리도 해부해보는 거지.”
“처음에 가치와 실리에 대해 논하신 이유가 이 때문이셨습니까?”
귀신 같은 밑밥이었다. 대화가 또 이렇게 흘러갈 줄은 어떻게 알고?
생각해 보면 흐름은 왕이 주도하고 있었다. 자신은 그야말로 바늘이 당기는 대로 쫓아간 생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허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왕이 말했다.
“원장은 낚시를 좋아하나?”
“아는 바는 없으나 늙고 병들면 한적한 곳으로 내려가 낚싯대 하나 걸치고 싶은 생각은 있사옵니다. 하지만 사람을 낚는 취미는 없사옵니다.”
허준이 퉁명스럽게 답하자 왕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골려먹는 게 그렇게도 좋을까.
관리들은 왕이 자기 신하들을 계속 등쳐먹는다며 학을 떼는데, 그런 평가가 왕의 만행을 저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더 부추기면 모를까.
허준은 본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신은 차마 해부를 할 수는 없사옵니다. 어떻게 고인의 시신을 헤접고 조각낼 수 있겠사옵니까?”
서양인들이나 가능한 야만이었다.
퉁명스러우리만치 단호하게 답하자 왕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직진이 두렵다면 우회로가 있네. ……혹시 평소의 나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직진밖에 모르는 왕이었고 제발 돌아서 가자는 신하들의 원성을 상큼하게 무시하는 사람 아니었던가.
정확하게 허준이 생각하던 대로였고 그는 차마 어전이라고 격식을 다 차릴 수가 없었다.
“독심술은 그만 쓰시옵소서.”
“내가 무슨 도사인가. 독심술을 쓰게.”
“뭐든지 어떻게든 아시니 독심술이 따로 있겠사옵니까?”
“유용한 자식을 허비할 수는 없잖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소름끼칠 수도 있다는 걸 고려하셔야 하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더군.”
하지만 왕은 여전히 사람을 가지고 놀았다.
허준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무의미한 항의는 하지 않기로 했다.
“말씀하시려던 대안은 무엇이옵니까?”
“의료인을 현장에 참관시켜 환부와 내부를 기록하는 걸세. 일부 인원을 국경의 군 주둔지에 배치해 두는 것도 좋겠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하나하나 짜 맞추다 보면 결과가 나올 걸세.”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적어도 환자들은 수습 의원 몇 명이 참관하는 일이 있더라도 치료를 원할 테니까.
자칫 사람의 상처와 고통이 구경거리로 인식될 수 있을까 두려웠지만, 고인의 배를 갈라보는 것보다는 인도적이었다.
수습 의원들에겐 큰 경험이 되겠지.
“하교에 따르겠사옵니다.”
“위생을 주의하게. 전염병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지는 않았겠지?”
“염려치 마시옵소서.”
허준은 자신 있게 답했다.
왕은 장막을 들추고 출처 모를 지식과 통찰을 공유했다.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병원체가 전염병을 일으킨다는 말에 허준은 사명감을 가지고 황해도와 큐슈를 오가며 이론을 연구했다.
병원체를 직접 볼 수 없는 만큼 증명할 수는 없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과연 전염병은 왕의 이론 안에서 움직였다.
“참관한 의원들이 환자를 감염시키지 않도록 유의하겠나이다.”
“좋아.”
“그리고…….”
과민반응할 필요는 없다던가.
허준은 생각하고 있던 첨삭을 대폭 줄이기로 했다. 원고는 거의 완성되어 있었고, 일거리도 많이 줄었으니 곧 비책이 완성될 터였다.
의학의 정수만을 담아낸 책이 완성되면 앞으로 의원들은 중구난방이 아닌 하나의 책으로 의술을 익힐 수 있겠지.
그러려면 책을 많이 찍어내야 했다.
“의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찍어낼 수 있네.”
“또 독심술이옵니까?”
“원장이 나에게 아쉬운 소리 할 일은 의서 출판밖에 없어서 그렇지. 이건 독심술 거리도 아닐세.”
잘도 변명하는 왕이었다.
아무리 봐도 독심술이었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막 인쇄한 책을 떡하니 꺼내놓겠는가?
제목은 만천명월(萬川明月)이었다.
만 개의 냇가와 해와 달.
“무슨 뜻이옵니까?”
“해와 달은 냇가를 가리며 비추지는 않네. 일국의 군주로서 백성 모두에게 고루 은총을 베풀겠다는 뜻이지.”
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이었다.
“그걸 믿나?”
“아니란 말입니까?”
“지상의 냇가는 천 개, 만 개가 있어도 그것을 비추는 해와 달은 하나이지. 다들 까불지 말고 나를 경배하라는 뜻이네.”
“그편이 전하다우시긴 합니다만.”
이마저도 사람을 골탕 먹이려는 수작일지 누가 알겠나.
책을 펼치니 보드라운 새하얀 종이가 드러났다. 평소 보아온 종이와는 겉보기도, 질감도 달랐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