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50화
87. 천국과 지옥 (2)
“고생 많았네.”
“아니옵니다.”
왕이 식사를 마치자 상궁과 궁녀들이 수라를 챙겨 물러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상선 김기문이 들어섰다.
“전하.”
“희소식인가?”
“그러하옵니다.”
상선이 입구를 지키는 뒤편 내시에게 곁눈질을 보내자, 선교사 하나가 포박된 채로 입장했다.
후원 물맛을 제법 모았는지 머리는 젖어 있었고 얼굴은 초췌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겁부터 집어먹었겠지. 놈은 눈빛이 살아 있었다.
놈은 ‘굴복’한 게 아니다.
변심했지.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강한 자는, 무력이 강한 자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이지. 보아하니 이 친구는 제대로 된 진리를 하나 깨달은 모양이군.”
“이름은 프란시스코라 합니다.”
“프란시스코를 동료들에게 보내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협조할 기회를 주고, 따르지 않는 자들은 본인 손으로 자비를 내리도록 조처하게.”
한 번 배신한 자는 돌아갈 곳을 없게 만들어야 다시 변심하지 않는다.
신실한 옛 동료들을 제 손으로 처단하고 나면, 몸은 돌아갈 곳이 있어도 마음은 돌아갈 곳이 없겠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해도, 그것대로 좋겠지. 어느 쪽이라도 무방하다.
“알겠사옵니다.”
김기문은 프란시스코를 대동하고서 물러났다.
동료들을 처단하는 과정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나는 어좌에 등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잠깐의 평화를 즐겨야겠군.
* * *
왕이 수작을 부릴 동안.
의정부에서 노수신은 다른 의정들을 모아놓고 논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전하께서 종교를 창시하실 모양인데, 두 의정께서는 방도가 없으시오?”
좌의정 이이가 먼저 답했다.
“전하께서 취하시는 방식이 과격하신 건 사실이고 최선이 아닐 수 있겠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문제가 해결되면 다란 말인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갖은 폐단이 없어지고 나라가 크게 개선된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더 문제일세. 전하께서는 많은 업적을 이루셨네. 사람들은 섣불리 전하의 일에 반대하지 못하게 되었지. 이러다 만일 문제가 생기면 누가 나서서 막겠나?”
“문제는 생기지 않았고 누가 나설 일도 없습니다.”
이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박순이나 노수신이 나서기도 전에 왕을 의심하고 견제했다. 수 차례나.
그러나 모조리 실패했고 왕의 유능함만 입증됐다.
큐슈 원정은 둘도 없을 만행이었으나 모두가 선단에 타고서 두 눈으로 목도하지 않았던가.
열도인들이 원정군을 반기는 모습을.
그리고 조선은 큐슈를 정토한다는, 전조를 포함해 반도 역사를 통틀어도 해내지 못한 대업을 성취했다.
“제가 보기에 중요한 건 수단이 아닙니다. 결과이지.”
“좌상께서도 기어고 전하께 물들어버린 건가?”
“물들다니요. 숙고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단지 전하께서는 먼저 아셨을 뿐이지요.”
“광기야. 결과만 좋으면 수단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좋은 수단을 취해야지. 전하의 방식은 언젠가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걸세.”
“전하께서는 이미 대가를 치르고 계십니다.”
노수신과 이이는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낀 우의정 심수경은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숙였다. 부디 자신이 언급되는 일은 없기를 바라면서.
전임 영의정 박순의 추천으로 어쩌다 의정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나, 지금의 의정과 과거의 의정은 달랐다.
예전에는 육조직계제와 의정부서사제의 싸움이었다.
육조직계제는 왕이 실무관청인 육조의 보고를 직접 받는 방식이다.
왕은 일감이 늘어나겠지만 실무를 전담하니 권력이 세지고, 반대로 최고관청인 의정부는 명목상의 최고관청으로 전락한다.
의정서사제는 육조와 왕 사이에 의정부가 끼는 방식이다. 의정부가 명목상이 아닌 진짜 최고관청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고, 왕은 권력의 약화를 감수해야겠지만 일은 줄어든다.
국초만 해도 두 체제가 번갈아 시행되면서 왕권과 신권의 우열이 바뀌었으나,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 때 의정부서사제가 시작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었다.
현 왕은 중종과 마찬가지로 정통성은 약했으나 너무 많은 위업을 세워 왕권이 국초의 왕들을 능가했으며, 국사에 적극적이기까지 해서 의정부의 대신들은 육조직계제의 시행을 우려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의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노수신이 고개를 홱 돌려 묻자 심수경은 흠칫 놀랐다.
“무얼 그리 놀라시오?”
“아, 흠흠…….”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는 알고 계시오?”
“물론입니다. 전하께서 선교사들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종교를 창시하실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냐는 논의를 하고 있었지요.”
“딴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으셨구려. 이제 우의정의 생각을 듣고 싶소. 나와 좌의정은 서로 양보할 생각이 없으니.”
오늘날 왕의 권력은 신권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의정부의 역할도 이제는 달라졌다. 왕의 방식에 동조하느냐, 혹은 신하 모두를 대표해 반대의 의사라도 내뱉느냐.
후자의 선택은 대체로 지금 같은 사안에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이따금 왕은 화끈할 정도로 양보하지만, 중대한 사안에는 타협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선교사의 침입과 종교의 문제는 아주 중대한 축에 속했다.
“전하께서 하신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성인들의 가르침을 상기하자면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이가 끼어들었다.
“콩이 나면 어디에 심었건 그곳은 콩밭이 되는 거요.”
“하, 좌상께서는 말투마저 성상처럼 변하셨소이다.”
왕은 논쟁에서 은유를 즐겼다.
직설적인 대화와 노골적인 발언으로 공인 미친놈 소리를 들었던 이이의 방식은 아니다.
“문제라도 된답니까?”
“내가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면 좌상이 뒤를 이을 텐데, 홍 대감만도 강단이 없는 사람이 될까 우려되어 하는 말이오.”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홍 대감만은 못해도 노 대감만은 못하겠습니까?”
“크흠.”
두 사람은 신경전을 펼치고는 다시 심수경을 바라보았다. 심수경은 따가운 시선에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항복이라도 한다는 것처럼.
“자, 자. 두 의정께서는 진정들 하시지요. 전하의 결단에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하고자 모였지, 다른 이야기를 하러 모인 건 아니잖습니까.”
“그럼 우의정께서 결단을 대신 내려주시게. 단호하게.”
노수신과 이이는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으니 결정권자는 심수경이었다.
졸지에 큰 역할을 떠안게 된 심수경은 입술을 만 채로 한참이나 고민했다. 과연 무엇이 최선일까?
선교사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침입해오고 있었고 어전에 잡혀온 놈들만 족히 수십은 되었다. 이후라고 달라지지는 않겠지.
하지만 왕의 방식은 과격하다. 맞불은 산불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갑자기 역풍이 불어버리면 산불이 두 개가 되는 수가 있었다.
아마 왕은 양보하지 않을 테니.
두 개의 산불을 같이 잡아야 하는 셈인가.
심수경은 이마를 쓸어내렸다.
-드르륵.
고민이 이어지는 와중 관리 하나가 입장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함께 움직였고 노수신은 엄중하게 물었다.
“중대한 논의를 하고 있음을 모르는가, 사인?”
“예, 송구합니다. 하지만 바로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논의만큼이나 중대한 소식이라는 뜻이었다.
“무슨 일인가? 뜸 들이지 말고 말하라.”
“내수사에서 수백 명의 인부를 고용해 남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자재들까지 함께 옮기는 것을 보면, 필시 건물을 세우려는 모양입니다.”
“갑자기?”
왕이 썩어나는 재력으로 대공사를 벌이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관망할 일이 아니었다.
박순이 추태를 부려서까지 주조권을 내수사에서 빼앗아왔지만, 왕은 은행을 설립해 박순을 엿 먹였다.
도성의 주민들은 물론 경기도의 재물 좀 있다는 자들이 모두 은행을 이용해 조정은 졸지에 은행이 유통할 돈만 대신 찍어주는 바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일도 분명 심상찮은 짓거리겠지.
왕의 행보가 정당하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것이 치명적이고 위협적이라는 것은 노수신과 이이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사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수사 사람들이 인부와 함께 어전에 잡혀 온 선교사들을 대동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광희문(光熙門)에서는 이국적으로 생긴 자들의 시신 여럿이 도성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노수신은 바짝 메마른 입술을 핥고는 비통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벌써 놈들을 포섭했단 말인가?”
내수사에서 동행한 놈들은 굴복한 놈들일 테고, 광희문을 빠져나간 시신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가 최후를 맞이한 자들이겠지.
그리고 굴복한 선교사들이 인부와 동행한 이유는 새로 지어질 건물이 왕이 만들 어용 종교의 거점이기 때문이겠지.
“하다못해 며칠은 걸릴 줄 알았거늘!”
함거에 갇힌 채 어전까지 잡혀 오고도 눈에서 독기가 흐르던 선교사들이 아니냐.
하지만 놈들의 종교나 각오란 것들은 죄 위선과 가식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무슨 고문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고작 한 시진도 안 되어서 굴복하다니!
이이가 조용히 권했다.
“대책을 생각하시려면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 만능분을 이용한 공사에 다들 능숙해져서 공사기간이 상당히 짧아졌으니 말입니다.”
“마치 좌의정은 대책 논의에서 빠져 있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군.”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전하께 맞선다는 게 의미 있겠습니까?”
“좌의정 같은 사람이 하나만 더 있어도 의정부는 존재할 이유가 없어질걸세! 자네야 전하와 각별한 연이 있으니 편을 들어주고 싶겠지. 하지만 그 전부터 관리였다는 사실은 잊지 않으셔야 할 걸세.”
“이 사람이 언제 전하를 편들었단 말입니까? 누구는 전하와 면식 하나 없으셨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페주를 참살하고 조정을 장악했을 때 누가 먼저 저지하고 나섰습니까?”
“결국에는 굴복하고서 의정의 자리를 받지 않았나!”
“우상이 되었지요. 그리고 대감께서는 좌상이 되셨습니다!”
두 의정이 서로를 물고 뜯으려 들자 심수경이 드르륵, 하고 의자를 밀어내며 일어났다.
시선이 모이자 심수경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자, 자. 두 대감 모두 입장은 달라도 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고 전하를 향한 충심의 발로는 마찬가지인데 언성을 높이셔야 되겠습니까?”
그러자 노수신이 말했다.
“자네는 무얼 알긴 알고서 나서는 건가?”
이에 이이도 거들었다.
“첩질이나 하는 사람이 청백리에 녹선되고 의정까지 되다니, 참으로 도당(都堂, 의정부)의 수치입니다!”
“아니.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이번에는 노수신이 심수경의 말을 끊고 나섰다.
“맞는 말일세. 만일 박 대감의 추천 대신 복상을 진행했다면 심 대감은 후보조차 되지 않았을 걸세.”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서긴 왜 나선단 말입니까?”
“그러게 말이네! 자기 혼자서 착한 척은 다 하고 말이야.”
“거저 의정이 되어서 개념이 없나봅니다.”
노수신과 이이는 갑자기 의기투합해 심수경을 갈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