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49화
87. 천국과 지옥 (1)
병조판서 이을룡이 소개했다.
“사람으로서의 이름은 발레라지만, 원죄를 더욱 사악하고 악독한 죄로 뒤덮은 이 친구의 진정한 이름은, ‘선교사’라 합니다.”
“선교사?”
영의정 노수신이 물었다.
“이들은 괴력난신만을 논하며 백성들을 감언이설로 속입니다.”
“예를 들자면?”
“단지 이레에 한 번씩 저들의 소굴로 집합해 저들의 신을 찬양하고 죄를 고하는 것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죽고 난 다음에는 신과 함께할 수 있다고 믿지요.”
“헛소리로군. 저들의 신에게 죄를 고한다고 어떻게 죄가 사라진단 말인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죄를 짓습니다. 그것을 청산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선한 마음을 고작 몇 마디 말을 중얼대는 것으로 용서받으려는 천박한 마음으로 변질시키지요.”
“진실로 악독한 놈들이군.”
“그뿐입니까? 저들의 사악한 종교를 믿지 않으면 모두 죽어서 지옥에 가 영원불멸한 고통을 받게 되리라고 선전합니다. 이들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선조들 모두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겠군요.”
“…….”
노수신은 물론 제신 모두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 발언을 하냐는 투였다. 발레리는 여기서 입을 연 적이 없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순교자로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 반, 두려움 반인지 복잡한 심경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성물만 꼭 쥐고 있었다.
제신들은 그마저도 오만하게 보였다.
“이 사람이 전하께 처음 보고하였더니, 전하께서는 언제나처럼 밝은 지성으로 선교사들에 대해 정확한 평가를 내려주셨습니다.”
병조판서는 어좌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덧붙였다.
“문화적 역병을 퍼뜨리는 자.”
“과연.”
“이들은 무지한 백성들을 감언이설과 겁박으로 속여, 그들의 사교로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증식하지요. 더 많은 백성이 부화뇌동하여 이레마다 신성한 노동을 때려치우고 저들만의 소굴에 집합하여 더 많은 희생자를 끌어들일 협잡이나 꾸미게 되는 겁니다!”
“아조는 그런 자들의 출입을 용납할 수 없네!”
“이 사람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집구석을 파고드는 해충과 같습니다. 어딘가의 번식지에서 끊임없이 나와 세계를 오염시키지요.”
병조판서의 팔이 어좌로 향했다.
“전하께서는 이미 방책이 있으십니다.”
제신들의 시선이 어전으로 향했다.
명나라 사신들이 증발해버린 사건도 작은 일은 아니었지만, 신하들이라고 명나라에 대한 시선이 예전 그대로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들의 행방보다도 중요한 문제를 직면한 상태였다.
바로 선교사들의 침입.
조선은 급작스러운 개방으로 인한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외국인들과의 접촉을 큐슈 일대로만 제한했다.
그러나 선교사는 저들의 악독한 문화적 역병을 퍼뜨리고자 밀항을 시도했다. 오직 이번 한 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은 아니리라.
과연 어떤 방법이 이 광신도에 대한 적합한 대응일까.
“병조판서의 발언이 다소 과격한 점은 지적해야겠군.”
“송구하옵나이다.”
“종교가 백성들을 혹세무민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감언이설에 넘어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세상이 냉혹하기 때문이지.”
예상과 달리 왕의 반응은 온건했다.
잔뜩 흥분해 있었던 노수신도 진정했다. 고작 몇 마디 말로 영의정이 된 노신마저 우롱하다니, 역시 병조판서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침착해질 필요가 있겠군.
노수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왕에게 아뢨다.
“삶과 세상이란 원래 가혹한 법이며, 그래서 절벽 위에 핀 꽃처럼 선과 예의가 더욱 빛나는 것이옵니다.”
“절벽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필 수 없다. 그래서 절벽의 꽃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유학자의 역할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더라도 어떻게든 절벽에 한 송이의 꽃이라도 더 피워내는 것이옵니다.”
“우리는 유학자가 아니다.”
노수신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자리에서 유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경연의 자리마저 폐한 미친 왕마저. 단지 거스를 뿐이지.
그럼에도 유학자가 아니라는 이유는, 우리가 유학자이기 앞서 나라와 천만 백성의 명운을 결정하는 정치인이기 때문이겠지.
제신들의 공감을 떠나 왕은 자신의 철학에 확신이 있었다. 그는 정무를 위해서라면 갖은 절차와 가치들을 무시해왔으며, 지금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경들은 산불을 진압하는 방법을 알고 있나?”
“산에 번진 불은 인력으로 어찌하기 힘드니, 맞불을 놓아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노수신은 기계적으로 답했다가 번뜩, 하고 위기를 느꼈다.
맞불!
산불은 불로써 제압하며, 독은 독으로 제압한다. 종교는 무엇으로 제압할까?
“전하.”
“최선의 방법이다.”
“마당에 들어선 늑대를 내쫓고자 안방에 호랑이를 들일 수는 없사옵니다.”
“늑대는 야생의 짐승이지만 호랑이는 목줄이 채워져 있을 것이다.”
“호랑이는 기회가 된다면 언제라도 목줄을 끊고 활보할 것이옵니다.”
“무수한 늑대가 가정의 안위를 노리게 방치하느니 한 마리 호랑이가 활보하게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늑대와 호랑이만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닐 것이옵니다.”
“경에게는 하늘로 솟을 비책이 있나?”
“그건…….”
말을 주고받던 노수신은 순간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말았다. 선교사의 침입이 불러올 해악은 은밀하고 치명적이면서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방도를 논할 수 있겠는가?
‘아오, 저 독사 같은 놈!’
노수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왕은 언제나 사태에 대한 정보를 선점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상황을 주도했다.
신하를 등치는 수법 중에서도 대표적인 축에 속했지만, 정보력이 부족한 신하들은 눈이 뜨인 채로 코를 베여왔다.
보아하니 오늘도 코를 베였다.
“신이 용렬하여 당장의 비책은 없으나, 모두가 어전에 모인 이유가 바로 비책을 강구하기 위함이 아니겠사옵니까.”
“나의 비책은 맞불을 펼치는 것이다.”
“분명 제도를 통해 종교를 적절히 통제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전조에 교세를 떨쳐 나라에 지대한 해악을 끼친 불교도 오늘날에 들어서는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지 않사옵니까?”
“서양인들의 종교는 불교보다 공격적이고 사악하며 치명적이다. 경들은 맞서 싸울 수는 있겠으나 우위에 서지는 못할 것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던 공산 국가들은 물론, 개인숭배를 위해 종교를 적극적으로 탄압하는 북한도 종교를 어쩌지는 못했다.
기독교는 탄생했을 때부터 로마 제국의 탄압을 견뎠으며, 끝에는 도리어 로마 제국을 삼키기까지 했다.
증명할 수 없더라도 영원불멸한 행복의 약속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충분히 달콤했고, 광신도들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는 대의명분에 취해 목숨을 거는 것마저 마다하지 않았다.
어떻게 제도로 제압한단 말인가.
불가한 소리였다.
“경들이 만일 상책을 논의하겠다면, 기꺼이 그리 하라. 하지만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선교사들의 침공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대들이 여유를 부리는 것은 우위가 아닌 무지에서 오는 것이니, 이것은 그대들이 예상치 못했으나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보라.”
왕이 바깥을 향해 팔을 뻗자 열린 대문 너머로 수십 개의 함거가 줄줄이 들어왔다.
각 함거에는 병조판서 이을룡이 소개한 ‘발레라’와 비슷한 외모와 행색을 한 자들이 타고 있었으며, 다들 이국의 조정에 끌려오고도 걱정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든 눈앞의 사람들에게 저들의 역병을 전염시켜야겠다는 간사한 독기만을 흘려댈 뿐.
“……!”
노수신을 포함해 제신들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밀항을 시도했단 말이냐.
과연 조선의 명성은 사해를 떨쳤다.
특히나 큐슈를 단숨에 정복한 조선에 대한 소문은 입을 거칠수록 이상적이고 환상적으로 포장되어, 동남아시아의 포르투갈령 무역거점들마다 나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광신적 신념에 취해 머나먼 동방을 찾아온 선교사들은, 마찬가지로 이익을 위해 동방을 찾아온 상인들과 결탁해 시간과 위치를 가리지 않고 밀항을 시도했다.
그들에게 밀항으로 인한 이국의 곤란함이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애초에 전자는 역병과 같은 종교를 퍼뜨리고자 이국의 전통과 문화를 탄압하는 자들이었으며, 후자는 수지타산만 맞는다면 함선의 국기를 내리고 동종업계 사람에게 대포를 갈기는 종자들이었으니까.
“나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어딘가에서는 이미 이들이 활보를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지체 없이 대응을 준비하겠다. 경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을 테니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할 줄 몰랐던 신하들은 여전히 당혹한 표정만 지을 뿐, 왕에게 같이 대책을 논의하자는 주장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어전회의는 어영부영 끝났으며 신하들은 복잡한 기분으로 궁궐을 나섰다. 왕은 위사들을 시켜 선교사들을 후원에 모았다.
“통역해 주겠나?”
역관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는 듯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좋아. 이 친구들에게 전하게. 로마 교황을 배신하고 나에게 충성하는 사람에게 조선에서 전도할 자격을 주겠다고.”
역관은 어눌한 투로 왕의 말을 전했다. 조선 땅에는 현지인이 없으니(밀항자들을 제외하면) 읽는 법은 알아도 말하는 법은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이 말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교황을 배신하고 협조를 약속하는 자는 없었다.
“건방진 자들이로고.”
왕의 감상에 상선 김기문이 말했다.
“심지가 굳은 자들은 그것이 부러졌을 때, 더욱 절박하게 새로운 신념에 매달리는 법이지요.”
“상선도 알긴 아는군.”
“신이 전하를 모신 시간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알겠군.”
“물론이옵니다. 죽고 싶게 만들되, 죽이지는 않는 것이옵니다.”
“잘 알고 있군. 이 친구들에게 후원의 물맛 좀 보여주게.”
“만족하실 만한 결과를 가져오겠습니다.”
왕이 떠나자 위사들은 선교사 몇을 호수 가장자리로 데려가 대가리를 처넣었다. 첨벙, 첨벙.
* * *
“요즘 궁인들은 앞다투어 소주방에서 일하고자 한다던데.”
왕이 수라상을 보며 말했다.
풀밭에서 뛰노는 육해공의 짐승들. 네 글자로 표현하면 산해진미요, 두 글자로는 미식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사치다.
한때 유생들은 이러한 왕의 사치를 지적했으나 좋은 결과로 돌아오지 않자 자연스럽게 말이 줄어들었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왕이 신경이나 쓰겠나?
“예전부터 궁인들이 소주방을 선호하였사옵니다만, 근래에 들어서는 풍조가 더욱 심해진 듯하옵니다.”
기미상궁이 답했다.
“기미상궁의 직책은 어떠한가? 다른 궁인들과 마찬가지로 바라는 사람이 많은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사오나 궁인이라면 모름지기 인군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모신다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지, 다른 이유로 특정한 직책을 선호한다는 것은 좋은 풍조가 아닌 줄로 아옵니이다.”
“언변이 비상하군.”
왕은 기미상궁에게 손을 들어 수라를 권했다.
기미상궁은 예를 표하고는 수저를 들었다. 가볍게 홍조가 띤 것은 단순히 칭찬을 받아서만은 아니리라.
말은 멀쩡하게 했지만 내심 누구보다 기미상궁의 위치를 고대하던 그녀였다. 상궁급의 궁녀들이라고 혀끝의 사치에 초연할 수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왕은 궁인들에게는 자비롭기로 유명했고, 식사를 바로 곁에서 보좌하는 기미상궁은 특히나 덕을 보는 위치였다.
“어떠한가?”
“독은 없사옵니다.”
“독이 없다면 좀 더 먹어도 되겠군.”
“기미상궁이 어찌 수라를 기미에서 그치지 않고 더 손을 댈 수 있겠사옵니까.”
“나는 겸양하는 자보다는 솔직한 사람을 좋아한다. 정 내키지 않는다면 왕명으로 권하지. 그대도 나 혼자서 수라를 다 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않나.”
“망극하옵니다.”
상궁이 마지못한 척 산해진미를 맛볼 동안.
후원에서는 1분마다 물속과 밖을 오가던 선교사 하나가 마침내 항복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