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48화
86. 머리 없는 용 (3)
“조선 땅에 왔으면 조선말을 하셔야지요. 하물며 궁궐 안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이익…….”
일개 내시의 말에 장 태감은 이를 갈았으나, 이곳은 이역만리 타지다.
모멸적이라도 일단은 놈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죄를 묻는 것은 정황을 파악해 명으로 돌아간 다음이다.
“통역해라……. 대명의 사신으로서 방문한 사례감 태감 정이 조선 국왕 전하를 보러 왔다고.”
쓸 일이 없었어야 했을 역관은 ‘당연하게도’ 어눌한 조선어로 말을 옮겼고 궁인은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안쪽을 향해 팔을 향했다.
“성상 전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십니다. 정식 응대가 아닌 면담이니, 모쪼록 상기하시고 전하 앞에서 실수하는 일 없도록 하십시오.”
원래라면 조선 왕이 정식으로 사신을 맞이할 때는 황제를 대하는 예로써 맞는다. 사신은 황제를 대신해 조선을 찾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명나라와 조선의 위치를 상기시키기 위한 절차인 것이다.
하지만 궁인은 그런 정식 응대가 아니란다.
말이야 절차가 생략되거나 연기됐다는 투이나 진심은 그게 아님을, 궁인도 정 태감도 알고 있었다.
전각으로 들어서자 좁은 복도가 나왔다. 별도의 궁인에게 안내를 받아 집무실에 이르자, 궁인이 안쪽을 향해 아뢨다.
“전하, 사례감 태감 장성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드르륵
윤허가 떨어지고 문이 열렸다.
나타난 조선 왕의 모습은 비교적 젊은 축에 속했다.
그는 장 태감이 밖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 알고 있으며, 감상은 어땠는지 기대된다는 듯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장 태감은 최소한의 예만 표하고서 기꺼이 따졌다.
“조선 국왕 전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저와는 생각이 다르신 듯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조선이 오늘날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데는 대명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인데,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질이 급하십니다.”
“접반사와 위사들이 사신단을 상대로 벌인 행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씀하시긴 어려울 겁니다!”
“태감께서도 그들의 태도가 왜 그런지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요.”
장 태감은 입술을 말았다.
접반사와 위사들의 태도가 그따위인 이유?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조선은 더는 명나라에 충성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사람은 대명의 황제 폐하를 대행하는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했으며, 이러한 사신을 박대한다는 것은 조선이 황제 폐하께 충성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지요?”
“장 공(公)께서 아셔야 할 것은, 내가 각오 하나 없이 마련한 접대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행로를 가로지르며 조선이 생각보다 많은 발전이 있었다는 점은 알겠으나, 대명이 이끄는 세계의 순리에 정면으로 맞서도 될 정도로 영화를 구가하는 건 아닙니다!”
“날 단순히 치기 어린 젊은 왕쯤으로 착각하고 있군요.”
“흥, 아니라는 말입니까?”
한성에서 아무리 진귀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해도, 대명 수도인 북경의 위세에 미치지는 못한다.
규모만 따지면 일개 성(省)의 중심도시와 겨우 비교되는 수준이리라.
아무리 조선이 주제넘게 잘 나가게 됐을지라도 변방 소국에 불과한 한 대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조선 왕이 말했다.
“양국의 건실한 미래를 위해 기존의 불합리한 관계를 청산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내가 마련한 것들은 태감께서 앞으로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겁니다. 단순한 박대가 아니라.”
“조선이 명나라와 척을 지고도 안위를 구가할 수 있으리라 믿으십니까?”
“허, 참. 전부 건실한 미래를 지향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라 했거늘.”
“일방적인 모욕을 준 것이 어째서 건실한 미래를 위한 것입니까? 궤변은 적당히 하시지요!”
“명나라에서 조선이 그리는 미래에 협조하지 않으면 앞으로 명나라도 태감이 당한 것과 똑같은 대우를 당하리라 보여드린 예시입니다.”
“뭐, 뭐요?!”
장 태감은 어이가 없다 못해 현기증이 느껴졌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협조를 명령하며, 누가 누구를 박대한단 말인가?
전후가 완전히 반대로 되지 않았나!
협조를 명하는 쪽이란 당연히 명나라가 되어야 하며, 박대를 해도 명나라가 하지 조선 따위가 명나라를 박대할 수는 없었다!
“나라고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이 없지는 않지만, 그대들이 양국의 관계에 대해 일방적으로 착각하겠다면 언제까지고 어울려주긴 힘들지요.”
“대명에 있어 번국과의 친밀이란, 번국이 충성할 때를 전제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 전하께서는 대명에 충성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내가 언제 충성하지 않겠다 했습니까?”
“이게 충성하는 자의 태도란 말입니까!”
장 태감이 따져 묻자 왕이 팔걸이를 짚고 일어났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으나, 일어서니 체구가 상당했다.
장 태감은 흠칫 놀라 주춤 물러섰다.
왕이 다가와 물었다.
“그대는 황제가 아니고, 그대가 내뱉는 말도 황제의 말이 아니오.”
“저, 저는 황제를 대행하는 사람으로서 조선을 방문했습니다.”
“황제 폐하가 친필로 작성한 서찰이라도 있나? 그게 있다면 내가 서찰 정도는 황제의 뜻을 맞이하는 예를 다하도록 하지.”
“……본국에 사람을 보내면.”
“위조된 서찰을 가져오겠지. 자네는 나를 아주 바보로 아는군. 황제 폐하께서 칩거에 드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네놈이 황제를 대행한다는 말 한 마디 꺼낼 때마다 목이 한 번 잘릴 죄를 얻는 셈이지.”
최근 흥미로운 소식이 있었다.
장거정이 유명을 달리했으며, 그러기 무섭게 황제가 정무에서 손을 떼고 칩거했다는 것이다.
제신들은 장거정은 황제의 스승이었고 그가 죽음과 함께 묻어둔 치부가 드러나자 황제가 환멸을 느껴 잠시 일선에서 물러났을 뿐이라 추측했다.
다분히 합당한 추측이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현 황제 만력제는 태만하고 게으른 자였으며, 장거정의 치부와는 별개로 그가 죽자 말릴 사람이 없어져 황제는 바라던 대로 칩거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칩거는 황제가 죽을 때까지 근 40년 동안 이어질 예정이다.
“폐, 폐하께서 칩거에 드셨어도 모시는 환관들과는 이따금 말을 나누십니다. 저 역시 사례감의 태감으로 폐하를 직접 뵙고서 인가를 받고서 조선을 찾아왔다는 말입니다!”
“증명할 건 있고?”
“증명할 건 없지만 확실하게 폐하의 인가를…….”
“나라의 일에 말이란 공허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 내가 원한다면 그대는 폐하의 명령을 내세워 번국을 기만한 죄를 물을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돼.”
장 태감은 벌러덩 넘어졌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아무리 황제가 칩거한 상태이며, 그래서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릴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국에서 온 사신에게 벌을 주겠다니?
“저에게 사사로이 벌을 내리신다면 명나라 조정에서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명나라 조정 전체가 폐하의 허락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역적의 소굴이란 뜻이로군.”
“네, 네놈은 절대로 폐하께 충성하지 않아! 그건 충성하는 자의 눈빛이 아니다!”
“……맞아.”
장 태감은 숨을 삼켰다.
왕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조선에 심어놓은 동창(東廠) 놈들의 연락이 끊겨서 조사차 찾아왔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그 친구들 곁으로 기꺼이 보내주지.”
“아, 안 돼…….”
* * *
“갔다.”
“갔다니요?”
노수신이 당혹감에 물었다.
분명 명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입국했으며, 예전과 달리 주목 받지는 못했으나 분명 입궐까지 했다. 그런데 다시 나와서 돌아가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전하께서 무슨 말을 하셨건 신하들의 입장은 다르다고 전해야 하거늘.’
사신은 전언을 들을 새도 없이 사라졌다.
“혹시 전하께서 불미스러운 방식으로 사신단을 어떻게 해버리신 건 아니시겠지요?”
왕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외교적인 마찰?
신경이나 쓰겠는가.
“경이 정 궁금하다면 사신단의 행선지 정도는 알려줄 수 있다.”
“어디이옵니까?”
“미국.”
“……?”
노수신은 의아했다. 진짜 세계지도를 접한 후 각지에 대해 공부했으나 미국이라는 나라나 지명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왕은 모두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듯,
“자!”
박수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제를 바꾸겠다는 노골적인 몸짓에 신하들은 침음을 흘렸으나, 평소보다 더욱 뻔뻔한 상태에 돌입한 그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오늘 경들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네.”
“누구이옵니까?”
“들어오게!”
왕이 밖을 향해 말하자, 뉴 페이스…… 가 아닌 올드 페이스가 등장했다.
“병조판서 아니시오.”
“다들 강녕들 하셨습니까.”
병조판서 이을룡.
원정이 해산되고 파견된 병사들도 귀환했으니, 그가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소식거리도 되지 못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만은 제외하고.
그는 본섬 혼슈에서 적들이 급습해 올 경우를 대비해 큐슈와 혼슈 사이의 해협에 수영을 차리고 남았다.
어쨌거나,
“열도인들에게 대조선의 위용을 철저히 보여주었나, 병판?”
“신이 성상 전하의 뜻을 충분히 이행하였는지는 모르겠사오나 열도인들은 전하의 지배를 두 팔 벌려 환영하였사옵니다.”
“내가 정확히 바란 바다.”
병판이 꾸벅 허리를 숙이자 왕이 말을 이었다.
“경에 제신들에게 보여줄 사람이 있다던데.”
“아, 그래서 제공들이 신이 들어왔을 때 실망한 표정을 지으셨군요.”
신하들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왕이 요란을 떤 만큼 특별한 사람이 등장할 거라 믿었으니까.
보아하니 왕이 소개하려던 사람은 병조판서만이 아니었나 보다.
“소개하겠습니다.”
병조판서가 뒤편을 향해 팔을 뻗자 죄인이 타는 창살 달린 수레, 함거가 등장했다.
함거 안에는 과연 죄수인지 사람 하나가 갇혀 있었는데 상당히 이질적인 생김새였다.
얼굴은 하얗고 머리는 빨갛고 눈은 파란 것이, 일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생김새였다. 게다가 코는 얼마나 큰지, 코의 크기가 남성성을 상징한다는 속설을 자연스레 떠올릴 정도였다.
여기저기에서 흐음…… 하고 호기심 가득한 침음이 나올 동안 병조판서가 소개했다.
“이 친구의 이름은 발레라라고 합니다. 모두들 짐작하셨겠지만 서양인입니다.”
노수신이 물었다.
“그자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함거에 태워서 데려오셨는가?”
“일차적으로는 밀입국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만, 그가 행한 본질적인 죄악은 죽음을 포함한 어떠한 벌로도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악질적인 죄입니다.”
“어떠한 죄를 지었기에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단 말인가?”
“서양인들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죄가 있으며, 자신들은 신의 아들이 용서해 주었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은 신의 아들이 용서해 줌으로써 더욱 악독한 원죄를 지니게 되었지요.”
“흠?”
노수신의 채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왕이 끼어들었다.
“나보다 더 나쁜 놈인가?”
“그 이상이옵니다, 전하.”
“이런…….”
왕은 자신이 더 나쁜 놈이 못 되어서 아쉽다는 듯 탄식을 흘렸지만, 입가에는 늘상 그래왔듯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