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47화
86. 머리 없는 용 (2)
영의정 박순의 사직은 단숨에 진행되었다.
그의 지목으로 우의정에 앉게 된 심수경은 어떻게 되어가냐는 투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제신들도 반응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왕은 그들의 생각이나 반응이 어떻건 개의치 않았다.
아직 명나라 사신에 대한 논의는 끝나지 않았다.
왕이 확고하게 마음을 굳힌 이상 제신들의 입장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으나, 그들이 나라 돌아가는 일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왕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왕에게 반하는 행동을 할지도 모르지.
“세계는 넓고 조선은 십수 년 동안 변혁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언제까지 명나라를 상전으로 모시며 비굴함을 자처할 것인가?”
박순을 대신해 영의정이 된 노수신이 나섰다.
“분란을 조장할 필요는 없사옵니다.”
“병아리가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는 알부터 깨야 한다. 조선이 우뚝 서기 위해서 가장 먼저 깨뜨려야 할 알은 무엇인가?”
“명나라와 전쟁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들이 원한다면.”
“명나라가 보기에 자칫 아조가 전쟁을 원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옵니다.”
“저들이 조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두렵게 만들어 주겠다.”
“전하…….”
노수신은 쓰게 말했으나 왕은 요지부동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전쟁이란 득이 되기는 어려운 짓이다.
큐슈를 정토할 때처럼 먼저 공세를 펼치더라도, 무수한 장정이 농사를 짓지 못하고 적지에서 목숨 걸고 싸우며 막대한 세액이 낭비되니까.
하지만 잃을 것이 오직 그뿐이며 조선이 더 이상 굴욕적인 외교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 사소한 다툼 정도는 각오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북쪽의 여진족과 남쪽의 열도인들은 조선의 전통적인 숙적이었고, 그들 모두 조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명나라라고 천하무적이지는 않겠지.
“음.”
노수신은 쓰게 침음했다.
자만은 독이며 나라 사이의 일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조선이 아무리 강해졌더라도 명나라는 여전히 강국이자 패자였다.
이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설령 전황이 유리하게 흘러가더라도 많은 것을 잃어야 한다.
“설령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신은 명나라와의 전쟁이라면 최소한의 가능성도 감수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다른 신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옵니다.”
“그래서 대신 결정해 주는 것이다.”
요지부동이 아니라 고집불통에 가까웠다. 노수신은 묵은 숨을 토해냈다.
“사신을 맞는 일은 내가 전담하겠다. 제신들은 방해하지 말라.”
* * *
사례감 태감 장(張)은 당연한 입국 허가를 받고서 강을 넘었다.
조선의 변방에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명나라에서 전해 듣던 그대로였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 가난해 백성은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살고, 길은 제대로 된 것이 없어 사신의 사행로만이 가까스로 유지된다.
화폐가 없어 곡식과 옷감에 의존해 거래하며, 상업은 미진해 먼 변방은 보따리상조차 거의 찾지 않아 물목을 백성들이 스스로 만들어 마련해야 한다.
지금 명나라의 수준을 생각하면 아득할 정도로 미개했다.
그러니 세계를 선도하는 중화의 역할이 아주 크다고 하겠다. 여러 오랑캐 중에서 그나마 중화의 문물을 받아들였다는 조선마저 이 정도이니 말이다.
남쪽으로 내려오니 변방은 단지 변방이어서 가난했을 뿐, 조선은 생각했던 것보단 덜 미개한 나라였다.
그리고 더 내려오니 명나라에 알려진 조선에 대한 정보들은 단순히 국경지대에서만 보고 들어 오해가 많이 섞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수도에 다다르자.
“여기가 내가 알던 조선이 맞나?”
수도로 입성하는 돈의문 주변부터 회칠한 복층 건물이 빼곡했고 거리는 행인과 상인으로 활기가 넘쳤다.
즐비한 인파를 뚫고 왕성인 경복궁이 보이는 쪽으로 내려오니, 웅장한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층 위에 또 층을 세워놓았는데 사람들이 바삐 돌아다니니 영화롭기 그지 없었다.
또 하늘에는 정체불명의 커다란 물체도 덩그러니 떠다니고 있었다.
아래에는 커다란 소쿠리가 매달려 있었는데 안에는 사람도 있었다.
‘새도 아닌 사람이 하늘에 떠 있다니?’
날개처럼 고상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은 아니었으나,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 것은 대명에서도 접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정 태감은 눈앞의 광경이 거추장스럽고 자연에 반하는 일이라며 애써 깎아내렸으나, 호기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것은 무엇인가?”
장 태감의 물음에 접반사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
“기구라는 겁니다. 하늘 높이 띄워 주로 기상 상태를 확인하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원리가 무엇인가?”
“대학의 지식은 외부에 공유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대학(大學)?”
“예.”
“아니, 그보다 외부인이라니! 대명 황제 폐하를 대행해 조선을 찾아온 내가 이 땅에서 고작 외부인에 불과하단 말입니까?”
“태감은 조선인이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상국에서 태감을 지내는 나를 고작 외부인으로 치부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조선인이 아니면 외부인이지요. 당연히 말이 됩니다.”
장 태감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자신은 24개 환관 조직 중에서 외교, 특히 대 조선 외교에 예부 이상의 실권을 가진 사례감의 수장이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이미 말했듯 황제 폐하를 대행하는 사신으로 행차했다.
고작 변방국의 신하 따위가 무언가를 숨길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자네는 접반사로서 사신에게 예를 다해 모실 의무가 있음에도, 황제 폐하를 대행하는 나를 외부인으로 치부해 불쾌감을 안겼네. 그게 조선 국왕의 뜻은 아니겠지?!”
조선은 명나라의 사신이라면 쩔쩔매는 나라였다.
그래서 명에서는 조선의 사신이 되고자 뇌물을 바치는 자도 많았다.
이역만리를 다녀오느라 몸은 조금 피곤하겠으나 조선놈들의 대접이 워낙 극진하고, 또 외교적인 문제에서 편의를 구하고자 일개 사신을 상대로 수만 냥의 뇌물을 바치기 때문이다.
황제를 대행해서 왔다는 말처럼, 명의 사신은 이 땅에서는 황제나 다름없었다.
조선의 왕일지라도 사신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지금이라도 대죄하고 기구라는 물건에 대해 설명하면 내가 국왕 전하에게 자네의 실수를 고하는 일은 참아주지!”
태감은 언성을 높였으나 접반사는 달다 쓰다 말이 없었다.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것일까?
접반사는 장 태감을 빤히 바라보더니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이, 이익!”
황제를 대행해 조선에 온 자신에게 이런 박대라니!
아니.
전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과거 조선을 다녀온 자들은 한결같이 고을을 지날 때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원접사, 접반사와 수령이 쩔쩔매는 꼴을 즐기며 황제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는 달리 고을을 지나칠 때는 융숭함은커녕 변변찮은 대접조차 없었고, 수령들은 사신단을 건조하게 대했다.
접반사랍시고 나온 눈앞의 싸가지 없는 놈은 직함도 밝히지 않아 위치를 추측조차 할 수 없어, 이놈이 급에 맞는 인물인가 의심도 들었다.
지적거리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굳이 말을 꺼냈다간 탐욕스러운 자, 격식에 연연하는 오만한 자로 비칠까 참았거늘…….
이제는 아주 우습게 보이나 보다!
저들의 태도는 황제 폐하를 대신해 조선을 찾아온 사신을 맞는 태도가 아니었다! 불청객을 마지못해 받아주는 것이지!
내시라지만 대명국 사례감 태감 장에게는 성 기능은 없어도 배알은 있었다!
“내가 수모를 당하는데도 너희들은 보고만 있느냐! 저놈을 당장 붙들어 매를 쳐라! 불충으로 황상 폐하를 모욕한 자다!”
장 태감이 외치자 그의 수행원들이 접반사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진압해라!”
사신단을 호위해야 할 조선의 위사가 명령을 내리니 병졸들은 서슬퍼런 병기를 꺼내는 게 아닌가!
시퍼런 칼날에 달려들 수 없어 수행원들이 차마 멈칫하는 사이 병졸들이 먼저 수행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칼질은 없었으나 살과 거죽을 두들기는 피육 소리가 거리 한복판에서 울렸고, 행인들은 구경거리 났다는 듯 흥미로운 표정으로 떡이 되는 사신단의 광경을 즐겼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무례, 아니 폭거에 장 태감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조선인들에게 한소리 하고 싶었으나 육감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이 땅은 과거의 조선이 아니었다.
“죄수들은 모두 구속해서 의금부에 처넣어라!”
위사 하나가 엄중하게 명하자, 병졸들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는 떡이 된 수행원들을 포박해 끌고 나갔다.
그 광경을 비릿한 미소로 지켜보고 있던 접반사가 말했다.
“여전히 기구에 대해서 궁금하십니까?”
정 태감은 이를 부득 갈았다. 내려칠 게 있었다면 박살이라도 냈으리라! 본국에서 이따위로 구는 놈은 다음날 해도 못 보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변방의 번국인 조선에서 이런 수모라니!
치욕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정면에서 따졌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정 태감은 불필요한 위험은 감수하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조선이 어째서 이런 꼴로 전락했는지 알아내야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조선의 사신은 갈수록 뜸해져 왔다.
예전에는 일부러라도 사신의 방문 횟수를 제한했으나, 반대로 너무 찾아오지 않게 되자 연유를 추궁해야 할 정도였다.
일각에서는 조선이 예의범절을 잊어먹었다고 분개했으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지난 이백 년 동안 순종적이다 못해 절박하기까지 했다.
그런 조선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달리했으니, 무작정 책망하기보다는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정 태감이 직접 조선을 찾아온 이유도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건 조선놈들이 예의범절을 잊어먹었다는 건 사실이로군!’
이들의 박대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만 않을 뿐.
심기를 살살 거슬려 일부러 화를 내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아니면 그렇게 느낄 정도로 이들의 무례함이 도를 넘었던가!
“왕에게 안내해라! 이 일에 대해서 따져 물어야겠다!”
“그러시던지.”
접반사 나부랭이는 한 마디 툭 던지고는 발길을 재촉했다.
정 태감은 기꺼이 뒤를 쫓았다. 원래대로라면 진즉 조선의 왕이 나와 자신을 맞았어야 했다. 그러나 영은문을 지나쳤음에도 맞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왕은커녕 말단 관리들조차.
싸가지 없는 접반사 놈과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 위사와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전부였다.
이 모든 게 조선 왕의 의사와는 별개의 일이라 할 수 없겠지!
접반사는 광화문을 가로질러 입성하고는 내부를 좀 걷더니 한 전각 앞에 섰다.
“여기요.”
“흥!”
정 태감은 각오 어린 콧바람을 쉭, 내어 쉬고는 솟을대문을 넘어섰다.
뜰에는 궁인과 위사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는데 도저히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박대에는 익숙해진 장 태감이다.
“대명 황제 폐하를 대신해 조선을 방문한 정사 태감 정이다! 너희들의 왕은 어디 있느냐?!”
정이 따져 물었으나 뜰을 지키는 궁인은 답이 없었다.
“이제는 나를 무시하는 거냐!”
참다못한 정 태감이 다시 언성을 높이자 궁인이 답했다.
“조선 땅에 왔으면 조선 말을 하셔야지요. 하물며 궁궐 안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이놈, 내 말을 이해하면서도 일부러 무시했다는 뜻이냐!”
정 태감이 다시 따졌으나 궁인은 내가 한 말을 못 들었냐는 투로 팔짱까지 꼈다.
“이익…….”
장 태감은 이를 갈았으나 이곳은 이역만리 타지.
그것도 조금 전, 장 태감을 수행하던 사람들 대부분이 떡이 되어 끌려갔다.
황제 폐하를 대행한다는 위세만 믿고서 큰소리를 쳐댄다고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모멸적이라도 일단은 놈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죄를 묻는 것은 정황을 파악해 명으로 돌아간 다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