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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46화 (246/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46화

86. 머리 없는 용 (1)

단상 위에 선 열도인 하나가 저들만의 언어로 시끄럽게 떠들어대자 주변의 군중들이 환호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이방인인 조선 사람에게는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잔뜩 흥분한 현지인이 고래고래 떠들어대고 군중은 호응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허준은 다른 방식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군중 사이에 길이 열리더니 산발이 된 열도인들이 줄줄이 묶여서 끌려 나오고 있었다.

이건 소요사태가 아니다.

공개처형이다.

“질리지도 않나 봅니다.”

허준의 곁에서 부원수 이억기가 조용히 말했다.

“막으셔야지 않겠습니까?”

“도원수 대감께서 개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누가 저잣거리의 일을 벌이는지 아시겠지요.”

“…….”

도원수는 왕이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총신 중의 총신이다.

신하들 사이에서는 출신과 달리 교양 있고 기품 있는 태도로 평가가 높았지만, 동시에 옛 주인과 마찬가지로 뒤에서는 가늠하지도 못할 공작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열도인이 열도인을 처형하는 눈앞의 광경도 그의 작품이겠지.

나가사키의 해전이 있고서 몇 마디 말로 큐슈 최대의 가문이었던 시마즈를 반병신으로 만든 것도 도원수의 작품이었다.

허준은 쓰게 말했다.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하께서는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시지요. 악명과 죄를 짊어지게 되더라도, 그것이 나라를 이끄는 사람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도원수 대감은 그런 전하 밑에서 배운 분이지요.”

단상 위의 열도인이 몇 마디 열정적으로 외치자 덜컹, 하고서 조선의 지배에 도움 되지 않는 반항적인 유력자들이 허공에 매달렸다.

잔혹한 일인가, 아니면 불가피한 조처인가.

허준은 입술을 핥았다. 자신이 문인이 아닌 일개 의원이라는 사실이 지금처럼 다행으로 느껴진 적도 없었다.

사람을 살리는 데는 고민이 필요 없으니까.

그러니 저잣거리의 광경은 더는 의식하지 않기로 했다.

“귀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원정도 끝났고 큐슈는 조선의 땅이 되었으니까요. 열도인들도 아조의 지배를 반기니, 세액을 빨아 먹는 원정대는 해산되는 것이 맞지요.”

이억기는 썩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전장이 장수를 빛내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어려서부터 고위직을 역임한 이억기는 자신이 운이나 혈통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선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원정은 지나치게 성공적이었다. 부원수로서 당연히 기뻤지만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원정도 끝났겠다, 원장께서 괜찮으시다면 이 사람과 함께 귀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함께 귀환한다 하심은…….”

“군선이 있으니까요. 어차피 돌아가는 일이라면 안전하게 군과 함께 귀환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사사로이 군선을 타도 되겠습니까?”

“원장께서 동승 해주신다면 많은 사람이 영광으로 알 겁니다. 이 사람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회전은 항상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잔당이 유격전을 벌여 크고 작은 피해를 주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원정대와 동행한 금천병원의 원장과 의원들은 모두의 은인이었다.

평소라면 꼼짝없이 죽을 부상을 입은 자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까.

원정대에서 도원수 다음가는 부원수마저 존대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무수한 목숨이 허준과 그를 따르는 의원들의 손에 소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원장의 노고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도 의원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또 나라를 위해 이역만리 타지에서 싸우는 분들을 돕는 것도 저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허준은 겸양을 표하고는 멋쩍게 말을 이었다.

“또 사심도 없지는 않았으니까요.”

전장처럼 의술을 닦고 연구하기 좋은 곳은 없다.

도움이 필요한 부상자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많은 인원이 좁은 공간에 모여 지내니 질병에도 취약하다.

외상만 아니라 전염병을 특기로 연구하는 허준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런 사심이라면 백 번이고 가지셔도 됩니다.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하하하.”

“아, 쓰시던 책은 잘되어가고 있습니까?”

이억기의 물음에 허준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큐슈만 다녀온 뒤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오고 나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요?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아. 서양인들의 의서를 몇 권 참고 차원에서 접해보았는데…….”

허준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굴욕적이지만 오랑캐라 치부했던 서양인들의 의술 수준이 상당하더군요. 특히 인간의 장기와 근골격에 대한 지식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이유는 뻔했다.

조선은 망자에 대한 예우도 충실하니 감히 시신을 해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예법이 없는 서양은 거리낌 없이 시신을 해부했고 상당한 지식을 축적했다.

야만적이나 그 산물까지 야만적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정보들이었고, 사람을 살리는데 쓸 수 있다면 망자들도 조금은 이해해 주지 않겠는가.

대신 일을 처음부터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돌아가는 대로 책을 다 엎어야지요.”

“고생이 많으시군요.”

“저 말고는 하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사내로서 이 땅에 태어난 숙명이라 생각하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고생이지요.”

“대단하십니다.”

이억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진정으로 숭고한 일이구나, 하고.

“필요한 도움이 있으시다면 말씀만 하시지요. 제가 어떻게든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사실, 그 말씀을 이미 저에게 해주신 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누구입니까?”

“누구겠습니까.”

* * *

명나라 사행은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다.

극도로 부패한 명나라에서는 모든 일이 뇌물을 통해 이루어졌다.

숙소의 일꾼들부터 대신들까지 재물 냄새를 맡고 날벌레처럼 달려든다. 문제는 놈들은 다른 날벌레들처럼 때려죽일 수 없다는 거다.

저들의 무한한 탐욕을 최소한이라도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황제와 접견조차 시켜주지 않고 백날을 꼬박 기다리는 수가 있었다.

가져온 조공 중에서 황제에게 바쳐지는 양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그에 따라 하사품 역시 조선에서 가져온 재물과 예물들에 비하면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인가.

돌아가는 길에도 지방관들이 황제의 하사품마저 뜯어먹었다. 마지못해서라도 일부 떼어주지 않으면 보내주질 않으니 결국 조선으로 가져오는 것은 극히 일부가 된다.

이에 왕은 결단을 내렸다.

“아조는 지난 몇 년 동안 최소한의 사신만 보냈고 규모 역시 예전에 미치지 않아, 사신들이 명나라의 대신들에게 몇 마디씩 듣는 일이 많았사옵니다.”

영의정 박순이 아뢨다.

그랬다.

왕은 그냥 사행의 횟수와 규모를 줄였으며 갈수록 더 줄여나갔다.

보수적인 대신들은 이러한 태도가 불경으로 인식될까 두려워했다.

명나라는 전통적인 강국이었고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러한 관념이 깨진 지금도, 명나라는 마냥 무시하기에는 강대한 국가였으며 결정적으로 조선 바로 옆에 있었다.

굳이 척을 져서 좋은 일은 없다. 다분히 합리적이고 당연하기까지 한 판단이었다.

고작 이웃집과 척을 져도 피곤한데 나라의 일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젊은 관리들과 백성들은 더더욱 명나라와 거리를 두길 원했다.

‘이유야 뻔하지…….’

육조거리에서는 수석대변인 이춘희가 왕을 찬양하고 조선의 진보를 선전했으며, 지방에서는 신문이 같은 역할을 했다.

때로는 낯부끄러울 정도로 노골적이면서도 사실을 기반으로 한 선전의 파급력은 막강했다.

조선은 명나라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여론이 백성들 사이에 퍼져나갔으니까.

왕이 의도한 일일까?

대체로 조선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은 왕이 배후에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서 명나라에 대한 반감이 퍼져나간다는 것을 모르거나, 모르고서 일을 벌일 왕도 아니었다.

이제 결말이 찾아왔다.

“이제는 명나라에서 직접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사전에 고지하지 않아 국경에 다다라 이제는 입국의 의향을 물어오고 있사옵니다. 더군다나 정사는 사례감의 태감이라 하옵니다.”

명나라가 다짜고짜 사신을 파견한 이유가 무엇이겠으며, 또 환관 조직 중에서도 실세인 사례감의 태감을 보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조선의 태도가 변한 이유를 확인하고 문제가 된다면 문책까지 하겠다는 뜻이었다.

왕이 답했다.

“내가 말했잖나, 저들이 먼저 접근할 것이라고.”

이럴 줄 알았다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접견에 능한 대신을 원접사로 파견하시옵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사와 수령들에게 접대에 차질이 없게 하라 명하시옵소서.”

“그럴 필요도, 가치도 없다.”

“명나라에서 태감을 파견한 이유가 분명하니 트집 잡힐 구석을 만들지 않음이 상책이옵니다.”

“흠……. 트집이라.”

왕은 고민하더니(물론 왕은 신하들 앞에서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 분명 고민하는 척에 불과하리라) 어좌에서 일어났다.

제신들의 시선이 모였고 왕이 말했다.

“경이 한 번 나의 트집을 잡아보겠나?”

“명나라와의 외교처럼 중요한 일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이런 일에서마저 뻔뻔하시니 심중이 깊으신 것인지, 아니면 천성이 뻔뻔한 것인지 모르겠사옵니다.”

박순은 어지간한 일이라면 왕에게 굴복해 왔다. 그렇기 어려울 때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항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정면으로 따져 물어야 했다.

왕이 답했다.

“맞는 말이로군. 하지만 경이 무어라 말하든 내가 신경이라도 쓸 것 같나?”

“…….”

“상대보다 대등한 위치에 있거나, 적어도 동등한 위치에라도 있으면 어떻게든 잘 보이고자 굴욕적인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 하다못해 알량한 자존심이라도 있으면.”

“국가의 자존심은 개인의 자존심과는 무게가 다르옵니다.”

“국가의 자존심이 백성 개개의 자존심이 된다, 영의정.”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존심은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것이 전하의 방식 아니었사옵니까?”

“나는 이 일에 대해서는 자존심을 버리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음을 안다.”

왕은 단호하게 답하고는 다시 어좌에 착석했다.

그는 여전히 뻔뻔하고 태연했으며 심지어 전통적으로 조선의 상국이었던 명나라에서 실세가 문책을 위해 찾아온다는 소식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왕에게는 다 방법이 있겠지.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도 어떻게든 해결해 버리는 사람이 바로 왕이 아닌가.

명나라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마저 그의 계략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왕의 계략을 매번 뒤꽁무니만 쫓아가는 건 피로한 일이었다. 홍섬이 사직하고 꿈에 그리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안착했지만, 생각과 현실은 언제나 다른 법.

좋을 때도 있었고 나쁠 때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박순은 이제 쉬고 싶었다.

갈수록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영의정이라는 사람이 너무 뒤쳐져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영의정이라는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겠나.

“전하.”

“말하게.”

“급작스럽게 말씀드려 지극히 송구하오나 신은 이만 사직할까 하옵니다.”

“항의인가?”

“아니옵나이다.”

“내가 예의상으로도 사직을 만류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박순은 두 손을 모아 꾸벅 허리를 숙였다. 왕이 물었다.

“다음 의정으로는 누가 좋겠는가?”

“다른 두 의정에게 복상(卜相)의 후보를 올리게 하시옵소서.”

“나는 그대에게 물은 것이다.”

“만일 현직 의정이 하나의 후보를 전하께 상주드리게 되면, 중신들은 의정들에게 잘 보이고자 갖은 폐단을 양산할 것이옵니다.”

“내가 모르고서 물어봤겠는가?”

“감히 사견을 아뢰옵자면 좌참찬 심수경이 조정에서 오래 일했고, 전하께서는 비웃으신다는 걸 아옵니다만, 청백리로도 녹선되었사옵니다. 또한 직위의 적체에도 불평 없이 맡은 바를 이행한 만큼 충분히 참착한 사람이니 의정 후보로서 높게 사고자 하옵니다.”

“첩질하는 걸 보면 그다지 침착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좋다. 영의정의 판단을 믿도록 하지. 심수경을 우의정으로 올리고, 노수신과 이리를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으로 제수한다.”

박순이 꾸벅 허리를 숙이자 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고생했다.”

“망극하옵나이다.”

아직 명나라 사신에 대한 논의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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