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45화
85. 가장 사악한 음모 (2)
“세상에는 자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싶은 자가 있고, 가지지 못해 급하게 자산이 필요한 자가 있지.”
“그러하옵니다.”
왕의 말에 상선 김기문은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투로 답했다.
부유한 반가에서는 고지기와 노복을 새벽까지 세워 혹시 모를 도둑을 방비하고, 양식이 떨어진 자는 한목숨 연명하고자 고리대라도 받는다. 형태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세상은 항상 그래왔다.
역사란 가진 것을 지키려는 자와 가지지 못해 어떻게든 가지려는 자의 연속이다.
“만일 내가 두 부류 사이를 잇는다면 어떻겠나?”
“가진 자들의 자산을 빼앗아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나눠주기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설마. 나는 일국의 왕이지 의적이 아닐세. 타인의 부를 강탈한다는 건 고려할 수 있어도 나눠주는 건 고민이 필요하지.”
“그쪽이 문제입니까.”
김기문은 자랑이십니다, 하는 말을 굳이 덧붙이진 않았다. 어차피 왕도 진심은 아닐 터다. 이런 류의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오나 국초에는 내수사의 자산을 쾌척하지 않으셨사옵니까?”
“즉위 초반이라 조정과 백성들에게 인망을 얻을 필요가 있었지. 그리고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했네. 내수사가 지금보다 더욱 부유해진 걸 보면 알 수 있지.”
“그렇다면 어떻게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를 이으시겠단 말씀이시옵니까. 가진 자들은 전하처럼 충분한 이익을 주지 않는 한, 그들은 쌀 한 톨이라도 거저 내어주지 않을 것이옵니다.”
“말하지 않았나. 세상에는 자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싶은 자가 있다고.”
왕이 덧붙였다.
“거기에서 ‘안전하게 보관한다.’라는 구절이 중요하네. 만일 내가 자산을 대신 보관해주는 기관을 세운다면 어떻겠나?”
일면식도 없는 인간이 돈을 대신 맡아주겠다고 한다면 먹고 나르겠다는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발언자가 왕이라면 다르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왕이 거짓말로 백성의 자산을 꿀꺽했다간 얻을 것보다 잃을 게 많다.
물론 그렇더라도 대다수는 굳이 얼마 있지도 않은 자산을 남의 손에 맡길 생각은 없을 거다. 하지만 지킬 게 많은 몇몇 사람들은 단지 고용인일 뿐인 고지기와 천박한 노비를 믿느니 나랏님이라는 존재가 주는 신뢰와 안정감을 높게 살 터였다.
“부유한 자들이 자산을 맡기겠군요.”
“아무리 내가 왕이라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겠지. 시작은 미미할 거야. 조금씩 맡기겠지. 하지만 맡겨놓은 자산이 탈 없이 잘 보관되고 있다면 점차 큰 규모로,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맡길 걸세.”
“그 많은 재물을 보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옵지요. 거기에 재물에는 손을 대지 않고 가지지 못한 자들과 연결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옵니다.”
“손을 대지 않겠다 한 적은 없네.”
“어찌 손을 대지 않고 자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단 말이옵니까?”
김기문은 의아했다.
재산은 쓰면 없어져 사라지는 것. 굳이 쓰지 않아도, 화폐가 발행되기 전 경제를 이루는 현물들은 시간에 따라 가치가 떨어지고 망실된다. 쌀은 묵으며 옷감은 삭는다. 그것을 보전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손해 보는 일이건만.
“자산의 묘리는 썩히는 게 아니라 굴리는 데 있지.”
왕이 말을 이었다.
“양식을 빌리고픈 사람들에게 내가 맡은 자산을 빌려주는 걸세. 예비 채무자의 신용과 상환능력을 검토해 충분히 믿을만하면, 낮은 이율로도 확실한 수익을 실현할 수 있지.”
올 한 해가 고비인 빈궁한 백성을 구제한다는 좋은 일도 하고, 결정적으로 얌전히 내버려 두면 묵어서 가치가 떨어질 현물을 새것으로 바꿀 수 있다. 거기에 수익까지 실현되는 것이니 일타 삼피라 할 수 있었다.
“자산을 맡긴 자들이 순순히 협조해주겠사옵니까.”
“보관에는 비용이 들지. 그들에게 선택지를 주는 걸세. 손끝 하나 대지 않는 대가로 보관료를 내든지, 융통에 동의하고 발생한 이자의 일부를 받든지. 하지만 원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보장해주는 걸세.”
“음, 원금을 보장해준다면 굳이 보관료를 내려는 사람은 없겠군요.”
“그래. 말만 선택지이네.”
예금자들은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고 그것을 자의로 결정했다고 믿겠지만, 누구도 굳이 보관료를 내어가며 현물 자산을 썩히고 묵힐 생각은 없을 터. 실상 선택지란 환상이며 예금자들의 자산을 행사하려는, 간사한 왕의 간단한 트릭이다.
“결국 백성들은 자의로 나에게 재산을 바쳐, 나의 수익을 실현하는 데 기꺼이 협조할 걸세!”
왕이 대소를 터뜨리자 상선은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다운 사악한 음모였다. 왕이라는 위치가 주는 신용을 팔아 환상을 사고 백성들의 돈으로 이익을 내다니. 후미진 곳에서 행인의 앞을 가로막는 강도들 따위는 왕 앞에서는 애들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원금을 보전해준다면 백성들은 잃을 게 없고, 전하의 계략은 사악하긴 하오나 ‘가장’아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사악하지는 않아 보이옵니다.”
“상선은 눈치가 좋군.”
“신이 그동안 모신 분이 있지 않사옵니까.”
적어도 모시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눈치는 필요했다. 그리고 왕이 요구하는 눈치의 수준은 제법 높은 편이었다.
“내가 그동안 말한 그 모든 것들도 위장에 불과했네.”
김기문의 눈썹이 올라갔다.
남의 재산으로 이익을 실현한다는 발상마저 충분히 사악하거늘 그조차 위장이란다. 그렇다면 왕의 진정한 발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상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왕은 말을 이었다.
“은행, 그러니까 내가 세울 기관의 묘미는 대출 자체에 있네. 백 섬을 받고 구십 석을 대출해주면, 예금자가 언제라도 가져갈 수 있는 백 섬과 대출받은 사람이 가져간 구십 섬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지.”
“음······.”
“이해가 어렵나?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만일 구십 섬을 대출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팔십 섬을 대출해주는 걸세. 그렇게 계속 나아가면, 실재하는 백 섬을 마치 천 섬이 있는 것처럼 꾸밀 수 있지.”
왕의 설명에 김기문은 수염이 거의 나지 않아 맨들맨들한 턱을 쓰다듬었다.
과연 정상적인 일은 아님은 분명했다. 백 섬으로 천 섬을 만들어 내다니.
“하오나 실재하는 건 처음 있었던 백 섬이지 않사옵니까?”
“즉, 결과적으로 은행은 존재하는 ‘백성이 자발적으로 쾌척한 재산’만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자산마저 창조하여 거기에 이자를 물리고 수익을 실현할 수 있다는 걸세.”
천 섬 쌀 중에 실재하는 건 백 섬이지만, 나머지 구백 섬은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로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수익을 발생시킨다.
“아······.”
김기문은 감탄 섞인 탄식을 흘렸다.
과연 이 정도라면 가장,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될 정도로 충분히 사악하다. 역시나 왕 다운 발상이었으며, 어쩌면 이 정도는 되어야 왕 다운 짓이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따금 왕이 사석에서 언급했던 ‘창조경제’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계략이 사악한 점은 단순히 없는 자산에 이자를 물린다는 점만이 아니다.
“하오나 무척이나 위태롭게 들리옵니다. 실재하는 건 백 섬뿐이지 않사옵니까? 만일 구백 섬의 존재하지 않는 재산이 실체를 추궁받을 때, 무수히 많은 혼란이 발생할 것이옵니다.”
“정확한 지적일세.”
백 섬에서 구십 섬을 빌려준 상태에서 예금자가 백 섬을 당장 전부 돌려받기를 원하면, 원금을 보장해줘야 하는 은행은 채무자를 닦달할 수밖에 없다.
채무자는 또 다른 채권자로서 자신의 채무자를 닦달할 테지.
어딘가로 잘게 흩어져버린 백 섬 쌀이 급박하고 시급한 상황에서 무수히 많은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를 건너며 완벽하게 회수되기란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은행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되겠지.
“최악의 경우 은행과 연결된 모든 사람이 지대한 피해를 입을 걸세. 대가 없는 이익은 어디에도 없는 법이지.”
“그렇다면······, 수익은 단순히 가상의 재산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라 은행을 믿고 예금하고 대출받은 모든 사람이 감수해야 할 위험성에서도 오는 것이로군요.”
“아주 정확해. 그리고 여기에서 아주아주 사악하고 악독한 묘미는, 은행은 잃을 게 재산밖에 없다는 점일세.”
은행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받을 피해와 사회적 혼란은 은행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파산하고 말 뿐이지. 이들은 없는 돈만으로 수익을 창출해내는 게 아니다.
사회 전체에 위험성을 안기고 그 대가로 이익을 실현하는 거다.
“은행의 해악이 이 정도라면 신은 아무리 전하께서 하시는 일이라도 만류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경에게 나의 계략에 대해 알려준 이유는, 고작 만류나 받기 위해서가 아닐세. 이 격언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군. 위험한 영역에서는 잃을 게 많은 사람처럼 공정한 지배자는 없는 법일세.”
상선 김기문은 쓰게 신음하고는 답했다.
“아예 은행이란 것을 엄금하는 편이 낫지 않겠사옵니까?”
“은행은 존재함으로써 일으키는 해악만큼이나 긍정적인 면도 크네.”
당장 급전이 필요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물론, 사업을 하고 싶어도 수중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빚쟁이가 될 테니 어지간하면 건설적인 사업을 시도할 테고, 궁극적으로는 경제에 활기가 돈다.
“더군다나 우리는 화폐 주조를 목전에 두고 있지 않나.”
은행은 원급의 수십 배나 되는 시중에 유통할 수 있다. 그런 일을 주조소가 하려면 정직하게 화폐를 더 찍어내야 한다. 시간과 재료, 비용을 들여서.
막 화폐 주조를 목전에 둔 지금 은행을 건립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경제가 존재하는 한 은행은 불멸일세. 이전까지도 체계만 없었다 뿐이지, 고리대를 놓는 사람은 이전부터 많지 않았나. 나는 단지 여기에 질서를 불러오고 싶을 뿐이네.”
돈을 보관하고 싶은 자와 빌리고 싶은 자의 수요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수요로 탄생하는 은행 역시 불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애써 부정해봐야 음지화될 뿐.
마치 꿩이 포식자에게서 숨고자 머리만 숙이듯, 불편하나 분명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제 눈만 가려 해약이 된 일은 수도 없이 많다.
“내가 은행을 운영하면 감수해야 할 대가는 재산만이 아닐세. 이 나라의 왕이니까. 그리고 말하지 않았나, 잃을 게 많은 사람처럼 공정한 지배자는 없다고.”
“잃을 게 많으면서도 심각한 실수를 초래한 자들도 많사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지. 하지만 잃을 게 적은 사람보다는 많은 사람이 더 조심스러울 것 같군.”
상선은 묵은 숨을 코로 토해냈다.
왕이 말했다.
“최초의 은행은 내가 세우겠지만 많은 사람이 이익을 좇아 모방할 걸세. 나는 도성에서 나 말고 다른 놈이 돈 놀음하며 해악을 끼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없애게. 거액을 예금했다가 적절한 때에 전부 인출하면 어지간한 녀석들은 망할 걸세.”
예금을 떼어 먹힐 수도 있는 은행에 돈을 맡기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전부 빚쟁이로 만들어버리란 말씀이시옵니까.”
“왕이 이미 선점한 사업에 감히 끼어들 생각을 하고도 각오 하나 없지는 않겠지. 없었다면, 당연히 더 벌을 받아야 마땅하고.”
“참으로 이상적인 군주이시옵니다.”
상선 김기문이 노골적으로 빈정대자 왕이 답했다.
“나도 잘 아네.”
* * *
나가사키 앞바다의 해전이 있고서, 시마즈의 명성은 땅으로 떨어졌다.
병력은 영지민을 쥐어짜면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지만, 명성은 그렇지 못한다.
시마즈 가의 무사들은 무능력자와 약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선전의 무서움은 말뿐인 평판이 본질마저 바꾼다는 데 있다.
동요한 국경지대 유력자들은 들불 번지듯 앞다투어 조선에 항복했으며 가신과 무사들은 줄줄이 이탈했다.
열도의 무인들은 절대적인 충성을 하지 않아 가문이 망하거나 원한다면 언제라도 소속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멸망한 가문의 무능력한 무사라는 경력은 재취업에 도움 되지 않는다. 많은 무사가 끝을 보기 전에 조선이나 본섬 혼슈로 적을 옮기고자 했다.
그 결과.
“열도인들은 무의미한 저항을 좋아해서 탈이로군.”
검은 호선이 창공을 가로질렀고 부원수 이억기는 조용히 감상을 훑었다.
장손포의 포탄이 시마즈 가의 본성에 직격했다. 천지 사방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하늘 높이 세워진 천수각이 풀썩 주저앉았다.
모든 것을 빼앗긴 시마즈 가문은 굴욕적인 항복 대신 비장한 최후를 선택했다.
하지만.
“모든 열도인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대우종린, 소린이 말했다.
그의 아들이자 오토모 가문의 당주 요시무네는 해전 직후 항복을 결정했다.
소린은 오토모를 떠나기 전만 해도 당주 이상의 실권을 쥐고 있었고 가신들도 허울뿐인 당주보다 전부터 계속 모셔온 소린에게 충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주 요시무네는 아비와 가신단 그리고 파죽지세의 조선 셋을 동시에 맞서려 들 정도로 멍청한 자는 아니었다.
“부원수 대감께서는 졸자가 누구보다 먼저 조선에 충성했으며, 큐슈 탄다이라는 관위도 가지고 있음을 알고 계시지요?”
“왜왕 가가 내린 관위를 대조선이 고려할 필요가 있나?”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졸자는 단지 열도인들은 동족이자 탄다이인 졸작의 지배가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자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열도인들은 조선의 지배를 충분히 반기고 있네. 하지만 그대가 열도인 누구보다 먼저 조선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점은 고려해야겠지.”
“그 역시 지당한 말씀이로군요.”
소린은 뻔뻔한 낯짝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억기는 무심하게 콧바람을 흘렸다.
적의 성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성벽에 빼곡하게 세워진 가문기들도 부러지고 꺾여 시마즈의 몰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주저앉은 천수각만은 못하겠지만.
“성을 확보하라.”
부원수의 명령에 병사들이 깃발을 나부끼며 진격했다.
큐슈는 마지막 대영주인 시마즈 가문마저 몰락하면서 완전히 조선의 손에 떨어졌다.
유력자 상당수는 조선이라는 이질적인 주인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다. 언어는 물론 체계와 문화 전반이 상이한 주인들은 열도의 전통과 관습의 보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변화란 가진 자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것.
다소 불온한 움직임마저 관측되었지만, 곧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었다.
대대로 착취를 당한 열도의 주민들은 단순히 주인이 바뀌었다는 점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자신들을 착취해 부와 권력을 일군 유력자들은 조선의 지배가 시작되었음에도 여전히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진정한 새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구시대의 잔재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은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되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