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44화
85. 가장 사악한 음모 (1)
“상인들이 천인소(千人疏)를 올렸네.”
영의정 박순 앞에는 종이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천인소라는 이름 그대로, 대부분은 서명에 동참한 상인의 이름과 자신임을 입증할 개인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왕의 말이 옳았다.
인간의 탐욕처럼 정직하고 분명한 동기는 없다.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의 목소리를 하나로 묶었으니까.
박순이 말을 이었다.
“세간에는 조정이 굴포운하의 개방을 논의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네. 이 천인소는 굴포운하를 개방해 달라는 청원이고.”
맞은편에는 호조판서 이산해와 공조판서 김성일이 자리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은 자신들이 불려 나온 이유를 능히 짐작해 냈다.
굴포운하는 현재 태안군수가 조운선만 개방해주면서 기계적으로 대응하고 있었으나, 운하가 개방된다면 보다 권한을 가지고서 능동적으로 대처 가능한 기관이 담당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호조와 공조는 운하 경영권에 명분이 있는 관청이다.
“굴포운하를 개방하는 겁니까?”
이산해가 물었다.
분명하게 짚고 가야지.
“맞네.”
“너무 급작스럽지 않습니까?”
“상당히 급작스럽지. 어전에서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았으니까. 소문이 동시다발적이라는 점을 봤을 때 전하께서 배후에 계신 듯하네.”
“전하께서 신하들을 놀리는 재미로 사시는 건 잘 압니다만 이유를 모르겠군요.”
“굴포운하 개방에 대한 소식을 공론화시켜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을 생각이시겠지.”
뜬금없이 튀어나온 눈앞의 천인소가 증거였다.
나랏일에 관심이 많아 주기적으로 반발해 온 유생들조차 각자 놀았지 천인소는커녕 백인소조차 제출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따로 놀기는 마찬가지인 상인들이 의기투합하여 천인소를 작성해 제출한다고?
배후가 누구일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산해는 김성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가?”
“전하를 가르치신 공판 대감이시라면 얼마나 사악한 음모와 계략을 꾸미고 계실지 궁금하군요.”
“내가 전하를 거의 가르치지 못했다는 건 호판께서도 잘 아시잖나. 애초에 누가 품고 가르칠 수 있는 분도 아니셨네.”
이산해는 그러게 잘 좀 가르치지 그랬냐, 는 생각을 삼켰다.
왕을 나쁘게 생각하거나 그와의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이따금 신하들에게 말도 하지 않고 일부터 저질러놓으면 장관으로서는 한숨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외통수군요. 하지만 운하를 개방한다고 반대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보수적인 사람들이지, 언제나. 막대한 자산과 기간을 투자해 어렵사리 만든 운하를 민간에 개방하자는데 좋은 말만 나올 수는 없네.”
“곧 조운의 의미가 퇴색될 텐데요.”
“맞네.”
나라에서는 화폐 주조를 준비하고 있었고, 세금 납부 역시 현물에서 시작해 차차 화폐의 비용을 늘려 최종적으로 전액 화폐 납부로 전환하기로 계획을 수립한 상태였다.
화폐는 세곡과 비교해 무게 당 가치가 높았다.
이전처럼 세금을 도성까지 옮기고자 조운선을 하삼도에서 도성까지 개미처럼 늘어뜨릴 필요가 없었다.
나아가 조운 자체가 불필요해질지도 모르지.
내구성 좋은 화폐는 비 따위의 험한 환경에 조금 노출된다고 가치를 상실하지는 않는다. 부피도 적으니 길이 험하더라도 충분히 육로로 운송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운하가 가치를 상실하지 않도록 민간에 개방하자는 것이지. 하지만 화폐를 주조하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네.”
사업은 구리 가격 안정을 위해 극비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대외에 알려진다면 개나 소나 구리에 투기해 시세를 높일 테니까.
“즉, 아직까지는 민간에서는 아직 운하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뜻일세.”
운하의 국가적 효용이 퇴색된 지금, 몸값이 떨어지기 전에 상한가로 민간에 개방하겠다는 사악한 계략이었다.
그리고 등장한 천인소.
“상인들은 출자와 이용료를 약속했네. 천인소에 서명한 자들 모두.”
상인들은 덫에 달려들다 못해 제대로 들이박았다.
재물과 이익이라면 끔뻑 죽는 상인들은 저들의 욕망에 의해 파멸…… 까지는 아니겠으나 제 발을 도끼로 찍은 격이었다.
곧 사라질 조운선과 경쟁하겠답시고 더 많은 출자와 이용료를 불렀으니까.
전말을 알게 되면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만 그렇다고 운하를 안 쓸 수도 없었다.
“실로 전하다우신 일이군요.”
“조만간 조정에서 어느 관청이 굴포운하를 감독하느냐에 대해 논의가 나올 걸세. 하지만 다분히 요식적이지. 호조 아니면 공조에서 담당하게 될 테니까.”
운하를 경영 대상으로 해석하면 나라의 재원과 수입을 총괄하는 호조에게 명분이 있으며 대규모 설비이자 운송수단이며 사회간접자본 측면에서는 공조에게 명분이 있었다.
그리고 권한은 곧 실권.
운하를 감독하는 기관은 상인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민간자본에 대한 영향력은 호조와 공조 모두에게 절실했다.
“이 사람이 둘을 부른 이유는 미리 합의를 봐두자는 걸세. 어전에서 말이 길어져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그런 일이라면…….”
이산해는 김성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운하는 호조에서 맡는 게 합당합니다. 이미 공조에서는 화폐 주조의 건으로 바쁘지 않습니까.”
“화폐를 주조하게 되면 바빠지는 건 공조만이 아닐세, 호판.”
교차하는 시선 사이에 불길이 튀었다. 비유적인 차원에서.
사실 왕의 사악한 계략은 상인들만 뒤통수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을 조용히 불러 처리하는 것마저 실상은 어전에서 논의가 길어져 말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한 계획의 일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놀아나는 두 사람의 광경에 박순은 혹시 자신 역시 어디에선가 뒤통수를 맞은 게 아닌가 고민했다.
적절한 추측이었다.
과연 박순 역시 뒤통수를 맞았으니까.
운하의 일은 그에게 맡긴 채, 왕은 좌의정 노수신과 우의정 이이만 불러 밥을 먹는 중이었다. 의정부에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감히 군주에게 맞먹으려 들었으며 흑역사까지 공개한 일에 대한 소소한 보복이었다.
* * *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
키요스 성.
오다 가문의 본성에서 회의가 벌어졌다.
주제는 간단하다.
당주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적자 노부타다는 혼노지의 변을 당해 죽었다.
주인과 후계자가 함께 죽었으나 세상은 여전히 혼란하고 머리 없는 짐승은 살아남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다음 오다 가문의 주인이 될 것인가.
키요스이 회의는 그것을 논하는 자리였다.
“당연히 노부카츠님께서 다음 당주가 되어야 하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말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세인은 히데요시를 무시했다.
어려서부터 작은 원숭이라는 아명을 가진 히데요시는 그 이름처럼 볼품없는 외모와 비천한 출신을 가졌다.
히데요시가 아자이 가문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아자이의 영지를 이어받고 지쿠젠노카미(筑前守)라는 관위를 얻어 대영주가 되었음에도 몇몇 사람들은 그를 끝까지 원숭이라 불렀다.
오다의 바로 아래이자 모두의 위였던 시바타 카츠이에가 그러했다.
“무슨 소리냐, 원숭이! 노부카츠는 멍청해서 노부나가 님의 뒤를 잇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노부나가의 둘째 아들인 노부카츠는 이가 통치의 연이은 실패로 아버지에게 연을 끊어버리겠다는 혹평까지 들었다.
그러한 연유로 노부카츠가 무능하며, 나아가 멍청하다는 평가까지 있었으나 실제로 지적능력에는 문제가 없는 자였다.
당연하겠으나 시바타 카츠이에라고 노부카츠를 진짜 멍청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노부카츠보단 노부타카 님이 당주가 되어 가독을 승계하는 게 옳다. 원수 아케치 미츠히데를 야마자키에서 패사시킨 분도 노부타카 님이 아니냐?”
시바타 카츠이에의 주장이 히데요시가 비웃었다.
“……하!”
노부타카가 명목상 야마자키의 대장이었으나, 실제로 전투를 지휘하고 수행한 사람은 히데요시였다.
회군한 히데요시가 노부타카에게 합류하기 전까지 노부타카는 혼노지의 변에 대응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군세에서 대량의 이탈자마저 발생하고 있었다.
사실, 양측이 후보로 내세운 인물들은 능력도 변변찮고 명성도 없었다.
천하인 오다 노부나가의 자식들로서 주제넘은 위광을 업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차남 노부카츠, 삼남 노부타카는 쓸데없이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기만 할 뿐인 역사의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두 사람을 후보로 내세운 히데요시와 카츠이에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오다 가문에는 천하를 경영할 인재가 없었다.
그리고 키요스에 모인 중신들은 모두 오다 노부나가가 열도를 제패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실력자들이었다.
고작 애비 잘 만났을 뿐인 애송이들에게 진심으로 충성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단지 좋은 명분을 등에 업고서 눈앞의 경쟁자들을 처치할 궁리일 뿐.
히데요시가 말했다.
“야마자키의 전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리고 전투에서 노부타카 님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직접 모신 내가 잘 압니다.”
노부타카는 한 게 없다는 것을.
카츠이에도 맞불을 지켰다.
“그리고 노부카츠의 지금 이름은 키타바타케 토모토요지. 오다 가문를 승계할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적절한 함자로군.”
노부카츠는 아비 노부나가가 키타바타케 가문을 흡수할 생각으로 키타바타케의 데릴사위로 보냈다.
그리고 노부카츠는 성인식을 치르며 성을 키타바타케로 바꾸었으며, 현재는 키타바타케의 당주이기도 했다.
유력 가문으로 아들을 보내 당주를 만드는 이유는 오다 가문의 진정한 후계자를 보필할 위성 가문을 만들기 위함.
노부카츠가 달고 있는 키타바타케의 성과 당주 자리는 오다의 당주 후계자를 논하는 자리에서는 짐이고 독이었다.
“차라리 원숭이 그대도 노부타카 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오다 가문을 다시 반석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겠나?”
“만일 노부카츠님께 자격이 부족하다면 적장손인 산보시(三法師)님을 지지하겠습니다.”
산보시는 노부나가의 후계자였던 적자 노부타다의 장자. 즉, 오다 가문의 적장손이다.
노부카츠가 명분에서 부족하다면 반대로 누구보다 명분이 강한 산보시를 내세우겠다. 히데요시의 생각이었다.
카츠이에가 물었다.
“산보시는 고작 세 살에 불과함을 모르나?”
히데요시가 답했다.
“그게 중요합니까?”
아니.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를 지배할 자가 아니었으니까.
히데요시는 비릿하게 웃었다.
오다 가문의 본성 키요스에서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 * *
“관리들은 나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라.”
왕은 광화문 누각에 올라서 망원경으로 한성을 내려다보았다. 북촌 관광방 쪽에서 뚝딱뚝딱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음의 진원지에는 며칠 전만 하더라도 멀쩡히 있던 저택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의 대들보가 세워지고 있었다.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재목을 이어 붙여 세운 대들보는 높이만 궁궐 기둥과 맞먹었다.
이만한 규모의 대공사를 일으키는 사람은 도성에서, 아니 조선이라는 나라를 통틀어서 오직 하나뿐이다.
곁에서 상선이 말했다.
“누구도 전하에 대해 알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일세. 나도 이순신이라는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아하하하!”
왕은 미친 소리를 웃음까지 터뜨리며 내뱉고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주조권은 조정에서 가져갔지만, 화폐로 재미 보는 방법이 주조밖에 있는 건 아니지.”
“어떤 사악한 음모를 수립하셨사옵니까?”
“화폐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불멸로 남을,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음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