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43화
84. 신성한 의무 (3)
“성상 전하께서는 욕조를 물이 아니라 내수사 어음으로 채우신다는 말이 도성에 나다니고 있사옵니다!”
“흑색선전이다!”
“내부자의 증언이 있었사옵니다!”
“……욕조에 물 대신 돈을 채워보는 것은 사나이라면 한 번쯤은 가질 법한 꿈 아니냐?!”
“예?!”
왕의 뻔뻔한 대답에 막 찔러보았던 박순이 놀라 물었다.
“아니, 정말로 어음으로 목욕을 하셨단 말씀이시옵니까?”
“크흠!”
“제신들이 전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사옵니까?”
“그럼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부럽, 지 않고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생각하옵니다!”
“말이 조금 이상하지 않았나?”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사옵니다!”
박순은 당당하게 맞섰다. 피차 추태를 부리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
그렇다면 먼저 숙이는 쪽이 패자였다. 게다가 박순에게는 나라가 주조권을 가져야 한다는 대의를 위해서라는 명분도 있었다.
“내가 어음으로 목욕한다고 어음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거늘, 분위기 한 번 내봤을 뿐인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극한 부를 과시하는 행위이니 사치를 장려할 소지가 있사옵니다!”
“경은 축재하는데 눈치가 보여서 내수사 어음을 모으는 것이잖나!”
“인군과 신하가 어디 같사옵니까?”
“이거 봐라?!”
“그리고 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내수사의 어음으로 교환해도 물대접 하나 채우기 어려울 텐데, 전하께서는 욕조를 채우지 않으셨사옵니까!”
“경이 가난한 게 내 잘못이란 말인가!”
왕과 영의정이라는 사람이 레전드급 추태를 벌여대자 보다 못한 좌의정 노수신이 끼어들었다.
“전하, 어음에 대한 논의는 이만하면 충분하옵니다. 그리고 영상도 자중하시지요. 모두가 보고 있습니다.”
“크흠.”
“흠!”
두 사람이 헛기침하며 입을 닫자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잦아들었다.
짧은 침묵이 있었고 왕이 중얼거리듯 답했다.
“화폐 주조권은 의정부에서 논의하여 주조 능력이 있는 관청이 전담하게 하라.”
“역시 성상 전하께서는 마음이 하해처럼 넓으시어 신들의 우려를 신경 써주시리라 믿고 있었사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
“또한 신들이라면 전하의 도움 없이는 열도를 통해 조금의 예산도 쓰지 않고 화폐 주조에 필요한 막대한 구리를 수입할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뒤늦게 이딴 반응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앞으로 전하께오서 애처로운 신들의 우려에 잘 보답해주시리라 믿기 때문이옵니다.”
평소대로 리액션할 테니 자기들 입장도 생각해 달라는 뜻이었다.
왕은 어이가 없었는지 눈살을 찌푸렸지만 박순은 여전히 뻔뻔했다. 그것이 왕에게 배운 방식이었다.
“……앞으로 원하는 게 있으면 유치하게 꽁해있지 말고 제때 고하라.”
“성상 전하께오서 신을 배려해 주시니 항상 망극할 뿐이옵니다. 하오시면, 도원수가 구리를 확보한 방법에 대해 알려주시겠사옵니까?”
“그건 도원수가 귀환했을 때 물어보면 되는 것 아닌가?”
왕이 묻자 박순은 대답도 없이 목석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발끝은 여전히 어좌를 향한 채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으니 아무리 봐도 시위였다. 도원수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좋아……. 도원수는 상인들에게 기부를 받았네.”
“셈이 빠르고 이익에 눈먼 자들이 도원수에게 순순한 마음으로 막대한 양의 구리를 기부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사옵니다.”
“조선령이 될 큐슈에서 무역을 보장해 주기로 했다.”
“전하, 어찌하여 외부인들에게 아조의 땅에서 무역할 권리를 파셨사옵니까? 특히나 왜인들에게는 조약을 통해 무역을 왜관으로 한정하였사옵니다.”
“영의정은 조선이 왜와 마지막으로 조약을 맺은 날이 70년 전이라는 것을 아나?”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강산이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는 뜻이다.
“새로운 합의를 맺어 왜관을 옮긴 것이 40년 전이옵니다.”
“70년이나 40년이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영의정.”
신하들의 시야는 확장되었지만 어려서부터 뇌리에 박힌 개념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구시대를 살아가는 중신들에게 세상이란 불변이다.
이상사회는 머나먼 요순시대에 있었고 나라의 역할이란 것도 요순시대의 구현이었다.
그들에게 세상이란 불변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들은 원정군이 큐슈를 복속해나가는 모습에 아조의 영화가 사해를 울린다며 칭송하지만, 정작 그 사해를 울리는 영화에 의해 날파리들이 몰려들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성상 전하와 강대한 군대가 있는 한 어떤 무뢰한 자들이 아조를 범할 수 있겠사옵니까.”
“코끼리는 모기를 잡지 못하는 법이다, 영의정.”
내가 말하는 날피리들이란 단순히 변경을 약탈하는 오랑캐가 아니다.
상인, 그리고 상인보다 더욱 악랄한 선교사들이지.
“조선의 명성이 외부로 알려진다고 함은 외부에서도 조선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대들은 세상이 넓고 강국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충분히 유의하고 있사옵니다.”
“나라의 일에 ‘충분히’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안도하는 순간 반전이 찾아오기 때문이지. 서양의 방식은 여기와는 다르다.”
수동적인 태도를 선호하는 동방과 달리 서양은 공격적이리만치 적극적이다.
조선은 대명무역을 포함해 외부 세력 모두와 제한적으로 무역한다. 왜를 상대로는 왜관으로, 여진족을 상대로는 마시(馬市)로.
놈들은 정반대다.
구속받지 않는 개인들이 물건을 팔아먹고자 사지에 뛰어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놈들은 인간의 탐욕이라는 정직하고 분명한 목적으로 무장했으며 이익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지만 맞으면 사지도 제 발로 뛰어든다.”
이미 적잖은 상인들이 반도와 열도 사이의 해협을 넘으려다 적발됐다.
“갈수록 수많은 외부인이 침입을 시도하겠지. 무역 권리를 인정하는 이유는 저들의 배를 불리기 위함이 아니다. 일부에게만 이익을 실현할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저들끼리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함이며, 이는 아조를 보호할 보루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상인들은 권리가 없어도 꾸준히, 무수히 침입을 시도하겠지.
정당한 대가를 치른다는 건 대체로 이익 극대화에 유리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생각보다 세상은 빠르게 굴러간다. 그리고 갈수록 빨라진다. 광기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지.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은 우리 역시 발맞춰 빠르게 움직이는 것뿐이다.”
어느 때보다 진지한 왕의 하교에 박순 역시 유치한 대응은 접어두고 진지하게 답했다.
“불가피한 선택을 이해했사옵니다. 그렇다면 부산포의 왜관은 어떻게 되는 것이옵니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열도에서 접근하기 좋은 위치니까.”
미래의 외국인 타운처럼 열도인들이 상주하며 그들만의 영역을 구축하겠지. 특정한 기능을 부여받지 않더라도 왜관은 왜관으로 남으리라.
“본래는 내수사에서 화폐를 주조하려 했지만, 조정의 관청이 담당하게 된다면 비축해둔 구리는 주조를 전담할 관청이 맡는 게 좋겠지.”
그냥 주겠다는 뜻.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내수사에서 확보한 구리라면 분명 화폐 주조에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
사업이 시작되면 구리 가격이 높아져 엄청난 차익을 누릴 수 있을 터임에도, 나랏일을 위해 기꺼이 쾌척하는 그는 실로 내수사의 주인이기 전에 조선의 왕이었다.
박순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망극하옵나이다.”
“새는 일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해라.”
“성상 전하께오서 신료들의 어려움을 헤아려주셔서 녹봉을 크게 더하셨으니, 감히 공금에 손을 대는 자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나이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그럼에도 잊을 만하면 나랏돈을 호주머니에 집어넣는 자들이 나오지.”
공금횡령은 무려 열 배, 그것도 교화소에서 철을 캐서 갚아야 하며 죽어도 자식에게 대물림이 되는 극형을 내리고 있음에도 말이다.
“말하지 않았나. 수지만 맞으면 제 발로 사지로 뛰어드는 게 인간이라고.”
“이익에 눈이 멀어 도리를 저버릴 정도로 천박한 자들만 그렇사옵니다.”
“가장 천박한 자들이 가장 강한 권력과 부를 누리는 세상이다, 영의정. 예로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
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대학, 금천병원, 구호기구, 늘어난 세입과 세출, 경제 규모는 더 많은 사람을 도성으로 불러보았고 많아진 사람들은 더욱 많은 상품을 요구했다.
이미 조선 수운업의 중심이었던 마포나루는 변화에 맞춰 더욱 활기를 띄웠다.
사공들은 포구에 배를 걸어두고서 운송 의뢰를 기다렸으며, 인부들도 삼삼오오 모여 일감을 기다렸다.
그들 사이로 뻔뻔하게 끼어든 사내 하나가 대뜸 말을 던졌다.
“우리도 굴포운하를 쓸 수 있다면 엄청난 부를 거머쥘 텐데 말이야.”
굴포운하.
좌절당한 과거의 시도들과는 달리, 만능분을 이용해 지어진 갑문식 운하는 탈 없이 기능했으며 안흥량에서 해마다 조운선과 수부들이 희생되는 일은 없어졌다.
그리고 그게 문제였다.
굴포운하는 오직 조운선에만 개방되었으며 상인이 모는 사선(私船)은 항상 태안을 돌아야 했다.
무사통과를 기원하는 제를 지내고 물길을 잘 아는 수부들을 수배해도 잊을만하면 안흥량은 예전처럼 희생자를 집어삼켰다.
육로와 비교해 훨씬 빠르고 절차도 덜 복잡한 수운으로 하삼도의 물건을 마포까지 떼어오면 큰돈을 만질 수 있었지만 그건 사업 수익이라기보다는 위험수당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굴포운하를 쓸 수 있으면 정말 좋겠지만.”
“나라의 운하인데 우리들이 함부로 쓸 수가 있나? 응.”
“함부로 쓸려 해도 갑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그림의 떡이지.”
“신경 쓰면 지는 걸세.”
상인들이 회의적인 소리를 하자 굴포운하를 처음 언급한 사내가 웃으며 답했다.
“그럼 내가 알아온 소식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겠군.”
“응, 무슨 소식? 굴포운하와 관련된 건가?!”
“당연히 굴포운하와 관련된 소식이니까 굴포운하를 언급했겠지!”
“뜸들이지 말고 알려주게!”
상인들이 오줌보 터지기 직전에 몰린 사람처럼 급하게 재촉하자 사내가 답했다.
“이번에 나라에서 상인들의 의향을 조사해 수요가 많으면 운하를 이용하게 해주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는군.”
“응?! 그게 사실인가!”
“조운선은 어떻게 하고?!”
굴포운하의 계단식 수로는 상류에 조성한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와 유지했다.
즉, 이용할 수 있는 배의 숫자는 정해져 있었다. 가뭄이라도 들면 더더욱 적은 숫자의 배만 굴포운하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곡을 옮기는 조운선만 통과시켜도 물이 모자랄 터.
하지만 그건 상인들이 알 바 아니었다.
“높으신 분들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실 테니 말이 나왔겠지,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고!”
상인 하나가 나서서 논란을 종식하고는 재촉했다.
“어떻게 해야 굴포운하를 이용하게 해준다던가? 혹시 이제 와서 농담이라고는 안 하겠지, 응?”
“맞아, 우리들 앞에서 굴포운하는 가볍게 언급할 대상이 아니라는 걸 자네도 알 걸세!”
“운만 띄워놓지 말고 본론을 꺼내 봐!”
사내는 누구처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