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42화
84. 신성한 의무 (2)
을룡은 군납업자들에게 먼저 기회를 주기로 했다.
대조선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들게.”
도원수의 허락이 떨어지자 열도인 몇 명이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적잖이들 긴장한 기색이었으나 단지 도원수의 앞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최근 외부에서 히라도를 넘보는 자들이 부쩍 늘어났다.
누구라도 안방에서 외부인이 설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물며 상인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바짝 긴장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들도 들어 알고 있겠지만 우리 수군이 시마즈의 상륙 시도를 저지하고 그들의 본대를 격파했네.”
“예. 들었습니다. 대승을 감축드립니다, 도원수 대감.”
“감축드립니다.”
군납업자들이 때늦은 축하를 올리자 을룡은 손을 들어 제지하곤 말했다.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졌으니 앞으로도 수많은 상인들이 히라도를 찾아오겠지.”
“온갖 천박한 자들이 도원수 대감과 해방군들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을까 졸자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네들이 우리를 생각해 준다니 고맙군. 그래서 마침 이쪽에서도 그대들을 지원할 방도를 생각하고 있었다네.”
군납업자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졸자들은 한시라도 대조선의 지배와 통치를 반기지 않은 적이 없는데, 이렇게 도원수 대감께서 졸자들을 신경 써주시니 은혜가 지극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맙겠군.”
“하온데 지원이라 하심은…….”
기대가 잔뜩 어린 목소리였다.
제도적인 지원을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었다. 군납 지분을 보장해 주는 것만으로도 업자들은 최악의 경우는 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도원수 을룡은 일방적인 지원을 약속할 생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조선에 먼저 봉사할 기회를 줄 뿐이며, 그들이 입 밖으로 내뱉은 말들이 단지 공허한 울림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확인되면 정당한 대가를 받을 뿐.
을룡이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출자라는 것을 아나?”
“예에. 어찌 모르겠습니까.”
“원정을 유지하는 비용은 막대하네. 하지만 본국에 계속 부담을 지우는 것은 부담스럽지.”
“설마.”
“금, 은, 구리를 기부하는 양에 따라서 무역의 기간과 범위에 차등을 둘 생각이네.”
일방적인 배려를 생각했던 군납업자들은 당혹한 눈빛으로 서로를 둘러보았다.
이런 식의 결말은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투였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할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는데, 도원수 을룡은 이전부터 군납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좋은 거래는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만일의 상황은, 원치 않더라도 최소한의 각오는 해둘 수밖에 없었다.
“기부라 하심은 물품의 대금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냉정하게 평가하면 무역을 허가해 주는 것이 대가라고 해야겠지.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않길 바라네. 거래가 가능한 대상이 많아지면 우리는 당연히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자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으니까.”
“송구한 질문입니다만 졸자들은 우매하여 도원수 대감께서 원정대의 방침을 알려주시는 것이 어떻게 졸자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배려해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소식은 먼저 접하더라도 딱히 이득이 아니다.
어차피 무역권은 귀금속의 기부 총량에 따라 정해진다. 먼저 들으나 나중에 들으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얼핏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을룡이 답했다.
“먼저, 기부가 시작되면 귀금속들의 가치가 폭등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시세는 고려하지 않아. 단지 종류와 순도, 무게만 따질 뿐이지.”
먼저 정보를 접한 쪽이 적은 비용을 투자해 많은 귀금속을 사들일 수 있었다.
꼭 기부하지 않고 시세차익을 노려도 상당한 이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
물론 을룡은 군납업자들이 재미만 보고서 빠지는 일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나아가 자네들이 무리해서라도 크게 기부하면, 후발주자들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해 마찬가지로 무리를 하겠지.”
“도원수 대감께만 좋은 일 아닙니까?”
“아니지. 무리한 후발주자들이 제풀에 떨어져 나가는 것, 그리고 그대들이 외부 상인들을 선동해 기부가 많아진다면 꼭 히라도에서만 거래하게 되지는 않을 걸세.”
히라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거래할 수 있다.
상인인 군납업자들은 이익이 걸린 일에 함부로 넘겨짚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조선’의 원정대 최고 지휘자인 도원수가 말할 다른 곳이란 큐슈 어딘가를 말하는 게 아닐 터였다.
선발의 특권이 보장된다면 무리할 가치는 있었다.
나아가 외부에서 유입된 상인보다야 히라도에서 원정대와 꾸준히 거래하며 총알을 비축해 둔 군납업자들이 경쟁에서는 유리했다.
“도원수 대감의 깊으신 뜻을 몰라뵈었습니다.”
“나의 기대에 부응해 주게. 적절한 성과를 내준다면 호의를 살 수도 있겠지.”
그리고 유력자의 호의는 어떻게든 쓸모가 있었다.
이국에 다리를 놓을 생각으로 속에서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상인들에게는 특히나.
“대조선과 도원수 대감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애써 노력해야지 않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가게. 다른 상인들에게는 사흘 뒤에 알려줄 거야. 그렇게 알아두게. 그동안 밑간을 잘 해두고.”
“맡겨만 주십시오.”
군납업자들은 황송하다는 듯 꾸벅 허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자 을룡은 제장을 불러 조용히 명했다.
“조만간 금, 은, 구리의 가격이 올라갈 걸세. 매입하고 있다가 사흘 뒤부터 처분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시세를 계속 주시하며 큰 차액을 노릴 수 있다면 납부받은 귀금속이라도 처분하게. 특히 금과 은은 공격적으로 해도 좋아.”
“예.”
제장이 물러나자 을룡을 금일 처리할 공문들을 서안에 올렸다.
직함인 도원수는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지만, 을룡은 동시에 조선령 구주의 기념비적인 첫 관찰사를 겸하고 있었다.
지방행정이 확립되지 않은 지금 관찰사로서의 주요 업무는 행정보다는 열도인들의 충성심을 확립하고 대영주들의 영지민들을 선동하여 혼란을 부추기는 것.
첩보행위에 가까웠고, 그 일환으로 선전용 신문 배포가 있었다.
그리고 신문의 최종 검수와 결재는 언제나 을룡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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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 : 大朝鮮의 解放軍이 島津의 主攻을 粉碎하다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누군가 외쳤다.
‘거북선 한 척이 소조선 백 척보다 강하다!’
시마즈 당주 요시히사는 분개하여 소조선 백 척을 보냈으나, 한 척도 돌아오지 못했다. 누군가 다시 외쳤다.
‘거북선 한 척이 관선 백 척보다 강하다!’
요시히사는 관선 백 척에 무사들을 태워 보냈다. 나가사키 앞바다에서는 한참 포성이 있더니 침묵이 잦아들었고 또 외침이 들렸다.
‘거북선 한 척이 안택선 백 척보다 강하다!’
요시히사는 보물과 성을 팔아 안택선 백 척을 마련해 동생 요시히로에게 맡겼다.
나가사키 앞바다는 포성과 고함, 비명으로 얼룩졌다. 요히시로는 그날 밤 귀신이 되어 돌아와 요시히사 앞에서 울었다.
‘조선놈들이 우리를 속였습니다! 거북선이 한 척이 아니라 두 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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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빙자한 농담이었으며, 나가사키 앞바다에서 대패한 시마즈를 향한 도발이었다.
“하하……. 이거 괜찮은걸.”
신문의 농담은 큐슈만 아니라 열도 전체에 알려질 터였다.
큐슈의 패자까지 노리던 시마즈는 졸지에 약졸에 병신들이라고 소문이 나겠지. 적들의 사기는 바닥을 칠 테고 당주의 지배력은 의심받을 거다.
전쟁은 총칼만으로 하는 게 아니지.
을룡은 기꺼이 신문의 발행을 인가했다.
* * *
화폐의 재질과 도안은 왕이 주도적으로 진행했다.
잘나고 잘나셨으며 똥도 팔뚝만큼 굵으신 성상 전하께서 이렇게 하겠다면 제신들에게는 마다할 도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전하, 논의한 바에 따르면 족히 수십만 근의 구리가 필요하옵니다.”
영의정 박순이 지적했다.
왕은 구리를 기반해 만든 화폐를 제안했다.
구리는 무게 대비 적당한 가치를 지녔고, 합금을 만들면 강도가 높아지고 부식에도 강해진다.
수많은 사람의 손을 타며 각종 환경에 노출될 화폐로서는 적절한 선정이었으나 문제는 수급이었다.
조선 땅에서는 유난히 구리가 나오지 않아 구리 광산이 금은 광산보다 적었으며, 산출량도 적었다.
“최근 내수사가 함경북도에서 상당한 규모의 구리 광산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퍼졌으나, 성상 전하께서도 아시겠으나 실상은 구리가 아닌 것으로 판명났사옵니다.”
“그곳 광산의 원석이 구리 원석과 유사하나 구리가 아닌 다른 금속이 추출되었다더군.”
“예.”
내수사의 주인이 왕이니 박순 자신보다 빨리 전말을 듣지 않았겠는가.
그러고도 화폐의 주성분을 구리로 선정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왕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지만 없는 구리를 만들 수는 없으리라. 도가에서 말하는 연단술로 구리를 합성할 수 있지 않은 한은 말이다.
…….
설마.
박순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구리를 합성할 방도가 있사옵니까?”
상식을 무수하게 파괴해 온 왕이었다. 그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영의정은 농담이 심하군.”
“전하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생각했사옵니다.”
“원소 단위의 물질은 현재 단계에서는 다른 원소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게 중론이네.”
조선의 새로운 지성으로 조명된 대학에서 연구로 밝혀낸 사실이었다.
“구리를 합성하는 건 나라도 불가능해.”
박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사옵니다.”
“나에게도 불가능한 일은 있네. 경들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풍문으로는 전하께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도 돌아다니고 있사온데, 신들은 괴력난신의 이야기는 믿지 않으나 전하만큼은 예외적이라 생각하옵니다.”
“이보게들. 나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박순은 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맞았다.
영의정 박순과 제신들은 애를 써도 도저히 왕을 당해낼 수 없자 반대의 전략을 취했다.
무슨 일이건 척척 해내는 왕 앞에서 매번 찌그러질 바에야, 왕에게 무한한 기대를 걸며 어떠한 성과라도 당연하게 맏아들이기로 했다.
문제가 잘 풀린다면 전지전능한 전하께서 하신 일이니 놀랄 일이 아니고, 반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호들갑을 떨었다.
‘헉! 전하께서 안 된다고 하시다니, 우린 이제 모두 죽었다!’
하고 말이다.
새로운 전략은 잘 먹혔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뻔뻔하게 응수하며 신하들을 바보천치로 만들었던 왕이 당황할 정도였으니까.
결정적으로, 이전에는 신하들이 사정을 알려달라 구걸했다면 지금은 왕이 애써 실망한 척하는 신하들에게 사정을 밝혔다.
지금처럼.
“조선 땅에는 구리가 나지 않아도 열도에는 많이 나오네. 이미 도원수가 막대한 양의 구리를 보내기로 했어.”
“화폐를 주조하는데 필요한 구리를 모두 수입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지 않겠사옵니까? 전하시라면 알고 계시겠으나 아조는 그만한 경비를 지출할 여유가 없사옵니다!”
“이미 추가적인 세출 없이 수만 근의 구리를 확보했네.”
“아, 역시 전하시옵니다.”
여유가 없다며 유난을 떨 때는 언제고 심심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
왕은 불만족스러운 시선으로 제신들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신하들은 합의한 대로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전지전능하신 전하시라면 당연히 해내셔야 할 일이었다는 투였다.
“최근 들어서 경들 태도가 아주 뻔뻔해졌는데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는 사람들이 이러기인가?”
“신들이 어찌 감히 전하 앞에서 불손해질 수 있겠사옵니까.”
“내가 보기엔 충분히 불손하다. 원하는 바를 말하라. 그렇지 않고 계속 버티겠다면 내가 직접 경의 뒤통수를 때려주지.”
“……흠, 흠.”
박순은 기다렸다는 듯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화폐 주조권에 대해 아직 명확하게 소관을 가진 곳이 없는데, 때마침 내수사에서 막대한 양의 구리를 매입하고 있다니 무능하고 우매한 신들이 성상 전하의 깊고 깊으신 심모원려를 알지 못하여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옵니다.”
박순이 뒤늦게 털어낸 본심에 왕은 예법도 치워버리고 따졌다.
“이봐, 내가 언제 나만 좋자고 돈 번 적 있나?”
박순은 지지 않았다.
“만일 내수사에서 주조권을 가진다면 신들은 꿔다놓은 보릿자루나 다름없는데 나라의 녹을 부당하게 먹고 있으니, 염치가 있다면 관직을 내려놓고 물러가서 나라의 태평성대나 즐기는 것이 옳을 것이옵니다!”
자신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재!
이런 상황에서 버티지 않으면 영의정을 지낼 명분이 없었다.
모든 신하가 왕의 위엄 앞에 굴복할 때 오직 그만이 의의와 의문을 제기해 왔고 주조권을 어느 기관이 가지느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수사는 왕의 사유재산!
만일 그들이 화폐 주조권까지 가진다면 막대한 경제력에 더해 팔도강산, 아니 십도강산을 쥐고 흔들 터!
주조권은 반드시 나라의 기관이 가져야 했다.
“화폐의 신용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내수사에서 주조하는 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는데, 무엇이 불만이란 말인가?”
“불만이 아니라 걱정이옵니다. 화폐는 나라의 대업인데 내수사에서 주조권을 가진다면 도의에 어긋나지 않겠사옵니까?!”
“뭐래는 거냐, 영의정도 내수사 어음으로 재산을 보관하는 주제에!”
흑역사가 오픈되자 박순도 맞불을 지폈다.
“성상 전하께서는 욕조를 물이 아니라 내수사 어음으로 채우신다는 말이 도성에 나다니고 있사옵니다!”
“흑색선전이다!”
“내부자의 증언이 있었사옵니다!”
“……욕조에 물 대신 돈을 채워보는 것은 사나이라면 한 번쯤은 가질 법한 꿈 아니냐?!”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