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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41화 (24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41화

84. 신성한 의무 (1)

“한 식경 뒤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도착합니다.”

군관이 보고했다.

시마즈가 선단을 띄웠다는 소식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도 선단을 띄웠다. 목적은, 당연하지만 시마즈의 수군을 격멸하는 것.

큐슈 영주들은 조선이라는 강대한 세력의 침공에 서로 죽일 듯 싸워대던 역사도 잊고 연합을 결성했다.

류조지는 당주가 죽었으나 그를 따르는 잔당들이 남부에서 저항하고 있었고, 오토모 당주는 아비가 조선의 편에 붙었음에도 소속을 명확히 하지 않고 있었다.

조선에 굴복할 생각이 없다고 봐야겠지.

이 틈을 타 조선의 배후를 찌르고자 선단을 띄운 시마즈 놈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격멸해야 할 대상이었다.

“적들이 병력을 상륙하기 전에 해상에서 격멸해야 한다. 속도를 높여라.”

“알겠습니다. 들었나! 통제사께서 속도를 높이랍신다!”

군관의 외침에 감판 아래에서 울리는 고수의 북소리가 빨라졌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바다 위에 민간인 함선이 늘어났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바다를 가르지 않고 물 위에 멈춰있었다.

구경꾼들이다.

“놈들에게는 전쟁도 한낱 구경거리에 불과하군.”

“단순히 유흥거리는 아닐 겁니다. 누가 어떻게, 얼마나 이기느냐에 따라 무역의 향방이 달라질 테니까요.”

“원한다면 보여줘야지. 이 땅의 미래를.”

“통제사 영감. 보십시오. 선박 하나가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이순신은 망원경을 펼쳤다.

접근해 오는 선박은 열도의 전형적인 소형선인 세키부네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다. 열도 선박이 즐비하게 오가는 나가사키 해역은 정탐선이 뻔뻔하게 돌아다니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아군이네.”

이순신의 말대로 세키부네는 선단에 합류했고 선원 중 하나가 선측의 그물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외양은 그가 타고 있던 배만큼이나 전형적인 왜인이었으나 나오는 말은 아주 자연스러운 조선어였다.

“보고드리겠습니다, 통제사 영감.”

“말하게.”

“도진 선단이 하도(下島, 시모시마)를 타고 북상하고 있습니다. 규모는 안택선이 넷, 관선과 소조선을 합쳐 백 척입니다.”

“첩보대로군. 하지만 첩보와 사실은 언제라도 다를 수 있지. 수고했네.”

“아닙니다.”

보고를 마친 정탐병은 물러나 자신의 배로 돌아갔다.

곧 마주칠 적들이 왜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마찬가지로 왜선인 정탐선들이 전장에 끼어봐야 오사나 당할 뿐이었다.

“진형을 학익진으로 변경한다. 그리고 중군장에게 전해라. 전투가 시작되면 적진으로 돌격해서 안택선들부터 노리라고.”

이순신의 명령에 기수들이 색색의 깃발을 흔들어댔다.

이에 일자진으로 항행하고 있던 거북선과 판옥선들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고수들의 북소리와 수군들의 목소리가 울어댔다. 이제 진짜로 전장에 들어섰다는 느낌이다. 과연 맞은편에서도 거대한 선단이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군.”

조선군에는 장손포라는 무지막지한 병기가 있지만 해전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정확도가 낮아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바다 한가운데의 작은 표적을 맞추기란 불가능했다.

즉, 해전은 정직하게 치러야 했다.

거북선이라는 신형 전선이 큰 힘이 되겠지만 이론대로 기능할지는 미지수다. 이번이 첫 실전이었으니까.

훈련대로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할 수밖에.

-삐이이이이…….

적진에서 효시가 울었다. 그리고 커다란 북소리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돌격 명령인가? 작은 함선들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에 맞춰 중군장의 거북선들도 적지로 돌진했다.

적들은 화살을 쏴대며 저항했으나 장갑을 두른 거북선은 고작 화살 따위로 저지할 수 있는 함선이 아니었다.

-꽝!

폭음과 함께 나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거북선 하나가 정면의 관선을 들이받은 채 그대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마치 사람이 돌진하는 황소에게 치이는 광경이 저러할까.

거북선은 충각에 관선을 꽂은 채로 돌격을 이어나가 또 다른 적함을 들이받았다. 사람이 튕겨나가고 사람이 비산했다.

그와 동시에 거북선의 현측에서 대포가 우르르 나왔다.

-꽈과과과광!

-꽈과광!

-꽈과과광!

연기가 거북선을 자욱하게 뒤덮을 동안, 포탄은 적함들을 덮쳤다.

흘수선에 직격당한 적선들은 순식간에 배가 기울었고 수병과 왜병들은 물 위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콰광! 꽈과광!

심지가 다한 비격진천뢰의 작렬탄이 적선 속에서 폭발했다.

참나무나 소나무처럼 무겁더라도 단단한 목재를 이용하는 조선군 선박과는 달리, 왜선들은 가볍고 그만큼 내구력이 약한 녹나무와 삼나무를 썼다.

그런 나무는 비격진천뢰의 폭발력을 감당할 수 없다.

갑판과 현측이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고 적선은 선수와 선미만 남긴 채 바닷속으로 처박혔다.

이순신은 저릿한 고양감을 느꼈다.

적지에서 들려오는 발악적인 고함과 비명소리 하나하나가 전장의 승기를 누가 쥐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통제사 영감, 방포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거북선들이 적진을 뚫기 전까지는 안 돼! 기다리게!”

기다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북선들이 후방의 안택선들을 노리러 적 선단을 헤치고 나가자, 이순신은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방포하라!”

-꽈과과과광!

학의 날개에서 무수히 많은 포탄이 적지로 날아갔다.

새카만 포연이 시야를 뒤덮었고, 이순신과 수군들은 서둘러 반대편 현측으로 뛰어갔다.

그와 함께 판옥선도 한쪽 노만 움직이며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한쪽 현측이 사격을 마치고 장전할 동안, 배를 돌려 반대편 현측을 노출해 전투를 지속한다.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만이 가능한 전술이었다.

“놈들이 산 채로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꽈과과광!

포성이 전장을 때릴 때마다 쇠공이 적선을 덮친다. 해풍이 포연을 씻어낸 다음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잔해만 남아버린 적선이다.

하지만 놈들의 수도 만만찮았다.

살아남은 적선들은 잔해와 물 위에서 구조를 청하는 우군을 헤치고 판옥선 선단으로 돌진했다.

판옥선에서도 포격만 아니라 조총병들의 사격으로 적을 저지했으나, 결국 적선들은 현측을 들이받고 도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현측을 기어 올라온 왜병들을 맞아주는 건 공포에 젖은 양 떼가 아니라 두 개의 날카로운 꼬챙이를 가진 당파였다.

-콱!

당파가 안면에 찍힌 왜병은 즉사해 물 위로 떨어졌다. 풍덩.

이따금 면갑을 쓴 무사들도 측면에 달라붙었으나, 체중을 실어 찍어대는 꼬챙이의 위력은 얇은 면갑이 당해낼 정도가 아니었다.

산발적인 총성 사이로 고함과 비명이 뒤섞였다. 이순신은 만일에 대비해 칼자루를 쥐었다. 하지만 뽑을 일은 없었다.

왜병들의 공세는 잦아들었다.

놈들은 무한하지 않았고 판옥선의 화력과 방어력을 극복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실패한 공격이 남기는 것은 잔해와 시체, 패배뿐이다.

기세 좋게 조선 수군에 달려들었던 왜 선단은 잔해만 남아 바다 위에 둥둥 떠다녔다.

저 멀리 적지에서는 거북선들이 여전히 종횡무진하며 잔당을 처치하고 있었다.

판옥선에 견줄 유일한 함선인 안택선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디로 갔을지는 뻔하다. 전부 물속에 처박혔겠지.

“전의를 잃은 적병들이 선측마다 몇 명씩 붙어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군관이 물었다.

“일단은 구해주되 무장해제하고 포박해 둬라.”

“알겠습니다.”

전투는 끝났다.

주변에 모여 있던 민간선들은 볼일이 끝나서인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법 볼만했나?

그들도 이제는 알았을 거다. 구주는 조선이 지배한다.

* * *

“봤나?”

서양인이 물었다.

바다 앞에서 벌어진 수전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고 결과를 모르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조선이 이겼더군.”

“큐슈 맹주로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시마즈마저 이렇게 꺾이다니.”

시마즈가 아무리 독종이라도 주력이 분쇄됐는데 멀쩡할 리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큐슈 대영주의 마지막 보루였던 시마즈의 대패는 류조지 잔당과 오토모 가의 처신에 큰 영향을 줄 터였다.

두 세력이 곱게 조선에게 항복하지 않고 버티던 이유도 시마즈의 존재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큐슈는 조선의 손에 떨어지겠군.”

상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조선은 열도인과 서양인의 무역을 방관하고 있었다. 여전히 정복 단계인 큐슈에서 행정을 수립하고 법치를 이행하기는 어려우니까.

하지만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큐슈는 온전히 조선의 지배를 받게 될 터였다.

주민들은 반 토막 난 세금과 진정으로 끝이 보이는 전쟁에 조선을 반겼으며, 장차 열도가 안정되면 세율을 계속해서 낮추겠다는 약속까지 있었기에 새로운 지배자에 대한 지지는 숭배에 가까웠다.

자, 이제 상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마치 큐슈 잔당들에게 남은 선택지가 조선에 항거하다 절멸당하거나, 혹은 순순히 항복하여 목숨과 가문이라도 보전하는 것 둘 중 하나인 것처럼.

상인들 역시 조선에 줄을 잘 대어서 각종 이권을 챙기느냐, 혹은 발 빠른 사람들이 다 해먹을 동안 멍청하게 있다가 개털이 되느냐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상인들은 셈이 빠르다.

다음 날, 나가사키에 모여 있던 상인 절반이 사라졌다.

* * *

히라도 섬.

열도의 중심이었던 무역항은 군항으로 개조되었다.

지역의 경제가 마비되었으나 반발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군납도 제법 쏠쏠한 장사인 데다 혁명사상에 경도된 주민 상당수가 원정대에 합류해 고향의 경제를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시마즈의 수군을 일방적으로 격파하면서 히라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도원수 대감, 상인을 자처하는 자들이 입항하여 대감을 직접 뵙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군관이 보고했다.

“다들 마음이 급하군.”

“어찌하시겠습니까?”

“우리와 거래해 오던 군납업자들도 섞여 있겠지? 놈들만 들어오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도원수 을룡은 손을 모으고 자리에 늘어졌다.

최근 조정에서 방대한 사업을 하나 착수했다. 화폐 유통이다.

본토의 경제는 내수사가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으니, 내수사가 전면에 나선다면 유통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다.

문제는 화폐 주조에 들어가는 금속이었다.

철은 무게 대비 가치가 낮아 화폐로 쓰기 어렵고, 반대로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은 가치가 너무 높았다.

오직 구리만이 적절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제는 조선 땅에는 구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원수 대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눌한 조선어였다.

군납업자들이겠지.

히라도에서 대 서양 무역을 전담했던 상인들은 원정군이 진주하자 업을 바꾸어 군에 필요한 물건을 중개, 공수해 납부했다.

군에서도 특정 물자들은 현지에서 공급받는 게 유리했으니 원정군과 군납업자들은 상부상조하는 관계인 셈이었다.

그러니 을룡은 군납업자들에게 먼저 기회를 주기로 했다.

대조선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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