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240화 (240/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40화

83. 화폐국 감자 (2)

“영의정의 지적은 적절했네.”

흔한 것은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

감자를 위해 쌀을 마다할 사람은 없으나 세상에는 상황이라는 게 있다.

가을에 거둔 쌀이 한 해를 나기에 부족하다면 대체제와 교환하는 수밖에 없다.

이미 논을 가진 자작농들도 쌀을 잡곡과 교환해 식량과 생활비를 확보한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이런 환경에서 기존 곡물들과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척박한 토지에서 압도적인 생산량을 과시하는 감자는 쌀의 강력한 대체재였으며 식량의 가치 자체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감자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식량 사정이 개선되면 쌀의 입지도 이전만은 못할 걸세. 극단적인 비유지만 모래는 아무리 모아도 예산으로 쓰지 못하네. 이전과는 다른 경제단위가 필요하다는 뜻이지.”

“포목은 어떻사옵니까?”

“곧 포목의 가치도 쌀처럼 떨어질 걸세. 아니, 식량이자 우등재로서 최소한의 수요는 보장되는 쌀보다 훨씬 심한 추락을 겪겠지.”

오늘날 재화의 생산은 가내수공업 단위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물리와 기계학을 연구하고 있다. 영구적 동력인 바람과 강물을 이용할 방법에 대해서 무수히 많은 제안이 나오고 있었다.

이제 재화의 생산은 인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많은 품과 시간을 소요하는 작업이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적, 방직은 기계가 인력을 대체할 첫 대상이었다.

포목은 항상 부족했던 과거와 달리 원한다면 언제든지 찍어낼 수 있는 물건이 되겠지.

오히려 설비의 과잉 투자로 몰락하는 사람들도 무수히 생겨날 거다. 이전이란 상상도 못하는 세상이 도래한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네. 현물은 자연과 시장의 흐름에 전적으로 노출되어 있어. 정부가 개입해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하네.”

“하오시면…….”

박순은 굳이 말을 잇지 않았다.

왕이 바라는 것은 단순했다.

전조에서도 존재했으나 곧 문란해져서 나라의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고,

세종대왕께서도 강압적으로 유통을 시도하였으나 반발만 사고서 철회할 수밖에 없었던.

“화폐다.”

“……!”

제신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침을 삼켰다. 화폐는 지난 왕조와 선대왕들도 시도하였으나 결말이 좋지 않았다.

과연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

왕은 신비롭고 파격적인 존재였다. 그는 모두가 불가능하리라 믿었던 일을 성사해 냈다.

그런 왕의 치세야말로 화폐 유통을 시도하기에는 최적의 시기였다. 금상이 아니라면 누가 화폐를 정착시킬 수 있단 말인가? 언제?

호의와 기대 어린 반응이 많았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난 선대왕들께서도 여러 화폐를 유통하려 하였으나 결과는 좋지 못했사옵니다. 감자가 세미의 가치에 혼란은 가져오겠으나, 쌀의 수요가 없어지지는 않을 터이옵니다. 화폐를 시행하는 것은 과한 대응이지 않겠사옵니까?”

세미의 가치 하락을 지적한 박순이었다.

“언젠가는 시행해야 할 일이네.”

“꼭 지금일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화폐 유통을 시도하는 것은 나라의 경제를 뿌리부터 바꾸는 일이었다.

여러 선대왕이 화폐 유통을 시도했으나 결말은 오직 실패뿐이었으며 그 뒤를 재화와 인력의 낭비, 강압에 대한 반발과 화폐에 대한 불신, 그리고 경제의 몰락이 따랐다.

“경은 두려움이 많군.”

“의정의 당상으로서 만일을 걱정하는 것이옵니다.”

“나는 이전의 왕들과도 다르고 환경도 이전과 다르다.”

“화폐 유통을 시도했던 모든 선대왕과 전조의 왕들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겠사옵니까.”

“이 나라에는 영의정 같은 사람이 꼭 있어야 해. 하지만 나 같은 사람도 꼭 있어야지.”

악셀이 없는 차는 쓸모가 없고 브레이크가 없는 차는 금속제 관짝이다.

하지만 차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악셀이 움직여야 한다.

“제신 중에서는 내수사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진다고 우려를 표하는 자들이 많네. 나도 부정하지는 않지.”

나랏일과는 별개로 나는 배후에서 내수사의 규모를 길러왔다.

옆집 아저씨보다 촌수가 더 먼 왕족 놈들에게서 땅을 압수하고, 신용 검사가 수반되는 저금리 대출로 곡식을 해마다 새것으로 갈았다.

북방에서는 대 여진족 거래로 은을 긁어모았고, 여진족 사회에서 은값이 올라가면 반대로 은을 팔아 막대한 현물 자산을 챙겼다.

농사는 종자 연구소에서 개량한 씨앗으로 지었고 광산 개발이 가속화되자 금은광 발견에 막대한 현상금을 때려 전국팔도의 귀금속 광산을 내수사에 편입했다.

해마다 막대한 양의 초석을 군기시에 기부하고,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력과 시설을 갖춘 병원을 무상으로 운영하며, 대학을 유지하고 병자와 약자들이 자립하도록 도울 수 있는 부는 그렇게 나온다.

왕이라는 사람이 국부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서 관직자와 민간 양쪽에서 지지까지 빨아먹으니 냉정한 자들은 한 마디씩이라도 우려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들은 알아야 하네. 권력과 부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그것이 어떻게 쓰이냐가 중요하며, 누가 휘두르느냐가 중요하지.”

나는 그런대로 옳은 방식으로 권력과 부를 이용해 왔다고 생각한다.

“화폐 유통에 내수사가 전적으로 협조한다면 어떻겠나?”

내수사는 단지 돈만 많은 게 아니었다.

광범위한 영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서 경제적으로 활동했다. 그 영향으로 시전 상인들은 내수사 어음을 고액화폐 대신 쓰고 있었다.

엄청난 부를 가졌으며 왕의 사유재산이기도 한 내수사가 지급을 보장하니 떼일 염려도 없고, 막대한 부피와 무게를 가진 현물보다 운송과 보관이 편리하기 때문.

크기와 형태, 순도가 일정하지 않은 쇄은은 한 번 내수사 어음이 통용되기 시작하자 빠르게 배제되었다.

“내 생각에는 내수사가 나서면 화폐경제를 실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군.”

이전처럼 국법으로 강제하고 강요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경제의 주역들은 화폐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신뢰성이 보장되고 편의성만 충분하다면 자발적으로 화폐를 받아들이겠지.

유통 역시 나라의 힘이 아닌 백성들의 손으로 이루어질 거다.

과거의 시도들이 실패한 원인은 이러한 절차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내수사에서 나서면 승산이 없다고는 못할 것이옵니다.”

그동안 조심스러웠단 박순도 결국 인정했다.

남들 앞에서는 말하지 않았으나 그 역시 재산 일부를 내수사 어음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소작세가 들어올 때마다 창고들이 미어터져 땅을 사들이기 전에는 창고부터 증축하는 것도 질린 탓이었다.

창고를 증축하면 그것으로 끝인가? 새파란 것들이 영의정이 되어서 탐욕을 부린다며 찔러대는 통에 남들 눈치까지 봐야 했다.

그건 알음알음 부를 축적한 당상 대신들도 매한가지였다.

“좋아. 경들이 협조하겠다니 좋군. 자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전 회의에서 진행하도록 하세. 이 자리는 즐기자고 만든 것이니까.”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짝짝 쳤다. 그러자 숙수들이 상을 안고서 경회루로 들어섰다.

-덜컥.

박순의 앞에도 새로운 상이 놓였다. 하나의 접시에 여러 음식이 함께 담겨 있었는데, 전부 주재료가 동일했다.

감자.

하지만 방금 맛보았던 감자와는 달리 풍기는 냄새도 범상찮았고 색색의 양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았다.

왕이 말했다.

“보다시피 전부 감자로 만든 요리일세. 귀한 사람들 모아놓고 고작 찐 감자만 내놓을 수야 있나. 다들 들게.”

박순은 어전에 예를 표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맛보기로 한 음식은 굵게 채 썰어 튀긴 감자였다.

-바삭!

감자튀김을 물자 기름의 은은한 단맛과 감자의 미미한 고소함, 그리고 소금의 간이 어우러져 호사스러운 맛을 냈다.

맹탕이었던 감자가 튀긴 것만으로도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다니?

식감마저 좋았다!

곁에서 왕이 말했다.

“종지의 붉은 양념에 찍어 먹어보게.”

박순은 기꺼이 감자를 양념에 찍었다.

이번에 왕이 내온 요리는 진정으로 왕의 연회 다운 음식이었고, 그가 권하는 방식으로 먹어봐서 손해될 것은 없었다.

-바삭!

혀끝에서 느껴지는 진미에 박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콤달콤한 양념이 튀김의 기름기를 중화해주고 식욕도 돋웠다.

속으로 감탄을 느낀 박순이 조심스럽게 어좌를 향해 말했다.

“무엇으로 만든 것이옵니까?”

“토마토라는 채소로 만든 걸세.”

“조선의 토산이 아니로군요.”

“맞네. 서양인들이 큐슈에 가져온 것이지. 아직은 연구소에서 아직 재배법을 연구하는 중이라 당분간은 보기 힘들 터이니 많이 먹어두게.”

“허어어.”

박순은 쓰게 침음했다.

“입맛이 없을 때마다 밥에 비벼 먹으면 확 입맛이 돌 것 같은데 아쉽사옵니다.”

“어……. 어오오. 그걸 밥에다 비벼 먹겠다고?”

“그래서는 아니 되옵니까?”

“아니. 안 되는 법은 없지. 다 사람 취향 아닌가. 단지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는 못해서 말이야.”

왕은 평소답지 않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하고는 권했다.

“정 경이 원한다면 밥 위에 케찹을 뿌려서…… 줄 수도 있네만.”

“신하로서 어찌 염치상 전하께 부탁드릴 수 있겠사옵니까?”

“내가 밥 한 그릇 못 주겠나.”

왕은 곁의 내시를 불러 조용히 속삭였다. 그 모습에 영의정 곁에서 식사하고 있던 우의정 이이가 물었다.

“밥은 어찌하여 찾으십니까?”

“이 빨간 양념을 비벼 먹으면 제법 진미일 것 같아서 말일세.”

“소관도 전하께 부탁드리면 밥을 주실까요?”

“그러시게. 빨간 양념을 당분간 보기 어렵다니 지금은 격식을 차려봐야 손해일세.”

짧은 대화가 오가고, 결단을 내린 이이는 왕에게 눈빛 공격을 보냈다. 왕은 알았다는 투로 내시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자 점차 붉은 양념을 뿌린 밥, 아니 케찹밥에 흥미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곧 모두가 케찹을 밥에 비벼 먹게 되었다.

곳곳에서 호평이 이어졌으나 왕은 자신의 케찹밥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 * *

열도의 무역 중심지 히라도가 조선에게 넘어갔다.

상인들은 보다 안전한 무역항을 찾을 필요성을 느꼈고 대안으로 나가사키를 선택했다.

육지와 연결되어 작은 내해까지 감싸고 있는 나가사키는 천혜의 무역 허브였다.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들은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앞으로 큐슈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도 떠들어댔다.

환경이 바뀌면 장사의 방식도 바뀌기 마련.

그들도 영주나 호사가들 못지않게 정국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이 노부나가가 폭사한 직후 개입했다는 건 이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다는 거야.”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저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얼마나 가졌다고.”

“왜관에서 막 돌아온 사람을 아는데, 언젠가부터 열도의 사정을 수소문하는 자들이 늘어났다더군.”

“오토모 요시무네는 조선에 순순히 항복할까?”

“제 아비가 조선에 붙었는데 항복해야지. 말이야 당주라지만 소린이 실권도 쥐고 있고 가신들의 지지도 받는데 제 혼자서 어떻게 하겠는가?”

“어쩌면 이번 기회를 이용해 아비에게서 독립할지도 모르지.”

“현명한 선택은 아닐 것 같군.”

삼삼오오 모인 상인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정세에 대한 근황과 자신의 판단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들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시점에서 정세에 대해 논하는 자들이 있었다.

“조선이 이토록 강한 나라였을 줄은 몰랐군.”

“저 탐욕스런 땅딸보 원숭이들이 우리를 속인 거야.”

서양 상인 중 하나가 신경질적으로 왜인 상인들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대외적으로 조선은 명나라의 속국이자 별 볼 일 없는 미개 국가로 알려져 있었다. 상인들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들은 현지인들의 말만 듣고 조선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조선은 선단을 이끌고 등장해 큐슈를 차근차근 정복해가고 있었다.

미개 국가?

하!

그런 미개 국가에게 정복당하고 있는 열도는 뭐란 말인가.

“이봐들!”

상인 하나가 사색이 된 채로 나타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시마즈가 선단을 보냈다는군! 조선도 마찬가지야!”

상인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남쪽을 장악한 시마즈와 북쪽을 장악한 조선의 수군이 맞붙을 장소는 오직 한 곳뿐이다.

중심에 있는 나가사키 앞 바다.

바로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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