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39화
83. 화폐국 감자 (1)
장손포가 떨어지자 적의 군세는 증발했다. 그들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지가 토하고 남은 갈색의 촉촉한 흙만 보일 뿐이었다.
“이게 끝인가?”
이억기가 중얼거렸다.
당혹스러웠다.
이것보다는 격렬한 전투를 예상했으니까. 제장과 원정군, 왜인으로 이루어진 해방군도 마찬가지였다.
소린이 감상을 드러냈다.
“졸자가 병사를 이끄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주제넘게 참견했습니다만, 보아하니 부원수께서는 여유를 부리셔도 될 것 같군요.”
“빈정대는 건가?”
“반백 년의 인생이 대단히 긴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놀라본 적은 난생처음입니다.”
“딱히 놀라움을 표한 것 같지는 않은데.”
“너무 놀라서 역설적이게도 놀라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방금, 부원수께서는 백 년의 내전을 애들 장난으로 전락시키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이 정도는 예상하지 못했네.”
그건 제장과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이게 다냐는 투로 당혹해했다.
전의와 무용을 증명하긴 어렵겠군. 이억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린을 바라보았다.
능글맞은 늙은이였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철저하게 구경꾼으로서 전쟁을 관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전 당주로 있었던 대우 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대우 가 역시 평정의 대상이었다.
만일 소린에게 복심이 있다면.
“고향으로 가고 싶으면 가도 좋네.”
이억기는 담담하게 말했다.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라는 뜻이었다. 소린이 물었다.
“고향이 좋았다면 왜 바다 건너 조선을 찾았겠습니까?”
“이제는 돌아오지 않았나.”
“마음은 한성에 두고 왔습니다.”
“입만 산 건가?”
“아닙니다. 합리적인 선택이지요.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아들이 졸자를 가두고 조선과 맞선다면 대우 가는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늘그막에 자식이라도 볼 생각인가?”
“사실 몇 년 전에 새 아내를 맞았습니다.”
반 백 년 나이에 무슨 추태란 말인가.
이억기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한참이나 거두지 않았다. 그동안 소린은 빙글빙글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 쪽은 이억기였다.
“사태가 격화되기 전에 아들을 어떻게 설득할지나 생각하게.”
“당분간 대우 가를 떠나긴 했지만, 졸자에게 충성하는 가신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아들이 과욕을 부려 내우외환(內憂外患)을 자초할 정도로 멍청하다면, 죽더라도 별수 없지요.”
“냉정한 성격이군.”
“열도에서 냉정하지 못한 사람은 잘 죽었습니다. 이제는 조선과 맞설 정도로 멍청한 사람만 죽겠지만 말입니다.”
“부디 열도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높았으면 좋겠군.”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억기는 음, 하고 침음을 흘렸다.
소린과 한 번 대화를 시작하면 이상하게 만담처럼 굴러갔다. 꼴에 대영주 노릇도 해본 자라고, 자신을 놀리는 게 틀림없었다.
“당분간 사적인 대화는 줄이도록 하세.”
“앞으로 벌어질 전황에 대해 공적으로 논의하던 중 아니었습니까?”
이억기는 그냥 입을 닫았다.
적과의 전투는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부상자는 한 명.
단 한 명!
그마저도 구경하던 열도 출신 자원자가 폭발에 놀라 졸도한 것이다.
영지민들은 새로운 주인의 등극을 두 팔 벌려 환호했다. 거리에는 조선에서 왔다는 신문들이 바닥을 그득그득 메운 채였다.
이억기는 열도에서 원정과는 별도로 공작이 펼쳐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배후라 해봐야 왕밖에 더 있겠나?
합리적인 추측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 * *
경회루.
왕이 제신들 앞에서 말했다.
“내가 경들에게 준비한 음식이 있지.”
꿀과 카라멜을 뿌린 떡와플은 왕이 총신에게만 허락한다는 진미의 단편이었다. 그런 왕이 연회를 주재한다니 신하들은 잔뜩 기대했다.
하지만 이들은 몰랐다.
왕은 누군가의 기대를 배신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었다.
모두의 앞에 흙색의 덩어리가 놓였다.
“……?”
박순은 모락모락 김을 풍기는 덩어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수염이 여기저기 난 것을 보니 뿌리채소임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확실한 것은 눈앞의 덩어리가 전혀 맛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건 무엇이옵니까?”
“감자일세.”
“처음 들어보옵니다.”
“익숙해져야 할 걸세. 먹는 방법은 간단하네. 쪄서, 입에 때려 박는 거지.”
왕은 시범을 보여 주겠다며 젓가락으로 감자를 쿡 찍었다. 그리고 들어서 한입 물었다. 갈색 껍질 안에 부드러운 연노란색의 속살이 드러났다.
신하들도 뒤따라 감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촉촉한 식감과는 정반대로 건조하기 짝이 없는 맛이 입을 한가득 메웠다.
“전하.”
박순이 감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주…… 진귀한 맛이옵니다.”
이렇게나 맛이 없는 건 난생처음이라는 돌려 깎기였다.
맛이 거부감이 들 정도로 이상하지는 않다. 단지 말 그대로 맛이 없을 뿐이다. 축축한 덩어리가 입안을 한가득 메우고 돌아다니는데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흙 반죽을 씹어도 이것보단 맛이 있으리라.
“영의정, 솔직하게 말해도 좋네. 맛없다고 말이야.”
“전하께서 하사하신 음식에 어찌 투정을 부릴 수 있겠사옵니까. 하나, 특별한 맛이 느껴지지 않기도 하옵니다.”
“제신들의 생각도 같은가?”
왕이 주변을 둘러보며 묻자 제신들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접받는 입장에서 투정을 부린다는 건 예의가 아니다. 하물며 왕이 마련한 자리에서 불편을 드러낸다는 건 자신의 안위에도 도움 되지 않는 짓이었다.
하지만 신하들은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처럼 느릿느릿 턱을 움직였다.
마치 씹고 있는 게 감자가 아니라 인생에 대한 회한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일세. 아마 짐승에게 던져 주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걸세.”
“……그런 감자를 신들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이옵니까?”
박순이 물었다.
짐승도 먹지 않을 것을 당상 대신들에게 나눠 주다니.
이런 것도 먹지 못해 굶는 백성의 어려움을 통감하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왕은 성공했다. 맹탕의 감자를 무기력하게 씹어대는 것만 한 고통도 없었으니까.
“종자 연구소에서 시험한 결과 감자는 척박한 땅일수록 더 잘 자란다고 하네. 즉, 주식인 쌀을 기르기 힘든 땅에서도 상당량의 식량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지.”
감자의 특징 때문이다.
쌀과 같은 곡물은 질소가 충분한 토양에서는 단백질 함량이 두 배로 증가하고, 부족할 때는 성장이 지연되고 잎이 황색으로 물들며 괴사하는 데 반해…….
감자는 질소가 충분한 토양에서는 열매가 부실하게 자랐다.
그래서 척박한 땅에서 소출이 늘어나는 기이한 작물이었다.
“생산성을 최적화하면 단일 면적에서는 산지에서도 저지대의 벼보다 더 많은 식량을 얻을 수 있네.”
“……!”
박순을 포함해 신하들은 대가리를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쌀은 나라의 근간이 되는 곡물이며 조세의 중심이 되는 곡물이다. 다른 곡식이나 식량은 과세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쌀의 아성을 위협할 감자라는 작물이 도래했다. 경제기반이 흔들린다고 거부할 수는 없다. 식량 증산이 전근대 국가에 주는 영향은 막강하다.
인구가 곧 국력인 시대다.
“어찌 이런 작물이 북방에만 묻혀 있었단 말입니까?”
“낸들 아나. 여진족들의 농사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애들 장난 수준이니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는지도 모르지.”
돌덩어리처럼 단단한 감자는 어디에 던져둬도 잘 자랄 것 같지만, 실상은 외강내유의 연약한 영혼을 소유한 작물이었다.
물러짐, 무름병, 터짐, 갈라짐, 반점, 변색 등.
이런 일들이 보이는 흙 위가 아니라 안에서 벌어진다.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아차리기도 어려웠고 이유를 알기란 더더욱 어렵다.
쌀농사는커녕 구황작물조차 근근이 농사짓는 여진족들이 재배할 수 있겠는가.
놈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다. 아마 할 짓 없는 조상들이 무수히 시도했다가 좌절하는 꼴을 보고는 포기했는지도 모르지.
“하오시면…….”
“감자 종자들은 이미 강원도와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로 보냈네.”
구황작물은 아니지만 감자는 최적화를 통해 생산성과 보관기한을 증대할 수 있었다.
전자는 열매의 씨앗을 이용한 정직한 농사가 아니라 씨감자를 분할 해 심는 것이다.
이는 감자의 유전자 풀이 통일되어 질병에 더욱 취약해진다는 단점이 발생하지만, 양주목에 종자 연구소가 있었다.
다들 까먹었겠지만 초석밭을 만들 때 종자 연구소도 같이 지었다.
보관은 감자의 전분 성분만 추출해 굽거나 건조함으로서 가능하다.
이론상 철저하게 수분이 제거된 녹말 덩어리는 반영구적인 보관 기간을 가진다.
보관기술이 형편없는 이 시대에도 최소한의 관심만 가져준다면 1, 20년은 너끈히 버틸 거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군인들의 식단 변화는…….
“흠흠. 내 말은, 경들은 이제 내가 저지른 일을 정리해야 한다는 거지. 이 나라의 기축통화가 두 개가 될 테니 말이야. 아, 이건 너무 수준 높은 농담이었나?”
“무슨 뜻인지는 짐작할 수 있사옵니다.”
“이해했다니 다행이로군. 제주도는 감자 파종을 한겨울에 하니까 그 전에 필요한 정책을 확립하게. 직무유기를 한다면 죽을 때까지 코로 감자를 먹여주지.”
연회랍시고 불려 나온 신하들의 얼굴이 참담함으로 젖어갔다.
코로 감자를 먹인다니! 창의성이 도를 넘긴 고문이었다. 차라리 맛있기라도 하면 덜 고통스럽겠으나 감자는 맛까지 없었다.
게다가 겨울에 파종한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전하, 어떻게 겨울에 싹을 틔울 수 있단 말입니까?”
“겨울에 피는 꽃도 있는데 싹은 왜 못 틔운단 말인가. 설마 쉰내 나는 유교적 세계관을 나나 감자에게 강요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자연물에 불과한 감자에게 신이 무언가를 강요할 수도 없거니와, 단지 겨울에 싹을 틔우는 작물은 신이 처음 접해보아 묻는 것이옵니다.”
“약간의 과학, 창의성. 그리고 나의 위대함이 함께한다면 안 되는 일은 없네.”
“아……. 예에.”
박순은 더 묻지 않기로 했다.
확실한 건 감자는 맛이 없으며 이걸 한평생 먹을 바에야 조세제도나 제때 개혁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도 살짝 들었다.
운하의 완성과 종자 연구소의 존재로 세율의 변화 없이 세입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세입이 전량 쌀 위주의 곡식이라는 점이었다. 만일 감자가 대대적으로 보급되어 굶어 죽기 어려울 정도로 식량이 늘어난다면, 과연 세입으로 거둔 쌀들의 가치가 어떻게 될까?
“영의정,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나. 말년에 새로 들일 첩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전하.”
“왜?”
“신은 첩을 들이지 않았사옵니다. 소신이 무슨 좌참찬입니까.”
첩질로 명성 높은 좌참찬 심수경이 헛기침을 해댔다.
부끄러운 줄은 아나 보다.
“첩 생각이 아니면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인가?”
“감자가 보급되면 인구와 세입이 늘어나더라도, 식량의 가치가 떨어져 결과적으로는 세입이 줄어드는 형국이 되지 않겠사옵니까.”
“헉.”
“……?”
“허억!”
왕은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숨을 삼켰다. 예상치 못했다는 뜻일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다더니 왕이라고 다르지는 않은 듯했다.
“전하, 서둘러 대응을 강구한다면…….”
“아니! 대안은 이미 있네.”
왕이 선을 긋자 박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오시면 어째서 놀라셨단 말씀이십니까?”
“영의정이 너무 기특한 소리를 해서 말이네. 내가 왕이 된 이래로 지금처럼 뿌듯한 적이 없었어. 역시 영의정을 하는 사람은 달라도 뭐가 다르군!”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서 당연히 나라의 향방에 대해 고심해 봐야지 않겠사옵니까.”
박순은 겸양하며 내색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무척이나 뿌듯했다.
신하들을 놀리기만 하며 바보로 만드는 왕이 누군가를 이토록 인정해 준 적이 있던가?
“흠흠.”
박순은 다들 자신을 본받으라는 듯 허리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