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38화
82. 멋진 신세계 (3)
우의정 이이가 꺼낸 사람 팔 너비만 한 두루마리의 정체는 지도였다.
방대한 크기의 지도에도 중신들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진짜’ 세상이 그려져 있었다.
“도대체…….”
이전의 지도에서는 저 혼자 2/3를 차지했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닌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 다음으로 크게 그려져야 할 반도에는 이름도 적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름이 들어갈 공간조차 없었다.
박순이 중얼거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왕이 말했다.
“오, 말이 되지. 지금 경들이 보는 것들이야말로 그대들이 애써, 또는 직무유기로 마다했던 진실이라네.”
“오랑캐들이 중화를 능멸하기 위해 지도를 왜곡해 그린 것이옵니다!”
“그동안 지도를 왜곡해 온 건 조선이었네. 저들은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 왠지 아나?”
“…….”
“저들의 나라가 세상 전부라 믿기보단, 차지해야 할 나머지 세상이 드넓고 방대하다는데 희열을 느끼거든.”
중국과 한반도는 저들이 세상의 전부라 믿었다. 지금에 만족하고 안주해왔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지도에서 단색으로 칠해진 것들은 모두 한 나라의 땅일세. 떨어져 있다고 다른 나라인 것이 아니라.”
“전하, 그건 과장이 심하옵니다.”
“눈앞에 펼쳐진 진실을 거부할 수 있는 것도 강함의 일종이지만, 나라를 경영하는 신하라면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인정하는 강함을 가졌으면 좋겠군.”
“…….”
“후, 이래놓고 나를 전적으로 믿고 따를 기회를 달라니.”
왕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박순은 입술을 말았다.
지도에는 두 개의 색상이 세계를 반분하고 있었다.
중심을 기준으로 하나는 왼쪽을, 하나는 오른쪽에 칠해져 있었는데 바다 사이에 떠 있는 세상 하나하나가 명나라가 몇 개는 들어가고도 남았다.
이것이 세상의 진짜 모습이란 말인가?
오랑캐들이 저들 나라의 영화를 과장하고자 농간을 부린 게 아니라?
하지만…… 놈들의 서적은 조선에서는 접할 수 없는 방대한 지식이 담겨 있었다. 그림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빼곡하게 쓰인 글자 하나하나가 귀중한 정보이리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왕이 말했다.
“나랏일하는 사람의 진정한 강함은 나를 알고 적을 알며 필요할 때는 허리를 숙이고 비굴한 척을 연기하여, 적의 지식과 기술을 받아들여 종내에는 맞설 힘을 가지는 것이지. 경들 생각은 어떤가? 구차해지기에는 목이 너무 뻣뻣한가?”
* * *
“정녕…….”
류조지 마사이에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채 소요사태를 정리하기도 전에 외부에서 군세가 나타났다.
놈들의 문양은 한평생 접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새빨갛게 물들인 바탕에 노란색으로 자두꽃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왕가의 성인 이(李)는 자두를 뜻한다.
“정말로 조선군이란 말이냐……?”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정작 이화문을 나부끼는 적의 군세는 전형적인 열도의 양식을 하고 있었다.
마사이에는 조선의 사정은 몰랐으나 그들의 군대가 열도와는 다르다는 것은 알았다. 역시, 놈들은 진짜 조선군이 아니다.
마사이에는 놈들의 수작에 당하지 않기로 했다.
“도노!”
가신 하나가 문 너머에서 외쳤다.
“그래, 나도 보인다! 출병을 준비해라!”
성은 물론 일대 영지에도 소요사태가 가시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동요하는 영지민들을 징집하는 건 상책이 아니었고, 이들을 이끌고 성을 나서는 것은 더더욱 상책이 아니었다.
이를 모를 마사이에가 아니다.
그는 조선군을 사칭하는 마츠라의 군대를 모두의 앞에서 격파할 생각이었다.
면전에서 환상이 깨지는 것을 본다면 정신을 차리겠지. 소요사태가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 주동자들을 거리에서 참하면 반란도 빠르게 종식될 거다.
“알겠습니다.”
무사는 절도 있게 답하고는 물러났다.
마사이에는 벽장의 문을 열었다. 남만식의 매끈한 흉갑을 가진 은백색 광택의 갑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전장에서는 이만한 전우도 없었다. 마사이에는 투구를 꺼내 썼다.
잠시 후.
류조지 마사이에는 일군을 이끌고 출병했다. 맞은편의 ‘자칭 조선군’은 우매한 영지민들을 꾀기 위해서인지 지겨운 그 노래를 불러댔다.
-우리의 성전에 동참하겠나? 굳건히 견뎌내겠나?!
-억압 너머에는 꿈꾸던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병력의 근간인 족경(足軽, 아시가루)은 영지민 징집병들이다. 마사이에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들의 동요와 혼란이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전투를 회피하는 자들은 베어라.”
“예, 주군!”
“하찮은 해적 놈들에게 류조지의 무서움을 보여 줄 때다. 방패와 남만산 대포를 앞세워라! 적들이 사거리 안에 들어면 즉시 발포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방패가 전진했고 대오 사이에서는 새카만 대포가 길쭉한 포신을 드러냈다.
남만인들은 자신들의 대포를 작은 매(Falconete)라고 불렀다. 놈들에게도 농담은 있었다.
수많은 해적이 남만 상인들이 가진 화물을 약탈하고자 시도했지만 ‘작은 매’가 갈겨대는 포화에 조금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수장됐다.
조총보다 족히 열다섯 배나 긴 사거리를 가진 이 무지막지한 대포는 영주들에게도 매력적인 무기였다.
마사이에는 거금을 들여 남만 상인에게 대포를 조금씩 구매해 왔다.
원래는 오토모나 시마즈와 결판을 낼 때 비장의 수로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멍청한 영지민들에게 류조지의 막강함을 가르쳐주기 위해서라면 미리 대포의 성능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리고 맞은편에서는.
“대포로군.”
부원수 이억기(李億祺)는 망원경 너머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무재를 가졌던 그는 고작 10대에 무관이 되었고, 빠른 진급 끝에 고작 21세가 되어 종삼품 도호부사에 이르렀다.
어린 사람이 잘 나가면 주변의 시기를 많이 사기 마련이다.
그는 능력과는 별개로 상관에게는 자신의 뒤를 빠르게 치고 오는 부하였으며, 부하에게는 가문이 좋아 거저 요직에 오른 애송이에 불과했다.
이억기는 자신을 둘러싼 오해에 종식을 고하고 싶었다.
곧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목욕재계하고 왕에게 서찰을 올려 간청했다. 죽어 뼈가 진토가 되는 한이 있어도 좋으니 전장에 보내달라고.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이 단순히 혈통과 운 때문이라면 죽음으로서 해명할 것이고, 아니라면 승리로 입증하겠지.
왕은 이억기의 각오에 답해주었다. 고작 20대 초반의 청년에게 부원수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긴 것이다.
‘차마 부원수는 바라지 않았으나, 전하께서 맡기셨으니 승리로 증명하고 보답해드릴 뿐이다.’
이억기는 망원경을 접었다.
“종린, 저 대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원정군은 오모토 소린을 대동했다. 직함 하나 없는 고문역에 불과했으나 큐슈의 대영주였던 그는 일개 제장 이상의 발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억기는 오토모 소린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다른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적과 동류이자 현지에도 세력이 있는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참고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오토모 소린이 답했다.
“남만산 대포입니다. 포탄이 최대 천 이백 보까지 날아가지만 탄환과 화약을 낭비할 생각이 없다면 팔백 보가 한계입니다.”
“상당하군.”
“어디까지나 최대 사거리일 뿐입니다. 그리고 조선군이 가진 장손포는…….”
최대 이천 오백 보의 사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남만산 대포의 사거리가 아무리 길어도, 발사체에 추진체가 달린 로켓의 사정거리를 이길 수는 없다.
게다가 운동력을 잃으면 그저 쇠공일 뿐인 포탄과 달리 장손포는 폭약이 탑재된 로켓이다.
운에 기대보겠다면 적이 볼 수도 없는 곳에서 갈겨도 무방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생각보다 시시한 전투가 될 것 같군.”
“유능한 장수는 시시한 전투에서도 조금도 안심하지 않으며, 싸움이 끝난 뒤에도 승리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앞일을 걱정하기 마련입니다.”
“맞는 말이로군.”
“졸자가 아무리 일개 왜인에 지나지 않더라도 전장에서의 경험은 부원수께서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부정하지는 못하겠군.”
“왜병들의 지휘를 맡겨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대가 전적으로 아조에 충성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질문 자체를 안 하는 게 좋을 걸세.”
“필요하시다면 언제라도 졸자를 쓸 수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그런 일 자체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하지.”
소린과 만담을 끝낸 이억기가 말했다.
“장손포를 장전해라.”
전쟁을 개시하는데 장손포만한 녀석도 없었다. 사거리 길지, 검은 호선이 그려내는 장광도 좋지, 요란한 폭발은 적의 예봉과 사기를 꺾기에 최적이었다.
효시는 구시대의 퇴물이었다.
-끼릭, 끼릭, 끼릭……
장손포가 대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팔뚝 만한 장손포의 포탄은 취급과 장전이 어려웠다. 이를 틈타 적이 찔러온다면 위험했다.
이억기는 다시 망원경을 펼쳤다.
‘반응하지 않는군.’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적장은 부채를 여기저기 흔들며 떠들어대고 있었으나 병력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독전을 하는 건가.
하기야 이런 거리에서 공격을 당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다. 군문에 몸을 담았던 이언적도 장손포의 위력을 체감하기 전에는 믿기지 않았으니까.
“부원수 영감.”
부르는 소리에 이언적은 망원경을 접고 전열을 확인했다.
장손포 포수들이 장전을 마치고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억기는 멀찍이 떨어진 그들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쳤다.
“방포하라!”
그 외침과 함께,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장손포가 울었다.
창공을 가로지르는 새카만 연기는 보통의 장손포와 다를 바 없었다. 이억기는 적진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 망원경을 들었다.
구경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당연히.
지휘관으로서 전장에서 유흥이란 있을 수가 없지.
‘다들 고개가 올라가는군.’
망원경 너머에서 적들은 얼굴을 치켜든 채 하늘의 호선을 구경했다. 당해본 적이 없는 무기여서인지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적장마저도 의아한 표정만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호선이 접근하다.
뒤늦게 적진에서 소란이 벌어지며 사람들이 피신하기 시작했다. 적장도 기수를 돌렸지만,
-꾸궁…… 꾸구궁……!
묵직한 폭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이언적은 망원경을 거두었다.
고작 몇 초 전만 해도 멀쩡히 있던 수천의 군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있었던 자리에는 대지가 토하고 남은 갈색의 촉촉한 흙만 보일 뿐이었다.
가까스로 폭발을 피한 적병들이 흩어지는 모습만이, 적군이 마술처럼 증발한 게 아님을 입증하고 있었다.
“이게 끝인가?”
이억기가 중얼거렸다.
당혹스러웠다.
이것보다는 격렬한 전투를 예상했으니까. 제장과 원정군, 왜인으로 이루어진 해방군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방포하라!’ 한 번 외쳤다고 전쟁에서 이길 것 같으면 목청이나 가다듬지 전쟁 준비랍시고 요란은 왜 떤단 말인가.
곁에서 소린이 감상을 드러냈다.
“졸자가 병사를 이끄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주제넘게 참견했습니다만, 보아하니 부원수께서는 여유를 부리셔도 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