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37화
82. 멋진 신세계 (2)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이 망원경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엄청난 반응입니다.”
동승한 중신들도 감탄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영의정 박순이었다.
처음 박순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재가 도성을 가벼이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은 모든 것을 알게 해주는 대가로 이순신의 선단에 탑승하기를 원했다.
꺼림칙한 조건이었다.
박순은 왕이 전쟁 수행에 걸림돌이 되는 자신을 전장으로 보내 조정에서의 발언력을 차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불미스러운 사건을 유도했거나.
그러나 박순은 왕에게 의심 없이 믿겠노라 말했다. 절규에 가까운 부탁이었으며 절박한 선언이기도 했다. 그래놓고 뒤늦게 말과 행동을 달리할 수는 없었다.
지난 몇 주는 착잡하기 짝이 없었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런 전쟁이라도 정의로울 수 있단 말인가?”
열도의 인간들은 사납고 야만적이며 서로를 쳐죽이나 악질적이고 한심한 취미나 가진 미개인들이라 생각했다.
나아가 애써 점령하더라도 북방의 여진족처럼 두고두고 반란이나 일으킬 골칫덩어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정작 마주한 저들의 무역항은 한성 최대의 항구인 마포나루보다 발전하고 호화스러웠다.
그리고 왜인들은 조선군의 원호에 무역항에서 까마득한 선상까지 환호가 들릴 정도로 기뻐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말했다.
“열도의 세율이 적어도 7할은 된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아조의 지배를 이토록 반기는 것이겠지요.”
“나는 과장이라고 생각했네. 어떻게 7할을 거두고도 백성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8할이나 9할도 가져가는 영주도 흔하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군량미를 모아 군수물자를 사거나, 인부를 부리거나, 전쟁하는 데 쓴다더군요.”
“열도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거둔 곡식으로 밥 한 끼 먹기 위해서 매번 영주의 부림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허어.”
박순은 탄식했다.
“미개함이 도를 넘었군, 넘었어. 위정자라는 자들이 백성을 보살필 생각은 추호도 아니 하고 어찌 전쟁에만 몰두한단 말인가?”
“그러니 전하께서는 우리를 보내신 게 아니겠습니까.”
박순은 쓰게 침음했다.
선단에는 분조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지체 높은 당상관들이 여럿 타고 있었다.
다들 왕의 복심을 듣고자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왕은 그들에게 목숨을 걸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단지 자신이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
그는 정당한 전쟁은 없다고 했으나, 왜인들에게 조선의 군세는 그 누구의 군세보다 정당했다.
그리고 전쟁의 명분을 궁금해하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 * *
-민중의 노래가 들리나?
-분노한 자들의 노래가?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으려는 민중의 음악이네……
정체불명의 노랫소리가 성 밖에서 끊임없이 울렸다.
다들 미쳐가고 있었다.
거리마다 조선에서 밀수한 신문이 백 배, 천 배로 불어나 바닥을 메웠고 영지민들은 조선군이 열도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찾아왔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고 헛소리였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계림과 열도는 남남처럼 지내왔다. 갑자기 조선군이 큐슈에 등장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류조지 당주 마사이에는 그렇게 판단했다.
“도노!”
정면의 문이 열리며 병사가 나타났다. 만신창이도 그런 만신창이가 없었다. 등에 꽂은 가문기도 꺾인 채였다.
그가 외쳤다.
“보고! 영내 소요사태를 진압하러 간 이에타네 님께서 저격을 당해 패사하셨습니다!”
“고작 소요사태에 말이냐? 게다가 저격이라니!”
총을 비롯한 중요한 군수물자는 성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반란군 따위가 조총이 어디서 난단 말인가.
나올 구석이 전혀 없지는 않다.
조총을 만드는 장인, 무기를 거래하는 남만인.
하지만 놈들은 소수다. 그리고 성 아래 영지에 불안한 조짐이 보였을 때부터 민간의 모든 무기를 압류하고 외부인은 쫓아냈다.
당연히 반란군 따위가 쥐고 있을 조총은 있을 수가 없었다!
“조총 소리가 우군의 것이 아니었단 말이냐!”
가신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잇키(一揆, 봉기)들도 무기를 확보한 것 같습니다.”
“네놈! 당연한 소리나 지껄일 셈이냐? 내가 궁금한 건 어디에서 무기가 났냐는 거다!”
“상인과 호족들이 잇키에 동조해 숨겨둔 무기를 푼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마사이에는 입술을 씹더니 분통을 터뜨렸다.
“진정으로 조선군이 와서 세금을 반분해주리라 믿는단 말이냐?! 이따위 허무맹랑한 소리에 반란이나 일으키다니, 우매한 놈들!”
“마츠라에 파견한 간자가 해상에서 생소한 양식을 한 선단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는데, 진정으로 조선군이 상륙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선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조짐도 없이 다짜고짜 침공한단 말이냐? 분명 마츠라의 농간이다!”
크고 작은 섬이 즐비한 큐슈 북부는 해적과 상인의 소굴이었다. 알음알음 조선의 소식 정도는 들어온다.
그들이 북방에 영토를 개척해서 난항을 겪고 있다는 소문은 질릴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큐슈를 쳐들어온다고? 농간도 정도껏 이다!
마사이에의 판단은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정상적이기도 했다.
문제가 있다면 옆에서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하고 낄낄댈 인간이 없었다는 것이겠지.
마사이에는 합리적이지만 사실은 아닌 생각에 빠진 채 확인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해적 두령 놈이 명줄이 다 되어가니 아예 판을 뒤엎을 생각으로 헛소문을 퍼뜨리는 거야! 최후까지 지저분한 놈 같으니라고!”
마츠라가 아직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도에 자리 잡아 정복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놈들 역시 고작 섬 몇 개 쥐고서 큐슈로 나올 수는 없었다. 머지않아 큐슈의 패자가 탄생하면 (당연히 류조지 가가 패자가 되겠지만) 놈들의 역사도 끝이었다.
그러니 비참하게 최후를 맞기 전에 판을 엎으려는 거다.
마사이에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멍청한 영지민들은 냉정하게 생각할 줄 모른다. 조선군을 자칭하는 마츠라의 농간에 놀아날 뿐이다.
놈들이 부르짖는 달콤한 감언이설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북소리로 메아리칠 때,
-내일이 오면 시작될 새로운 삶이 있네…….
* * *
“민중의 노래가 들리나, 분노한 자들의 노래가…….”
어전의 왕은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중얼거리며 손톱의 때를 파더니 후, 하고 불어 날렸다.
그가 뻔뻔한 거야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으나 제신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왕은 단순히 뻔뻔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귀환한 영의정 박순이 말했다.
“전하.”
“응? 말하게.”
“전하께서는 모든 것을 알려주시는 대가로 신들에게 알고 계시는 바를 알려주시기로 약조하셨사옵니다.”
“그랬지.”
“감히 전하께 채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열도를 다녀왔으니 알고 계신 바를 알려주시옵소서.”
왕은 자세를 고쳤다.
“경들은 직접 가서 두 눈으로 진실을 목도한 줄로 아네만.”
“예. 왜인들은 전하의 군대에 두 팔 벌려 환영했사옵니다. 과연 신들이 예상한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사옵니다.”
“그 정도로 충분하지 않았나?”
“전하께서 신들보다 멀리 보고 계셨음을 알았사옵니다.”
왕이 했던 말처럼 정말로 ‘만만한 놈부터 조지자’는 식으로 열도에 군세를 보낸 게 아님은 알았다.
설령 통일된 열도가 합심하여 침공한다는 것이 기우에 지나지 않더라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고 야만인들을 계몽하는 것은 문명국의 의무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남아 있사옵니다.”
“경은 욕심이 많군.”
“나랏일에 대해서라면 최대한 욕심을 내는 것이 신하의 올바른 태도인 줄로 아옵니다.”
“흠, 부정할 수 없군.”
왕은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무엇을 원하나?”
“전하께서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 궁금하옵니다.”
“매력적인 남자는 비밀이 많은 법이지. 아, 그렇다고 영의정이나 중신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생각이 있다는 뜻은 아니고.”
“신들은 진지하옵니다.”
“알았네, 알았어.”
왕은 어좌의 옆쪽을 바라보더니 대동한 내시를 불렀다. 내시가 다가가자 왕이 무언가 속삭였다. 그마저도 비밀스러웠다.
박순이 입술을 말아 내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자 왕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게.”
“예.”
그리고 정말로 잠시 후, 내시들이 상자들을 어전에 내려놓았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무엇이긴, 통제사가 보낸 전리품이지.”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셨단 말씀이시옵니까?”
박순이 물었다.
“전쟁은 명분보다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하지만 이 자리에 가져온 것은 단순히 재물이 아닐세. 애초에 재물이나 얻자고 벌인 전쟁도 아니고.”
전적으로 예방전쟁의 의도를 갖고 벌인 일이었다.
열도의 통일은 반드시 방해해야 한다. 땅 한 조각마저 적이 되어 돌아올 테니까.
나아가 큐슈는 조선반도로 향하는 최적의 기항지다. 대마도는 대군을 수용할 여유가 없다.
나아가 큐슈가 조선의 영역이 된다면 열도는 반도 침공에 앞서 큐슈 탈환부터 시도하겠지. 전쟁은 적지에서 벌여야 하는 법이다.
박순이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져오셨단 말이옵니까?”
왕은 대답 대신 팔을 뻗어 권했다.
박순은 상자 무더기로 나아가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책들과 두루마리가 무수히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무엇이옵니까?”
“보이는 대로일세. 경들이 보았던 무역항에서 털어온 것들이지. 제신들도 멍청하니 서서 구경만 하지 말고 확인해보게. 내가 무엇을 챙기고자 했는지. 경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싶었는지.”
이에 호기심이 동한 신하들은 기꺼이 몰려들었다.
오랑캐들의 도서에 배울 만한 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싸움에서 이기지 않겠나.
그런 합리화로 책을 펼쳐 든 중신들은 침음을 흘렸다.
생소한 언어들은 읽을 수 없었으나 삽화들은 신하들이 한평생 접해보지 못한 신비한 정보와 장면을 담고 있었다.
어떤 책은 인간의 해부도가 노골적으로 그려져 있기도 했다. 고인의 유해에도 예를 다하는 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인체 해부도가 귀중한 정보임을 간과할 정도로 무식한 사람은 없었다.
“이것들은 도대체.”
책과 두루마리를 뒤적거리던 신하들 사이에서 쓰디쓴 탄성이 나왔다.
“뭐요, 우의정?”
“지도인 듯합니다.”
우의정 이이가 꺼낸 사람 팔 너비만 한 두루마리의 정체는 지도였다.
방대한 크기의 지도에도 중신들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진짜’ 세상이 그려져 있었다.
“도대체.”
이전의 지도에서는 저 혼자 2/3를 차지했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닌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 다음으로 크게 그려져야 할 반도에는 이름도 적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름이 들어갈 공간조차 없었다.
박순이 중얼거렸다.
“이건,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