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36화
82. 멋진 신세계 (1)
제신들은 물고 있던 틀떡을 툭 떨어뜨렸다.
만만한 놈부터 조져보자니?
왜를 공격한다는 것은 예방전쟁이라는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있었지, 이제는 무력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란다.
이게 명나라 다음가는 문명 대국의 군주가 할 소리란 말인가.
“다들 너무 놀라는군.”
“전하, 군사를 쓸 때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법인데 어찌 정당한 이유도 없이 이국을 치자고 말씀하시옵니까?”
“이만하면 정당한 이유 아닌가?”
“무력을 시험하겠다고 이국을 공격하는 것은 절대 정당한 이유가 아니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절대적으로 그렇사옵니다.”
박순이 힘주어 답했다.
전쟁과 싸움을 좋아하는 야만인들도 자신의 힘을 시험하고자 이웃을 침공하지는 않을 거다.
왕은 조선을 그런 야만인보다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하고 있었다.
“문명은 강한 나라의 특권일세. 자신의 이익과 안녕을 지킬 힘이 없는 자의 예법이란, 송양지인(宋襄之仁)처럼 비웃음거리일 뿐이지.”
왕이 말을 이었다.
“반대로 야만성은 약소국가의 특권일세.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조선은 문명 대국이옵니다, 전하!”
“내 기준에서 조선은 문명국도 아니고 대국도 아닐세. 그랬던 적도 없지.”
“전하! 아무리 전하께오서 방대하고 눈부신 업적을 세웠다고는 하나, 전부 선대왕들께서 기틀을 세워두셨기에 가능한 일들이옵니다!”
“경은 시야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도 몰라. 그러니 무지가 자신감이 되어주는 걸세.”
한평생 유학자로서 책을 손에 놓지 않은 박순에게는 자존심이 많이 상하는 말이었다.
어전이었지만 박순은 노골적으로 항의했다.
“전하께서는 신들의 의문을 단 한 번도 속 시원히 풀어주신 적이 없으시옵니다! 어찌 전하께서는 신들과 다른 위치에 서서 신들에게 같은 광경을 보지 못한다고 질책하시옵니까?”
박순이 성토에 비해 왕의 대답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말해줘도 믿지 못할 걸세.”
언제나 그랬듯이 왕은 여유로웠다.
그리고 뻔뻔했다.
박순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밥은 잘 먹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였다. 전쟁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에서도 왕이 비밀을 즐겨서야 되겠나?
자존심 상한 늙은이로서만이 아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으로서도 용납할 수 없었다.
박순은 진지하게 말했다.
“만일 신들이 의심하지 않고 전적으로 믿겠다면, 하교해주실 의향은 있으시옵니까?”
“경은 어떤가. 나에게 해명을 강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믿을 각오는 하고 물어보는 건가?”
“신이 사람인 이상 어떻게 일말의 의심도 들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하나, 신들에게 전하를 전적으로 믿고 따를 기회를 주시옵소서.”
“좋아. 원한다면 기회를 주지.”
대신들의 눈에 결의가 서렸다.
왕이 덧붙였다.
“하지만 먹다 남긴 건 마저들 드시게. 아까우니.”
방금의 대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웃으며 손까지 젓는 왕이었다.
* * *
큐슈는 혼란에 빠졌다.
정신 나간 낭설이 일대를 뒤덮었다. 조선의 지배가 시작되고 세율이 절반으로 줄어들며 지겨운 전쟁도 종식될 것이라니!
헛소문도 정도가 있었다.
족히 수백 년 동안 남남이었던 계림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열도에서 지배를 시작하겠다는 말인가?
다분히 미친 소리였다.
영주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영지민들은 달랐다.
내전을 거듭하며 삼대와 일가친척의 사내들이 전장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가을 소출은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8, 9할이 강탈당한다.
분란을 종식하고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주인, 전 주인, 전전 주인, 그리고 무수히 많은 이전 주인들의 감언이설에는 지쳤다.
불타오르는 들판에 내리는 비는 맛과는 별개로 달콤하다. 큐슈에 퍼지는 헛소문은 합리성과는 별개로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그리고 마냥 헛소문만도 아니었다.
조선의 신문은 큐슈에서도 알음알음 유통되었고 영지민들은 조선의 영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열도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들이었다. 비교 대상이 생기자 죽고 죽이는 잔혹무도한 세상에 마모되어온 영지민들조차 항거의 의지가 생겨났다.
기회는 혼란 속에 피어나는 법.
무수히 많은 사람이 대의, 또는 이익을 위해 각지에서 근본이라곤 하나도 없는 ‘친 조선’ 반란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히라도 섬.
“영주들은 저들의 권세와 안락을 위해 우리의 목숨과 고혈을 갈취해왔다!”
상자를 켜켜이 쌓아 만든 연단 위에서 한 중년의 사내가 외쳤다.
주변에는 영지민들이 가득했다. 모두 한껏 성이 난 기색이었다. 그들은 환호하자 연단의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들은 평화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지난 백 년 동안 진정으로 평화를 위해 애쓴 사람이 있었나? 모두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쟁취하고자 우리들을 착취하고 전장으로 내몰았다!”
“와아아아!”
“우리는 지쳤다! 당할 만큼 당했다! 이제 해방이 아니라면 죽음을 달라!”
“와아아아아아아!”
연단을 중심으로 환호가 터져나갔다. 그리고 심장에서 뻗어 나간 혈관들이 맥동하듯 반란군이 가득 찬 무역항의 거리마다 환호가 뻗어 나갔다.
매일 항구를 오가던 남만인들은 격화되는 반란에 피신한 지 오래.
이제 섬에는 오직 두 부류만이 남았다.
새로운 질서를 원하는 자들과 무너져가는 시대의 끄트머리에 선 자들만이 남았다.
“요새를 무너뜨리자! 우리들만의 낙원을 이룩하자!”
“우오오오오!”
반란군은 흑철갑옷을 입기도, 입지 않기도 했으며 일부는 투구만, 흉갑만, 무릎 보호대만 차기도 했다.
무기 역시 왜도에서 장창, 활, 조총 등 갑주부터 무구까지 중구난방이었지만 기세만큼은 남달랐다.
제대로 갖춘 공성 장비도 없이 반란군들은 요새를 향해 달려들었다.
인간의 해안이 몰아치자 요새 안의 영주와 가신들은 적 대신 수하를 베어넘기며 독전했다.
전투는 장장 네 시간이나 이어졌고 반란군의 시체가 해자를 메우고 언덕을 만들었다.
모두가 지쳤다. 노을 아래 반란군은 다음을 기약하며 물러났다. 그런 와중에도 훈도시 차림에 창 한 자루 꼬나쥔 노인 하나가 단독으로 요새에 달려들었다.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그는 최후까지 비장했고 유언은 ‘해방!’이었다.
밤이 되자 반란군 지도부는 회의를 위해 거점에 모였다.
“요새가 강해도 지나치게 강합니다. 요충지에 세워져 규모는 작아도 방어력이 성 못지않습니다. 이대로는…….”
“부정적으로는 생각하지 않도록 하세.”
“예. 단지 피해가 극대화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만일 도노(公, 일본의 극존칭)께서 말씀하신 원군만 제때 도착한다면.”
모두의 시선이 ‘도노’에게 향했다.
그는 가사를 입고 석장을 짚고 있었다. 전형적인 스님의 행색이었다.
열도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곳의 절들은 무력 집단이며 법명을 내세우고도 버젓이 살생을 저지른다.
반란을 이끄는 정도로는 논란거리 축에도 들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곧 새로운 시대가 도래합니다. 조선이 옵니다. 그들이 군대를 이끌고 와 모두를 구원할 겁니다.”
어눌한 왜어였다. 그러나 확신에 차고 강단 있는 목소리는 스님이 아무 데서나 굴러들어온 어중이떠중이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반란군 지휘자 중 하나가 말했다.
“도노, 만일 공성이 한두 번만 더 실패하더라도 해방의 기세가 크게 꺾일 겁니다.”
이미 한 차례 요새 함락이 좌절되면서 반란군들 사이에는 회의적인 생각이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기류쯤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애초에 공성의 실패가 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도노가 말했다.
“이러한 난세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실 분들은 늦지 않게 도착할 것이며, 모두가 두 눈으로 목도할 수 있을 겁니다.”
막연한 말에 반란군 지도부는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물은 이미 엎지른 뒤였고 믿을 사람은 모두에게 해방과 구원을 외친 정체불명의 스님뿐이었다. 뒤늦게 의심을 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오리라고 확신합니다. 단지 희생이 더 늘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곧 그대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도노. 안녕히 주무십시오. 졸자들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반란군 지휘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물러났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이 되어.
반란군들은 2차 공세를 위해 무역항에 모여들었다.
어젯밤 짧았던 회의에 참석한 지도부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당당했으나 속은 그렇지 않았다. 영지민들의 저항과 죽음이 도리어 더 큰 고통만 가져오는 건 아닐까.
영주들에게 반란을 철저하게 진압하고 본보기로 삼고자 마을 두엇을 지도에서 없애버리는 것은 고민거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배, 배다.”
“저길 봐…….”
“조선군이야?”
항구에서 소란이 퍼지고 있었다.
반란군 지휘자들은 소란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진원지로 달려갔다.
히라도의 반란 소식을 접하지 못한 남만 상인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조선군이라면.
“엄청난 위용이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마침내 해방이 다가왔다.”
수평선까지 늘어진 방대한 규모의 선단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 하나하나가 열도의 대형 군선인 아타케부네를 능가했다.
개중에는 매끄러운 금속성 지붕을 가진 배들도 있었다. 기이한 형상이었으나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번쩍이는 광경은 사람을 매혹하기 충분했다.
도노라 불리는 스님은 쌓아 놓은 화물 위에 서 있었다.
커다란 깃발을 든 채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형제들! 새로운 시대는 온다!”
스님이 삿갓을 내던졌다. 그가 깃발을 높게 들고 흔들자, 광풍이 불었다. 붉은 바탕에 금빛 이화문이 새겨진 깃발이 위엄차게 흔들렸다.
그에 맞추기라도 한 듯.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수평선에 자리한 선단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아련히 울리고, 짙은 연기로 된 호선이 솟아올라 창공을 가로질렀다.
수십 줄의 검은 연기가 요새로 떨어졌다. 폭음과 진동이 하늘과 대지를 진동시켰고, 드높게 솟아오른 요새의 누각이 폭음과 함께 무너졌다.
왜인들은 두 팔을 들며 환호했다. 목이 찢어지라 내질렀다. 이에 보답하듯 수평선에서 다시 한번 호선이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요새로 향하지 않았다.
단지 하늘을 가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봄철이라도 된 것처럼 하얀 꽃잎이 무수히 흩날렸다. 아니면 여름에 내리는 눈인가?
반란군들은 하늘에서 내린 하얀 조각을 받아들었다. 꽃잎도 눈도 아니었다.
신문이었다.
몇 줄 안 되는 내용이었으나 왜인들은 신문을 높게 들며 외쳤다.
“조선이 절반의 세율을 약속했다!”
“전쟁이 끝나면 본국 기준으로 더욱 세율을 낮추겠대!”
“해방이다!”
“정말로 조선이 우리를 구원했다!”
무역항이 환호로 쩌렁쩌렁 울었다. 혼란에 숨어서 사태를 관망하던 대다수도 나와 인파에 합류했다.
영주들이 서로를 치고 없애며 무수히 많은 영지민의 목숨을 허비할 동안, 영지민들은 죽음만이 끝낼 수 있는 가혹한 군역과 파멸적인 세율을 대대로 견뎌야 했다.
두 가지를 덜어준다면.
영지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주인의 정체나 출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군 선단 기함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이 망원경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엄청난 반응입니다.”
동승한 중신들도 감탄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영의정 박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