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35화
81. 진짜 철갑선 (2)
정사준은 막 내려놓은 장계를 펼치고는 그 위에 손바닥을 쿵 찍었다.
이순신은 시선을 내렸다. 널찍한 장계에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흐음…….”
신형 전선을 구상하라고 했으니 딴에는 신형 전선이겠으나, 이순신이 보기에 도안이 증명하는 것은 정사준이 제대로 미쳤다는 것뿐이었다.
소위 배라고 한다면 어떤 형상을 떠올리건 공통적으로 평평한 갑판을 떠올릴 거다.
그것이 베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다.
딱히 유별난 것도 아니다. 배의 갑판이 평평하지 않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반대로 평평해야 할 이유는 많았다.
정사준이 가져온 도안은 달랐다.
누구도 올라서지 말라는 듯 갑판이 불룩 솟아오른 반원 형태로 되어있었다.
“뭔가?”
이순신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정사준이 답했다.
“배입니다.”
“그래, 배겠지. 자네가 내 앞에 가져올 도안은 신형 전선밖에 없다는 것을 아네. 하지만 이건 내가 아는 배의 개념과는 다르군.”
“수사 영감!”
“말하게.”
“수군이 다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대체로 왜적이 배에 올라타 공격하거나, 배에 올라타는 왜적의 공격이나, 날아오는 화살 따위에 맞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다시 도안을 내려다보았다.
냇가에 던져놓은 서과(西瓜, 수박)처럼 생긴 배는 내부 도식도 있었다. 둥근 부분은 갑판이 아니라 갑판을 덮는 장갑이었다.
“적의 공격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
“그렇습니다!”
정사준이 자신 있게 말했다.
수군절도사에게 특명을 받은 그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신형 전선을 설계할 수도 있었다.
판옥선의 크기를 늘리고 구조적인 단점만 해소해도 그럴싸한 전함이 나왔으리라.
실제로도 정사준은 1안으로 멀쩡한 개량형 판옥선을 먼저 구상했다.
하지만 1안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뻔뻔했다. 무색무미무취의 감흥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단순한 개선에 불과했다.
정사준은 진짜 ‘신형’ 전선을 설계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냇가에서 우연히 남생이를 발견했다.
“거북은 단단한 등껍질을 가져 어떠한 짐승도 해하지 못합니다. 만일 함선에도 등껍질을 씌운다면 능히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배에 관해서는 조예가 깊지 않으나 상부가 무거워진 배가 과연 잘 떠 있을지 의문이로군.”
선박은 무게중심을 낮게 잡는다. 나아가 배 자체의 무게만으로도 부족해서 돌, 자갈, 해수 등을 적재하여 더욱 아래를 무겁게 만들었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선박의 개념 자체와도 같았다.
무게중심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배는 측면을 치는 파도에 무기력하게 뒤집혔으며, 심지어는 선회 시도에도 제풀에 쓰러졌다.
원칙을 거스르려던 모든 용기 있는 시도는 그렇게 배가 드러눕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런데 상부에 둥그런 장갑을 씌워 무게중심과 형태를 교란한 배?
파도 한 번 맞으면 옆으로만 쓰러지는 게 아니라 아주 빙글빙글 돌 터였다.
“우려하시는 바는 압니다. 하지만 선체 하부에 수십 쌍의 대포와 커다란 충각을 배치하면 충분히 상부 장갑의 무게를 상쇄할 수 있습니다.”
“고작 상부장갑을 실현하고자 이런 배치를 한다는 건 비효율적일세.”
“수사 영감. 바다 위의 전술도 육상의 전술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적의 진형을 파괴해 무방비한 상태로 만들고 화력을 투사해 격멸하는 것이지요.”
설명은 그 한 마디로 충분했다. 이순신은 단숨에 깨달았다.
“이 배는 적에게 달려드는 용도로군.”
“그렇습니다! 하부 대포와 충각은 단순히 장갑을 설계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덤이 아닙니다. 돌격선으로 기능하게 만드는 부속이지요!”
해상의 요새로 명성 높은 판옥선도 적이 근접하면 화력이 급감했다.
갑판이 높아 대포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정사준이 고안한 신형 전선은 달랐다. 판옥선의 개념을 반대로 뒤집었다. 멀리서 대포를 쏴 격멸하는 것이 아니라, 적에게 파고들어 대포를 갈길 수 있게 했다.
근접전에서 증대되는 도선 시도와 투사체의 위협은 상부 장갑으로 차단한다.
포각 문제는 아예 대포를 하부에 싣는 것으로 해결했다.
앞에 적이 있으면 충각으로 들이받는다.
정사준의 설계는 상부 장갑을 실현하기 위한 억지가 아니라 돌격선으로 기능하게 하는 완벽한 조화였다.
“배에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이 침수입니다. 구조물은 아무리 파괴되어도 배 자체는 물 위에 뜰 수 있지만, 침수되면 가라앉기 때문이지요.”
“이 선박에서 쏘는 대포는 특히 위력적이겠군.”
“정확합니다. 포의 위치도 낮고 접근해서 쏠 테니, 적함의 흘수선을 맞추는 건 일도 아니지요. 방포 한 번에 적함 하나를 격침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
어설프게만 보였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매력적인 함선이었다. 파격적인 발상이었고 정사준이 유난을 떨 법도 했다.
‘도안대로 설계를 실현해서 바로 건조 작업에 들어가도 되겠군.’
마음은 달았지만 서두르지는 않기로 했다.
수군에서 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하들이 자신보다 직급은 낮아도 짠바람 맞은 밥은 자신보다 몇 달은 더 먹었을 터였다.
실현에 앞서 그들의 평가와 조언을 반영할 필요가 있었다.
“군관이 감히 나의 집무실에 허락 없이 쳐들어왔을 때는 정말로 미친 줄 알았지만, 이제는 이해가 가는군.”
“하하!”
“하지만 처벌은 할 걸세. 군의 기강이 어지러워지는 일은 어떠한 사유로도 용납할 수 없으니까.”
정사준이 당혹한 표정을 짓자 이순신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동시에 공도 포상해야겠지. 신상필벌은 확실해야 하니까.”
“외람된 질문이지만, 굳이 병 주고 약 주실 필요가 있으시겠습니까?”
“자네가 나의 허락을 맡고 들어왔다면 나는 약만 주었겠지.”
이순신은 피식 웃었다.
“나가 보게. 함선을 이대로 실현할지는 제장들과 논의한 다음 알려주지.”
“알겠습니다.”
정사준이 집무실을 떠나자 이순신은 숨겨두었던 주머니를 꺼냈다.
왕이 건넨 서찰이었다. 신형 전선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면 꺼내 보라고 했던 것이다.
이제 설계를 결정하고 건조에 착수하기 직전이니 미뤄둔 서찰을 읽기로 했다. 얻을 것이 있다면 얻어야 하니까.
-사락.
구겨진 서찰이 펴지자 이순신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음!”
절로 침음이 나왔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 서찰의 내용과 그림은 정사준이 제안한 것과 동일했다.
한성의 옥좌에 앉아 어디까지 보았단 말인가.
서찰을 건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왕의 모습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이순신은 우둘투둘 돋아난 팔을 두어 번 쓸어내리고는 서찰을 불태웠다.
* * *
“이게 다 무엇이옵니까?!”
박순이 물었다.
근정전(勤政殿)은 경북궁에서 가장 중요하고 급이 높은 시설이다. 각종 의례가 시행되며 문무백관이 예복을 입고 뜰을 가득 메우는 자리였다.
그런 장소이거늘.
왕은 주변에 조리 기구를 깔아놓고는 숙수들과 요리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간간이 보이던 새카만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앞이 보이기는 하는 걸까?
의문이 드는 사이 왕은 태연히 손을 들어 그를 맞았다.
“어, 왔나. 영의정.”
“전하. 여기는 근정전 앞이옵니다. 어찌 부엌의 잡물을 펼쳐두시고 숙수들이 감히 왕도(王道)를 오가게 두시옵니까?”
왕도란 근정전 뜰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이름 그대로 왕이 오가는 길이었으며 신하들은 함부로 왕도를 밟거나 가로질러서는 안 됐다.
그러나 왕은 태평하게 주변의 빈 소반을 가리켰다. 앉으라는 투였으나 소반 옆에는 정오품 품계석이 떡하니 세워져 있었다.
정일품 대신인 영의정이 위치할 자리는 아니었다.
놀란 건 주변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의정부에 모여 지지부진한 논의를 이어가던 중, 내시의 전언을 듣고 우르르 몰려나왔으니까.
“하오나 전하.”
“왕명일세, 영의정. 무슨 잔소리를 하더라도 일단 협조부터 해주지 않겠나? 내 체면도 생각해 줘야지.”
박순은 입술을 말며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전쟁을 준비하게 만든 당사자가 이렇게 태평하게 기행을 벌인단 말인가.
도통 적응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왕이 친히 명령을 내리는데 무작정 거부할 도리는 없다. 박순은 터덜터덜 발길을 옮겼다. 함께 온 신하들도 주변의 자리를 하나씩 차지했다.
“대신들은 참상관 품계석 옆에 앉고 전하께서는 인군(人君)이 되셔서 숙수들과 함께 요리하다니, 후.”
박순은 한숨을 삼키고는 중얼거렸다.
“신이 죽어서 선대왕들을 뵐 면목이 없나이다.”
“뭐라고?”
박순은 때마침 들리는 왕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과연 왕이 코앞에 있었다.
직전만 해도 뒷담을 가고 있었던 박순은 왕이 들었겠구나, 생각하며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표출했다.
왕이 말했다.
“내가 경과 같은 사람을 위해 준비했네. 바로 틀딱…… 이 아니라 틀떡일세.”
소반 위에 음식 하나가 놓였다. 연갈색의 딱딱한 덩어리에 꿀이 한가득 발라져 있었다.
“이게 무엇이옵니까?”
“내가 경들을 생각하니 틀딱, 이 아니라 틀떡을 대접해주고 싶었네. 최근 들어 전쟁이다 뭐다 해서 다들 여간 고생이 아니잖나.”
왕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숙수들이 잘도 왕도 위에 불을 피우고서 집게로 떡을 굽고 있었다. 집게의 끝에는 둥그런 무쇠 판이 달려 있었다.
눈앞의 떡이 인상적인 격자무늬를 가진 건 그 때문이겠지.
“따뜻할 때 들게.”
“아무래도 소신들을 놀리는 기분이 드옵니다만.”
“내가 언제는 경들은 안 놀렸나?”
왕이라는 사람이 신하를 놀려먹는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시인하고 있었다.
박순은 꿍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지당한 하교이십니다.”
왕이 발길을 돌리자 박순은 이 일에 대해 따지기를 포기했다. 대신 틀딱인지 틀떡인지 모를 음식을 맛보기로 했다.
떡에 꿀을 발라 먹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구워본 적은 없었다.
과연 어떨지.
-와삭
틀떡의 첫인상은 바삭함이었다.
그리고 이가 들어가자 마치 과육이 터지듯이 갓 쪄낸 떡의 쫀득함과 고소함이 퍼져 나왔다.
여기에 깊게 난 격자무늬가 품고 있던 달콤한 꿀이 섞이면서 호화스런 단맛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
맛이 없다고는 못 하겠군.
주변 사람들도 어느새 각자의 틀떡에 집중하고 있겠다, 박순은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틀떡을 해치웠다.
“하나 더 할 수 있겠나?”
왕이 새로운 틀떡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꿀이 아닌 찐득한 갈색의 무언가가 발라져 있었다.
달콤한 향은 꿀과 비슷했으나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이거 하나까지라면…….”
“어차피 마지막일세.”
“감사히 받들겠나이다.”
왕은 새로운 틀떡을 신하들에게 나눠주었다. 정말로 마지막이었는지 숙수들은 예를 표하고 도구를 챙겨 물러났다.
박순은 새로운 틀떡을 물었다.
-와삭!
이번에는 꿀보다 훨씬 끈적하고 짙은 단맛이 났다. 이외에도 약간의 부드러움과 소금기도 느껴졌다. 색다른 느낌의 호화였다.
“떡에 발라진 것이 무엇이옵니까?”
“설탕에 우유를 붓고 한참이나 졸인 걸세. 약간의 소금을 넣어 감칠맛을 더했지.”
실로 예상대로의 재료였다.
다들 입을 채울 동안 왕이 말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경들이 아조의 무력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해 계획 수립에 난항을 겪고 있는 듯한데, 이참에 만만한 놈부터 조져보는 건 어떻겠나?”
제신들은 물고 있던 틀떡을 툭 떨어뜨렸다.
만만한 놈부터 조져보자니?
왜를 공격한다는 것은 예방전쟁이라는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있었지, 이제는 무력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란다.
이게 명나라 다음가는 문명 대국의 군주가 할 소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