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34화
81. 진짜 철갑선 (1)
밤바다로 유명한 여수.
이 시대에서는 행정구역 하나 없이 순천도호부 하의 일개 면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여수 현령 오흔인(吳欣仁)이 조선 개국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행정구역이 없어지는 비극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찌질한 느낌마저 드는 대응과는 별개로, 여수는 조선팔도를 통틀어 손꼽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왜구는 저들의 허접한 배가 뒤집히는 꼴을 면하고자 해안을 위주로 움직였고, 여수는 남해안 중간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전라좌수영도 여수에 있었다.
덕분에 한 사람이 고생하는 중이었다.
‘최북단에 있다가 최남단으로 내려오니 쪄 죽겠군.’
전 용정 군수, 현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다.
여수는 행정구역만 없을 뿐이지 제법 많은 주민들이 버젓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 달라진 것은 터만 남고 사라져버린 관아만이 아닐까.
논밭 사이에 난 줄타기 수준으로 좁은 길 너머로 3장 높이의 솟을대문이 우뚝 세워져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수영의 입구였다.
이순신은 땀을 훔치며 나아갔다.
입구에 다다르자 초병이 길을 막아섰다.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공문을 보이자 초병들은 높으신 분 행차를 막아 송구하다며 물러섰다.
“아닐세. 원칙대로 잘하고 있군.”
안으로 들어선 이순신은 사람부터 불러 모았다.
“이 사람은 최근 전라 좌수영에 수사로 부임하게 된 이(李)일세.”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군관들이 인사를 올리자 이순신은 손을 들었다.
“인사는 차차 하고, 중요한 전언부터 하겠네. 다들 조정에서 왜를 칠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건 알겠지.”
“예.”
“그 일환으로 전라 좌수영에서 신형 전선(戰船)을 건조하게 되었네.”
군관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지난 세월 동안 평화에 젖어 있었던 전라 좌수영이다. 신형 전선은커녕 구형 전선마저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배속된 스무 척 판옥선 전부 원칙상 한참 전에 퇴역했어야 할 물건들이다.
덕분에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었지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미봉책으로 적당히 때우는 식으로 넘겨왔다.
조선?
뗏목 하나 제 능력으로 조립할 수 있는 사람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정확히 어떤 형태의 신형 전선을 건조해야 하는 겁니까?”
군관 하나가 물었다.
조정의 높으신 분들이 친절하게 설계도까지 준비해주지는 않았겠지.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았다. 까라는 대로 깔 수 있도록 방향성이라도 제시해 달라는 거다.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이순신이 답했다.
“정확히 어떠한 형상의 전선을 건조하라는 명령은 없었네. 보다 정확히 말해주자면, 전하께서는 조정의 신하들보다 현장의 사람들이 현재 운용하는 군선의 장단을 잘 알 터이니 개선법도 현장에서 강구하다는 편이 낫다고 하셨지.”
“아, 전하께서 말이십니까.”
군관은 입을 꾹 닫았다.
명령을 내린 사람이 왕이었던 말인가!
막연한 명령이나 내리는 윗선에 대한 불평불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하, 하하하. 소과연 판옥선을 운용하며 느낀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하.”
군관이 멋쩍게 웃자 이순신도 미소 지었다.
사실, 참고할 만한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전하께서 나에게 주신 서찰이 하나 있네.”
“소장들이 알아도 되는 내용입니까?”
“전선을 만드는 데 도움이 필요하면 펼쳐보라 하셨네.”
“서찰대로 만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직 확인하지 않았네. 서찰 안에 무슨 내용이 있을지는 나도 모르네. 하지만 자네 생각처럼 바로 실현할 수 있는 설계도가 있지는 않겠지.”
이순신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아마도.”
아니, 왕이라면 진짜 설계도를 전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요즘 나랏일이 돌아가는 절차는 한결같았다.
세상에는 해결해야 하지만 방도가 마땅찮은 문제가 산재해 있다. 전하께서는 그것을 신하에게 맡긴다.
여태 그래 왔듯 신하들은 쩔쩔매나 진도는 나가지 않는다. 한심한 광경이 펼쳐지며 제신들이 차마 입을 열기 부끄러운 상황이 되면 전하께서 친히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신하들은 왕이 추진하는 일이라면 거의 합죽이가 된 지 오래였다.
몇 마디 붙였다가 자신에게 일감이 떨어지면 두 번 망신당하고 끝나기 때문이다.
해결하지 못해서 한 번, 왕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면서 두 번.
자신도 그 덫에 걸리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었다.
“또 전하께서는 되도록 도움을 받지 말고 좌수영에서 자력으로 신형 전선을 연구해 보라 하였네.”
아마도, 아니 분명 서찰에는 신형 전선을 건조하는 데 크게 도움될 정보가 적혀 있겠지.
이미 완성된 설계도일 가능성도 낮지 않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자신과 좌수영에 기대를 걸었다.
서찰은 전쟁을 앞둔 지금, 서찰은 진도가 나가지 않아 신형 전선 건조가 차일피일 미뤄질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다.
진지한 고려 없이 서찰을 꺼내 확인한다면 전하의 기대를 저버리는 만행이겠지.
이순신에게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수영의 수준부터 확인해 보세. 서찰을 내가 늦지 않게 확인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권관들은 쓰게 답했다.
“수사 영감, 마침 병기에 유별나게 관심이 많은 자가 있습니다. 그를 불러 논의하시면 크게 진전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인가?”
“정사준(鄭思竣)이라 합니다. 함경도에서 성상 전하를 우후로서 보좌한 정 영감의 아들입니다.”
병마우후 정승복.
전하께서 함경도의 병마절도사로 재임하던 중 우후의 위치에서 매질을 당하고, 정신을 차려 성실히 보좌한 자로 명성이 높았다.
현재는 나이가 많아 우후를 끝으로 관직을 내려놓은 상태. 그러나 전쟁의 공으로 정삼품으로 증직 되어 영감의 존칭을 달고 있었다.
“영감의 자제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군.”
이순신은 정승복과 연이 있었다.
왕의 조총 전술을 연구할 때 가장 도움 되었던 사람이 전하를 옆에서 보좌한 정승복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는 사람의 자제라고 곱게 대할 생각은 없었다.
“정사준에게 집무실로 오라 하게. 제장들은 이만 공무를 보러 가도 좋네. 우후는 내가 좌수영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 가져오고.”
“알겠습니다.”
수영의 장수들은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이순신은 다음 일이 생기기 전의 짧은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철저한 원칙주의자라고 일벌레라는 뜻은 아니니까.
잠시 후.
조선반도를 가로지른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수사 영감. 소장 정사준입니다.”
“들게.”
이순신은 자세를 바짝 고쳐 앉고 정사준을 맞았다.
부전자전이라던가. 정사준의 면모에서 정승복의 모습이 어슴푸레 느껴졌다.
아버지를 닮은 꼴이 외모만은 아니었으면 좋겠군. 이순신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우후가 자네를 추천하더군. 수영에서 신형 전선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鄭)이 이런 방면으로는 아주 비상하다고 말이야.”
“비상한지는 모르겠으나 관심은 많습니다.”
정사준은 겸양을 표하면서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지는 못했다.
그는 원 역사에서도 이순신 밑에서 일하며 조선 최초로 조총 복제를 시도한 자였다.
결과물인 정철총통(正鐵銃筒)은 조선에 편입한 항왜들이 조총을 양산해내자 쓸모가 없어졌으나, 적의 신무기를 복제해 우리도 써야겠다는 열의와 탐구의 결과물이었다.
역사가 달라졌어도 이순신에게 인정받은 정사준의 열의와 탐구는 어디로 가지 않았다.
“자네가 전라 좌수영에서 최고 적임자라고 생각해도 되겠나?”
“소장만 한 사람이야 어찌 없겠습니까. 다만 말단으로서 여유가 있으니 맡겨만 주신다면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좋아. 전적으로 지원할 터이니 도안을 만들어 오게.”
“받들겠습니다.”
정사준은 망극해하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가보게.”
“예.”
정사준이 물러나고 우후가 돌아와 문서와 장계들을 한가득 내려놓았다.
이순신은 손끝으로 내용물을 슬쩍 살펴보았다. 변색되고 먼지까지 묵은 것이 딱 봐도 한참이나 방치되었다.
남을 함부로 평가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전임의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임기가 다했다고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돌아가지 않았는가. 단순히 사람이 바빠서 그랬겠거니, 싶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우후가 말했다.
“본영 서고에서 보관하고 있던 공문들입니다. 좌수영 소속 관(官)과 포(浦)에도 막 사람을 보내두었으니 며칠 안에 보고서를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지표의 증감을 확인하려면 이전 보고서도 필요하지 않겠나.”
“족히 일 년은 지난 것들입니다만, 필요하시다면 가져오겠습니다.”
마지막 보고가 고작 한두 달 전도 아니고 족히 일 년은 넘었다니?
이게 말인가 똥방귀인가.
이순신은 빠르게 포기했다.
“아니. 필요 없겠군.”
굳이 문서와 서류를 뒤져보지 않아도 수영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전임 수사는 손을 놓았고 임기만 채우고서 수영을 떠났다. 그동안 방치된 수영이 얼마나 망가졌을까? 차라리 기대조차 하지 않는 편이 나으리라.
나아가 수영의 군관들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수사가 제대로 일하지 않았다면 아랫사람이라도 일을 했어야 했다.
상관의 무능과 방만을 명분 삼아 명령이 없으니 나도 놀겠다, 가 아니라.
이순신은 딱딱한 어조로 명했다.
“가서 일 보게. 그리고 명심하게. 내가 수사로 부임한 이상 좌수영의 군기는 제대로 확립되어야 하네.”
우후는 아주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는지 책임을 인정하듯 고개를 숙였다.
“지금 수영이 이런 상태로 놓인 것은 전적으로 전임의 문제로 생각할 터이니, 우후를 포함해 이해 제장들은 앞으로 실수하지 않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우후가 물러나고 이순신은 공문 무더기에서 장부 하나를 꺼냈다.
풀풀 날리는 먼지에 한동안 손을 휘저은 이순신은 정면의 문을 열어두고서 돌아와 장부를 젖혔다.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드러난 기록은 정확히 이순신이 예상한 대로였다. 그마저도 오래되어 사실상 의미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순신은 무더기의 무의미한 공문들을 빤히 바라보다 쓱 밀어냈다.
* * *
-드르륵.
권관 하나가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의 당당한 걸음걸이에 이순신의 눈이 단숨에 가늘어졌다. 들어와도 되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으니까.
원칙주의자인 이순신에게 이는 반역에 가까운 만행이었다.
“수사 영감.”
“뭐지?”
이순신이 고개를 들어 빤히 바라보자 정사준이 당차게 답했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소장은 천재입니다.”
예상외의 대답이 이순신은 손깍지를 꼈다. 그리고 한참이나 정사준을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집무실에 쳐들어와서는 자신이 천재란다.
이순신은 부하들에게 잘못한 게 있나, 하고 생각했다.
그들을 무관답게 만드느라 다소 힘이 들어간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무관이 무관답지 않아 정상화하겠다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최근에는 태도가 많이 양호해져서 손은 거의 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왜…….
“문제라도 있나? 나한테 불만이 있다던가?”
“아닙니다!”
“권관은 내 집무실에 일언반구나 허락도 받지 않고 쳐들어와 대뜸 자신이 천재라고 선언했는데, 그게 불만 표출이 아니라면 나는 권관이 미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군.”
진지한 결론이었다.
“예! 어쩌면 소장은 미쳤을지도 모릅니다!”
“아, 그런가? 나는 부인할 줄 알았네만.”
자신이 미쳤다고 인정하니 예상치 못한 신선한 전개였다.
정사준은 말이 필요 없다는 듯 품속에서 장계를 내려놓았다.
-탕!
“이걸 보시면 수사께서도 소장이 미쳤다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내가 보기엔 자넨 이미 충분히 미쳤네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내가 조정에 정식으로 면직을 신청해 주겠네.”
“일단은 이것부터 봐주시지요!”
정사준은 막 내려놓은 장계를 펼치고는 그 위에 손바닥을 쿵 찍었다.
이순신은 시선을 내렸다. 널찍한 장계에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