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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33화 (23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33화

80. 불붙이기 (3)

웅성웅성. 와글와글.

나라에서 왕을 제외하고 가장 날고 긴다는 당상관들이 모인 자리거늘 시전 한복판보다 더 시끄러웠다.

소란 속에서 좌의정 노수신이 손을 들었다.

모두가 입을 닫고 노수신에게 집중했다.

“함부로 논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소이다. 게다가 이건 전하께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홍 대감께서 물러나시기 직전에 알려주신 것이외다.”

“홍 대감은······.”

박순은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말았다.

전 영의정 홍섬은 수년 전 노모를 모시고 팔도강산을 유람하러 떠났다.

그러다 재작년에 노모가 타지에서 유명을 달리하자, 홍섬은 그곳에 묘를 세우고 때늦은 삼년상을 치르다 삼 개월 만에 어머니를 뒤따랐다.

노수신이 말했다.

“경들도 아시겠지만 전하께서는 범부와는 본질부터 다른 분이시오. 이건 맹목적인 찬양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는 말이외다.”

당상대신들은 부정하지 못했다.

왕은 그들과는 달랐다. 본질적으로 무언가가.

노수신이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그대들에게 확실하게 전할 수 있는 말은, 전하께서는 하루아침에 왜를 칠 생각을 하신 게 아니라는 거요.”

우의정 이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순이 물었다.

“홍 대감에게 달리 들은 건 없소?”

“그가 의금부에서 갇혔을 때 신비로운 일을 겪었다는 게 다요.”

“신비로운 일?”

“전부터 전하를 모시던 사람들만 먹을 수 있었던 진귀한 음식을 대접받았고, 흔들면 따뜻해지는 주머니까지 받으셨다는구려.”

“흔들면 따뜻해지는 주머니? 그게 도대체 뭐란 말이오?!”

자다가 봉창을 두드려도 유분수지 대가리가 절로 띵해지는 소리였다. 박순이 이마를 짚자 노수신이 담담히 답했다.

“이 사람도 자세한 말은 듣지 못했소이다.”

“하”

박순은 한숨을 내쉬며 참담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메마른 입술을 한참이나 핥았으며, 가라앉은 좌중 속에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얼마나 기상천외한 인물이셔도, 우리는 범부요. 그러니 범부에 맞게 합리적이고 합당하게 생각합시다.”

영 껄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박순이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이제 와서 멍석을 깔고 통촉을 외치더라도 함께 할 사람도 얼마 없을 테고, 의미도 없겠구려.”

“전하께서 지금처럼 강경하게 의견을 발하신 적도 없으시외다. 여기 모인 분들 전체가 멍석을 깔아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요.”

“하. 그래서, 왜는 어떻게 치겠다는 거요? 누구 지도 하나 가진 사람 없소?”

박순의 물음에 제신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왕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신하라는 자들은 조금도 쫓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달이 난 게 아닌가?

조금이라도 상대가 되어야 하는데 전혀 안 되고 있었다.

그러니 매사 끌려다닐 뿐이다.

이렇게 약한 모습을 왕이 알게 되면 그 혼자서 전쟁을 치르려 하겠지. 신하들을 대표하는 박순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판께서는 아시는 것 없소?”

지목 당한 예조판서 이양원이 큼큼, 목을 가다듬고는 답했다.

“어전을 방문한 자는 대우 가의 전 당주인데, 대우 가는 사방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딜 칠지 모른다는 뜻이오?”

“조선에서 가장 가까운 세력은 용조사(龍造寺, 류조지)와 모리(毛利)입니다. 개중에서도 약하고 구주 구석에 있는 용자사가 합당한 줄로 압니다.”

“······.”

이양원이 나름 설명을 했으나 주변 사람들은 소 귀에 경이라도 읊었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용조사는 뭐하는 놈들이고 모리는 뭐하는 놈들이란 말인가?

박순은 서안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예판께서는 지도를 확보해 주시오. 뭐라도 보면서 말을 나눠야 진행이 될 테이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회합에는 대우종린도 참석시키시오.”

이에 심수경이 물었다.

“어쩌면 아조 역사상 최대의 전쟁을 계획할지도 모르는데 외부인을 참석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 문제요. 계획을 수립하는데 동참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조언 정도는 듣는 게 합당하겠지.”

“음.”

“경들도 마음을 단단히 먹으시오. 우리가 해내는 게 없으면, 전하께서는 으레 그래오셨듯 직접 나서서 다 해결하려 하실 것이오. 전하를 믿지 못하거나 개입을 거부하려는 건 아니지만, 신하들이 신하 노릇을 하지 못하면 뭐가 되겠소?”

꿔다 놓은 보릿자루일 뿐이다.

이미 신하들의 입지는 왕에게 당하고 당해 만신창이인 상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사(國事)인 전쟁에도 신하들이 하는 게 없으면, 정말로 신하란 존재는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당장은 왕의 지배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나을지라도 이후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조금이라도 자질이 부족한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면 나라가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신하도 제 역할을 해내며 쓸모를 증명해야 했다.

“다들 이해하셨으면 이만 해산들 하십시다.”

박순이 관사를 나서자 당상 대신들은 착잡한 얼굴을 한 채 흩어졌다.

* * *

“그대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미안하군.”

수준 이하의 현실에도 선민사상에 찌든 조선 대신들의 모습은 나도 부끄러웠다.

냉정하게 평가해도 한반도의 수준은 서양이나 열도에 미치지 못한다. 시스템적인 면에서는 우수할지 몰라도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무력이다.

고대 유럽, 당대의 손꼽히는 천재였던 아르키메데스는 로마 병사 앞에서 ‘원을 밟지 말라!’고 했다가 단칼에 맞아 죽었다.

“어전에서는 조총의 개수가 국가의 우열을 나누지는 못한다고 했지만 말이야.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일국이 죽고 사는 것은 조총의 개수에 달려 있지.”

나의 말에 오토모 소린이 물었다.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냈다고 들었습니다.”

“나의 사고방식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소린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조선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접해왔다.

고작 십수 년 전만 해도 열도 중부의 패자였던 오우치 가문은 백제 왕족의 후손을 자처하며 조선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으니까.

사신에 동행한 사람들은 조선이 무가 아닌 문을 숭상하며 분란을 극도로 회피한다고 밝혔다.

소린이 직접 접한 조선의 실체는 과연 그러했다. 무장이나 군의 규율은 처참했다. 조금이라도 전쟁을 경계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조선의 대신들도 싸움은커녕 대외에도 관심이 없어보였다. 외부인인 자신이 봐도 너무할 정도로.

오직 왕만이.

대세를 거스르고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바다는 좁아져왔네. 세상의 반대편에 산다는 자들이 앞집 방문하듯 열도에 드나드는 것만 해도 그렇지.”

한반도와 열도 사이도 마찬가지였다.

“당장은 선교사이니 상인이니 하는 놈들만 오갈 뿐이지만, 그들은 열도를 오가며 본국에 흥미로운 소문을 퍼뜨릴 걸세. 이국의 무력이 우리만 못하니 군대를 끌고 가면 능히 정복할 수 있으리라고 말이야.”

괜히 선교사와 상인들이 식민주의의 첨병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각 개인의 감정이 어떻건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국가들은 탐욕스럽고 이해타산적이다. 군대를 움직이는 수고와 그를 통해 얻을 이익을 저울질하다 후자가 무겁다면 기꺼이 군대를 움직일 거다.

열도야 만만찮은 축에 속했으니 강제로 개항 당하고 준 식민지로 전락하고 끝났지만, 신대륙과 아프리카는 철저하게 식민지로 개척됐다.

“이건 단순한 우려가 아니야. 코쟁이들의 손에 놀아난 당사자라면 그대도 알고 있겠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백 년 전에 세계를 반분했다는 것을 말이야.”

토르데시아스 조약이다.

1493년. 콜럼버스가 소위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인도’ 정복에 열을 올렸다.

그러다 경쟁이 유럽 본토에서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과열되자 교황의 중재를 받아 체결한 조약이다.

내용은 대단한 것 없다. 대서양 한 가운데 선을 그어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은 포르투갈이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놈들이 뭐라고 지도에 줄 하나 긋고 세계를 양분한단 말인가? 건방지기 짝이 없어. 하지만 항의할 수 없다면 굴복이나 매한가지인 게 국가 사이의 일이지.”

“조선에도 홍모인들이 오갔습니까?”

“아니.”

“그렇다면 조선 국왕 전하께서는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자네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는 말을 덧붙여 불필요한 주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대우 가야 코쟁이들에게 쓴맛을 보기도 전에 역사에서 지워질 예정이지만, 조선은 떨어지기 직전의 꽃잎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궁금한 나라라서 말이야.”

“제 가문이 망한다는 말입니까?”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이대로는.”

“전하께서 도와주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됐건 대우가 가가 대우 가로서 존속할 수는 없네. 설령 내가 도와주더라도 말이야. 말하지 않았나? 이쪽은 제대로 된 독을 준비했다고.”

“······.”

“너무 안타까워하지는 말게. 국가가 일어서고 망하는 것은 인간의 탄생과 죽음과 같아, 영원불멸한 것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단지 대우 가의 명운이 조선보다 짧을 뿐이지.”

소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졸자가 전하께 협조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이지. 나라가 망하고 사람이 죽는 건 운명이지만, 한 줄 역사로 남을지 유산을 남길지는 선택 사항이거든. 대우 가가 조선을 받든다면 수명도 잠시나마 늘어날 테고 최후도 덜 비참할 걸세. 내가 보장하지.”

소린은 영 불쾌하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에게 선택권은 없다.

아들에게 당주 직을 물려주고도 실권을 상당부분 갖고 있었던 오토모 소린이 제 발로 이역만리 조선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겠나.

절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절실할수록 지고 들어가기 마련이다.

“나의 신하들이 어떻게 개입할지 논의하고 있겠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그들의 식견을 내가 전부 믿을 수는 없네.”

그래서 소린을 부른 것이기도 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조선에 구주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취하는 게 최선이겠나.”

“큐슈의 서북면 끝에 마츠라 가문이 군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곳을 확보한다면 큐슈 점령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겠지요.”

“괜찮은 발상으로군.”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조선이 대병을 끌고 모습을 드러낸 순간 여러 세력이 저지하려 들 테니 말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한데 모여줘야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소린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더니 찬찬히 물었다.

“전쟁에서 자만하는 자는 패하기 마련입니다.”

“먼 거리를 보자고, 소린. 원정이 실패하더라도 큐슈의 다이묘들이 조선을 노릴 여유는 없어. 열도가 통일된 뒤에는 어차피 쳐들어올 테지.”

“졸자는 전쟁에서 패하면 당장 가문과 일신의 존속이 위협받는 세상에서 살아와서 공감하지 못하겠군요.”

“조선 땅에서 머물게 되었으니 판단에 여유를 둬도 좋네. 적어도 여기서는 칼 맞고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어지간하면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조선의 왕은 정작 전임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탈취한 사람이었다. 즉, '어지간하면'이란 자신의 눈에 나지 않을 경우를 뜻하는 셈이다.

소린은 조선의 왕은 규격 외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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