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31화
80. 불붙이기 (1)
니아게 성.
오토모 가의 모든 물류가 거치는 항만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전 당주 오토모 소린은 어제와 같은 오늘의 풍경을 주시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계림(鷄林, 신라. 일본에서는 고려와 조선을 신라의 연장선으로 보았다.)과 열도는 서로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러지 못했다는 편이 옳으리라.
놈들은 놈들끼리 바빴고 열도는 열도끼리 바빴다. 넓은 곳으로 시야를 돌릴 여력이 어디 있나.
하지만.
저들은 아니었다.
‘조선이 나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처음에는 경쟁자들의 질 나쁜 술수로 여겼다. 불리한 상황에 처한 오토모가 우연히 떨어진 동앗줄을 붙잡고자 힘을 낭비하게 만들 술수 말이다.
소린은 냉정하게 생각했지만 마음은 흔들렸다.
서찰의 적의 농간으로 치부하면서도 파기하지 못했다. 이제는 손에서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이 서찰이 가짜가 아니라면······.’
오토모의 영화는 쇠락하고 있다. 반대로 적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
북쪽의 아키즈키.
동쪽의 모리.
서쪽의 류조지.
남쪽의 시마즈.
사방의 세력이 오토모를 상대로 칼을 들었다. 일대의 패자는 끌어내려야 하는 법이다. 잡아먹히기 전에.
이제 오토모는 패자가 아니었지만 저들은 한 번 치켜 든 칼을 거두지 않았다. 한 번 만든 적은 철저하게 지워버려야 한다.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깨우친 진리다.
이대로는, 오토모는 망한다.
“누가 보낸 서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 네가 이겼다. 내가 기어코 미련을 떨치지 못하게 만들었구나!”
소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와직. 조선에서 왔다는 서찰이 바스라졌다.
그는 곧장 발을 돌렸다.
-뚜벅, 뚜벅, 뚜벅······.
마루의 얇은 판자들이 울었다. 소린은 거침 없이 걸었다. 그가 멈춰선 것은 현 당주이자 아들인 오토모 요시무네의 거처였다.
“들어간다.”
소린은 시비를 밀어내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요시무네는 느닷없이 방문한 아버지에게 놀라 일어섰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조선으로 가겠다.”
“예?”
요시무네는 당혹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서찰을 믿으시는 겁니까? 그것이 적의 농간이라 하신 분이 바로 아버지셨습니다. 그런데 왜······.”
“적의 농간이라도 당할 수밖에 없다. 이대로라면 오토모는 망한다.”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기 직전의 모든 다이묘들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너는 진정으로 오토모가 사방의 위협을 헤치고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믿느냐?”
“물론입니다.”
“오다의 뒤를 이어 혼슈를 통일한 세력에게 맞서서도 말이냐?”
요시무네는 답하지 못했다.
“무사로서 지지 않겠다는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흐름을 보는 안목과 그것을 인정하는 냉정함이다.”
“······.”
“나는 조선으로 가겠다. 말은 해둬야 할 것 같아서 미리 전하는 것이다.”
소린이 발을 돌리자 요시무네가 다급히 물었다.
“꼭 아버지께서 가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만일 서찰이 거짓이라면, 바다를 건넌 의미가 없어집니다.”
“오토모의 당주는 너다. 설령 헛고생에 지나지 않더라도 나는 여기를 떠나는 게 좋다.”
소린은 자신이 원해서 요시무네에게 당주의 지위를 넘겨준 게 아니었다.
수 년 전 오토모는 류조지와의 전투에서 대패했고 협상 조건 중 하나가 소린이 당주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아비의 의사에 반함에도 당주의 자리에 오른 아들.
그리고 여전히 전 당주의 명령을 따르는 가신들.
당주가 아님에도 가신과 실권을 장악한 아버지.
모두가 불편한 상황이었고 정확하게 적이 바란 바였다.
“가마.”
소린이 발을 돌리자 요시무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소린은 듣지 않았다. 그는 성에서 나와 분주히 배가 오가는 항구를 찾았다.
영지민들이 예를 표했다.
소린은 배를 구했다.
선주는 난색을 표했지만 손바닥에 묵직한 주머니가 떨어지자 기꺼이 물러났다.
* * *
영의정 박순이 아뢨다.
“경상 감사가 치계하기를, 왜선 하나를 김해 인근에서 나포했는데 선주가 자신을 사신이라고 소개해 일단 억류해두었다 하였사옵니다.”
“음?”
“임신년에 조약을 맺어 사신을 보낼 때라도 세견선을 거치게 하였고, 또 부산포에만 정박케 하였는데 이런 의례에 아주 어긋났사옵니다. 분명 왜구가 사신을 자처하여 이익을 꾀하는 일인 줄로 사료 되옵니다.”
박순의 판단에 제신들도 긍정했다.
조선이 사신을 우대하니 온갖 잡다한 왜놈들이 사신을 사칭해댔기 때문이다. 이번 놈이라고 다르지는 않으리라.
“별다른 말은 없더냐?”
“그것이, 신빙성은 없사오나 사신을 자칭한 자가 자신이 대우(大友, 오토모)의 전 당주라면서 전하의 명을 받아 왔다고 하였사옵니다.”
이에 제신들이 한두 마디씩 내뱉었다.
“감히 사신만 아니라 전하의 명을 빙자하다니, 극도로 무도한 자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아예 일벌백계로 삼아 사신을 사칭하는 자들에게 본보기로 만드시옵소서!”
“극형을 내리시옵소서!”
어전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나는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예조판서 이양원을 바라 보았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조용히 있던 예조판서는 뜨끔,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답했다.
“이전에 사신을 사칭한 자들은 하나 같이 의례에 따라 부산포에 정박하였으며, 또는 이전 조약대로 가덕도를 찾기도 하였는데 김해에서 나타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로 사료되옵니다.”
“그래서?”
“신이 알아낸 바로는, 왜구들은 수백 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 급급하여 중앙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하였사옵니다. 어쩌면 왜구가 단순히 사신을 사칭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부족 중 하나에서 보낸 자가 아닌가 하옵니다.”
“그렇군.”
왕의 담담한 반응에 이양원은 속으로 만족해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금상은 과거의 어떤 왕과도 달랐고, 그의 치세 역시 과거의 어떠한 치세와도 달랐다.
상상할 수 있는, 그리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든 일들이 벌어졌다.
물길이 바뀌고 산이 깎이며 여진족들은 일개 도(道) 넓이에 달하는 땅을 자발적으로 바치며, 군호를 수여 받았다.
그러니 누가 알겠는가?
정말로 왕이 그 왜구에게 정말로 오라는 서찰을 보냈을지?
“예판의 판단이 옳다. 경상감사에게 전해라. 억류한 왜인들을 올려 보내라고.”
“하오나 사신이 아니라 단지 하사품을 노리고 사신을 사칭한 자들이라면······.”
박순이 우려를 표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예에.”
논의가 끝나자 대신들은 다른 사건과 동향에 대해 보고했다.
곧 누구도 김해에 나타난 왜구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러고서 열흘이 지났다.
* * *
“여기가 조선의 수도인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단 많이······ 실망스럽군.”
소린이 중얼거렸다.
니야게는 복층 건물과 창고들이 길가에 끝없이 늘어져 있었고 각지에서 몰려온 상인과 이국에서 온 무역상과 선교사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한성은 니야게보다는 넓었으나 실속이 하나도 없었다.
복층 건물은 찾아볼 수도 없다. 심지어는 수도라는 곳에서 흙과 짚으로 쌓아 올리고 싸리대를 두른 집이 즐비했다.
전형적인 지방 영지민들의 거처다.
진정 대국을 자처하는 조선의 수도란 말인가?
“흥.”
소린은 괜한 발걸음을 했다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야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앞서가는 안내역을 쫓아 대로를 거닐었다.
그러던 중 건물 하나 눈에 들어왔다.
“저건······.”
지붕들 너머로 보이던 첨탑이 다가갈수록 찌를 듯이 높아지더니 1층에서 2층, 3층, 4층으로 늘어나더니 성이나 다름없는 규모로 불어났다.
하지만 방어에 이로운 구조는 아니다. 즐비한 출입과 뚫린 벽면으로 천여 명에 가까운 인파가 한 눈에 들어왔다.
군사적인 용도가 아니란 말인가?
이와 비견되는 규모의 호화로움은 성 외에는 겪어본 적이 없는 소린이다. 그는 안내역을 쫓아가 물었다.
“저건 무슨 건물이요?”
“그건 나도······.”
“모른단 말이오?”
“요즘에는 세상이 워낙 빠르게 돌아가서 말이오. 아마 전하께서 세우신 것일 테지.”
소린은 조선의 왕이라는 자에게 흥미가 생겼다.
건물의 정체를 물어볼 수 있겠지.
흠, 하고 감탄을 남기고 돌아서려는데 드높은 첨탑 쪽에서 무언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옷감?
색색의 옷감이 거품처럼 커지더니 높이 솟아올라 첨탑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기구라 불리는 물건이지만 소린으로서는 알 리 없었다.
“허.”
색색의 비단을 엮어 만든 옷감은 마치 태양이나 하늘처럼 하늘에 덩그러니 걸렸다.
소린으로서는 한평생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안내역도 이 정도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도성을 오가는 영지민들은 추호도 관심을 주지 않고 태연히 거리를 거닐었다.
“도대체가······.”
소린의 호기심도 하늘에 걸린 기구처럼 불어났다.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조선의 왕을 직접 만나는 것뿐이다.
소린은 안내인에게 보챘다.
“빨리 입궐합시다.”
“아, 음.”
안내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발을 옮겼다. 소린은 서둘러 뒤를 쫓았다.
반 각 정도 걸으니 성 다운 성이 나타났다. 소린에게는 조금 의외였다. 수도를 에워싼 성이 있는데 안에 또 성이라니.
처음 한성을 방문했을 때는 실망 가득했던 소린이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안내인은 성문을 지키는 무사에게 무어라 떠들어댔다.
소린은 이국의 언어에 조금씩 조예가 있었지만 조선어는 몰랐다. 덕분에 얼마나 고생했던가.
대뜸 조선 수군에 나포되어 감옥에 처박히고서 고문까지 당해야 했다.
‘조선어를 배우던가 해야겠군. 이러다 뒤에서 무슨 수작을 꾸미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안내인이 말했다.
“여기는 전하께서 기거하시는 곳이니 함부로 떠들거나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따라오시오.”
“내가 언제는 그랬다고?”
“만일은 대비해야지.”
소린은 궐문을 지키는 무사들에게 신체를 검사받았다. 무장은 하지 않았으므로,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무사 입궐할 수 있었다.
돌바닥으로 된 길과 뜰을 몇 번 가로질러.
마침내 소린은 편전에 도착했다.
* * *
“전하, 왜국 사신 대우종린(大友宗麟, 오토모 소린) 입시이옵니다.”
내시의 알림과 함께 왜인 하나가 입장했다.
제신들은 동물원에 새로 들어온 동물을 보듯 호기심 섞인 시선으로 대우종린, 그러니까 오토모 소린을 바라보았다.
그가 예를 표하자 대동한 역관이 통역했다.
“대우종린이 삼가 조선국왕 전하께 예를 올립니다.”
“고생 많았다.”
짧은 문답이 있고서 박순이 나섰다.
“그대는 진정으로 왜를 대표하여 조선을 찾은 것인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규례를 따르지 않고 김해 인근에서 사로잡혔나?”
“졸자(拙者)는 왜가 아닌 대우 가를 대표하여 왔습니다. 대우 가는 조선과 통교하지 않아 규례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일개 추장이 감히 의향이 있다고 어전을 방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전하께서 졸자를 찾는다는 서찰을 받았으므로 결례를 무릅쓰고 조선을 방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찰을 보이라.”
소린이 품 속에서 켜켜이 접힌 종이를 건네자 역관이 받아 박순에게 건넸다.
박순은 찬찬히 읽어보더니 눈살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이 서찰에는 전하께서 쓰시는 어떠한 직인은커녕 관인조차 찍혀있지 않음에도, 정녕 이것이 전하의 부름이라도 믿었단 말인가?”
“조선 국왕 전하의 부름일지도 모르거늘 어찌 의심하여 무시할 수 있었겠습니까.”
“내가 왜왕의 서찰을 날조하는 자는 무수히 보았지만 전하의 서찰이랍시고 가져와 당당히 보이는 자는 처음 보았다.”
“폐를 끼쳤다면 사죄드릴 뿐입니다.”
“그래서, 서찰을 받아서 왔는데 이제는 어쩔 생각이신가?”
“전하께서 하명하시는 일이 있다면 받들 것입니다.”
“하.”
박순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는 발을 돌렸다.
“전하. 이 자는 신분이 어떻건 상대할 가치가 없는 자이옵니다. 물리치시옵소서.”
“음.”
나는 쓰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대우 가의 전 당주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다. 당연히 진의를 의심해서 적당한 사람을 보낼 줄 알았거늘.”
“전하, 혹시.”
“직인만 안 찍었다 뿐이지 서찰은 내가 작성한 것이 맞다.”
“전하!”
박순이 이게 말이 되냐는 듯 항의했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나도 기 죽을 일은 없지만, 대외의 유력자에게 사적으로 서찰을 전달했다는 건 왕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경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는 조정이 열도의 동향을 몰랐으니 어찌 관을 통해서 외지에 서찰을 보낼 수 있었겠는가.”
“······.”
“영상은 삐지지 말라.”
“이건 신이 삐지고 말고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옵니다.”
“내가 안마라도 해주랴?”
박순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크흠, 헛기침하고는 사양했다.
“망극하오나 사양하겠사옵니다.”
“좋다. 이 일에 대해서는 경들이 나를 취조할 기회는 많으니 일단 왜에서 온 손님을 맞자. 그는 경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그리고 마땅히 가져야 하는 소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