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30화
79. 장손포 (4)
“신이 우매하여 전하의 깊은 뜻을 몰랐사옵니다.”
“괜찮네.”
“하나, 포수들을 가르친다고 하면 조정이 순순히 응할지 의문이옵니다.”
사대부들에게 교육이란 유학에 통달한 학자가 왕을 대신하고 보좌할 관리들을 육성하는 과정이었다.
나머지 학문은 잡과(雜科)라 하여 진정한 학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미래에서는 황족 학문인 의학마저 이 시대에서는 중인 나부랭이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부가 아닌 경험적으로 쌓아야 하는 기술직은 상당수가 관에 소속된 노비들이 수행하고 있었다.
“성균관과는 다른 교육 기관을 설립할 거야. 가르칠 학문과 목적이 완전히 다르니 굳이 고지식한 인간들 설득해가며 복잡하게 만들 필요 없지.”
탄도학은 현대적인 대학을 일으킨 공신이기도 했다.
과거의 대학은 부유하고 신분 높은 자들을 위해 문법, 수사학, 논리학, 음악, 신학 등의 교양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또 학생의 수와 수요에 맞춰 교수를 초빙했고 교실도 없어 그들의 거처에서 수업이 이루어졌다.
나라에서 원하는 실용 학문을 익힌 지식인은 이런 식으로는 양성하기 어렵다. 그래서 현대적인 대학처럼 처음부터 시설과 인원을 갖춘 뒤 자질이 있는 자들을 모아 전문적으로 육성했다.
대표적인 기관이 프랑스의 일반 대학과는 비교되는 그랑제콜이다.
개중에서도 최정상급 그랑제콜인 ‘에콜 폴리테크닉’의 모태가 포병, 공병 사관학교다.
나라고 이걸 따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 * *
“전하, 내수사에서 순화방의 모든 건물을 매입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영의정 박순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왕이 벌인 일들의 스케일은 하나 같이 거대했지만, 이번에는 더욱 거대했다.
일개 행정구역 전체를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목적이 무엇이건 박순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서 내막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왕은 자신의 심모원려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사실이다.”
“어찌하여 순화방 전체를 사들이려 하시는 것이옵니까?”
“잡과의 학문과 기술은 정해진 가르침과 교재가 없어 각지에서 중구난방으로 가르치니 어지러움이 지극하다. 이에 내가 통일된 교육처를 만들어 혼란을 수습하고 체계적으로 잡과 기술자들을 배양하려 한다.”
박순을 포함한 제신들은 영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잡과 학문은 중요성이 낮다. 적어도 그들 생각으로는.
하지만 왕이 잡과 학문을 가르치고자 순화방 전체를 사들인다면 다르다.
조선의 반석은 유학이다. 다른 학문이 아니라. 신하들 역시 유학자로서 경쟁하여 관문을 넘어섰고 그것을 발판 삼아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미 유학은 한 차례 흔들렸다.
국립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서 산학에 일부나마 자리를 빼앗겼다. 그 충격이 여전히 가시지 않은 채였다.
“전하, 어찌 잡스러운 학문을 가르치고자 북촌의 일개 방을 들이시옵니까?”
박순은 말을 일었다.
“이미 잡과에 종사하는 관리들은 충분하옵니다. 만일 학문을 일으키시고자 하신다면 유학을 일으키시옵소서. 그것이 이치에 부합하옵니다.”
“성균관의 유학 교육 기능을 위임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오라.”
국립기관인 유학이 왕의 교육 시설에 지분을 빼앗긴다면 빈대 하나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짓이었다.
박순은 서둘러 자신의 발언을 정정했다.
“방 전체를 수매할 재물을 성균관에 투입한다면 학문이 크게 융성해지지 않겠사옵니까?”
“내가 나랏일에 들은 내수사의 재산이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거늘 영의정은 신하를 대표하는 자로서 나에게 또 손을 벌리는 것인가?”
박순은 침을 꼴깍 삼켰다.
자신이 어떻게 반대하더라도 왕은 받아칠 기세였다.
그건 문제가 안 된다.
지리멸렬한 논쟁을 이어가자면 박순은 왕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자신 역시 영의정의 자리에 이를 만큼 타고난 정치인이다.
자질의 격차가 없다면 간극을 만드는 것은 경험이었다.
박순은 중종부터 시작해 인종, 명종, 폐주와 금상까지 다섯 명의 왕을 모셨다. 늙은이의 변설은 세월을 먹을수록 날카로워지기 마련이다.
젊은 왕과 충분히 대적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맹점이 있었다.
자신의 경험으로도 메울 수 없을 간극이다.
금상은 그동안 조정에 무수히 도움을 주었으며 드높은 위업을 여럿 세웠고 신하들의 약점까지 알고 있었다.
반대하는 목소리를 한 번 낼 때마다 위대한 지도자의 빛나는 통치에 재를 뿌리는 적신이 되는 것이다.
금상이 폐주를 몰아내고 판을 깨면서 동서의 당쟁은 없어졌으나 정치인들 간의 알력은 여전하다.
영의정은 관리라면 모두가 희망하는 자리다. 왕은 자신을 영의정으로 임명하면서 좌의정 노수신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깊게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
박순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용상의 왕이 그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영의정이 우려하는 바를 나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유학은 이 나라의 반석이고, 근자에는 성균관에서 산학을 겸하여 가르치게 했다. 경연도 행하지 않는 내가 이 이상으로 유학의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을까 우려스러운 것이겠지.”
그럴 생각은 없다는 뜻인가?
박순은 숨을 돌렸다.
열세임을 알면서도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위만 아니라 아래의 눈치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신하를 대표하는 영의정으로서 왕의 파격적인 행보 하나하나를 한 마디 말 없이 용인했다간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아첨한다며 공격 받을 터였다.
그것대로도 문제였다.
‘하지만 전하께서 못을 박으신다면.’
박순도 면은 세울 수 있었다.
“성상께서는 성대한 업적을 무수히 세우셨거늘 신이 어찌 전하의 일에 의문을 품겠사옵니까? 단지 영의정으로서 매사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옵니다.”
“내가 세울 학교가 성균관의 의의와 역할을 침해하는 일은 없다. 단지 잡과 학문이 정립되지 않아 비효율적으로 전수, 이용되고 있어 이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잡과 관리들이 전하의 깊으신 뜻을 단편적으로 해석하여 오만해지지는 않을까 우려스럽사옵니다.”
“그들의 위치나 역할이 양반(兩班, 문반과 무반)의 영역을 침범할 일은 없을 것이다.”
이에 박순은 물론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도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말뿐이지만 왕의 말과 신용은 무게가 남다르다.
약간의 이익을 위해서 손바닥 뒤집듯 말을 뒤집었다간, 왕권과 직결되는 왕의 신뢰도와 권위에 금이 가니까.
“신들이 미욱하여 감히 우려를 품었는데 성상께서는 자애롭게 살펴주시니 그저 망극할 뿐이옵니다.”
“경들이 당연히 우려할 수 있는 일이니 내가 신경 써주는 것이 맞다.”
박순은 대답을 대신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도 뒤따라 예를 표했다.
잡과를 가르치는 일은 일단락되었으나 사실 박순이라고 왕의 조처에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왕이 친히 육성한 잡과 관리들이다.
놈들이 콧대가 올라가는 일을 근절할 수는 없다. 사람의 심리를 어떻게 제한하겠나.
잡과 종사자들의 신분과 지위 상승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각 관청에 배속되어 명령을 받으면 필요한 물자를 납품하던 장인들, 특히 철장과 지장들은 저들만의 작업공간을 가지게 됐다.
이들을 관리하는 잡과 관리들의 중요성이 커졌고 그만큼 입지도 높아졌다.
의과는 더하다. 관직이 없는 자들도 왕립 금천병원에 집결해 당상 대신들도 고개를 숙이고 제 발로 찾아가게 만들었다.
이건 물결이다.
세상을 바꾸는.
조금이라도 제동을 걸지 않으면 과거를 살아가는 노대신들은 급류에 휩쓸리겠지. 그러니 제도라는 턱을 만들어 피해만큼은 최소화하려는 거다.
고작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는 없지만.
왕은 그 이상을 해줄 생각은 없을 테니까.
최소한의 타협으로 참을 뿐이다.
* * *
관상감.
“소식 들으셨습니까?”
중년의 관리가 노년의 관리에게 물었다.
두 사람의 지긋한 연배와는 달리, 정작 관직은 정구품과 종육품으로 각기 말직과 참상관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실무진 레벨에서는 위계질서 유지를 위해 직품에 비해 연배가 과하게 많은 자는 간접적인 수단으로 방출하고 있었다.
그러니 두 사람은 명백하게 예외적인 자들인 셈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정구품 중년인은 지리학훈도였고 종육품 노인은 지리학교수였으니까.
교수가 말했다.
“나도 들었네. 전하께서 잡과만을 가르치기 위해 순화방 전체를 사들이셨다더군. 실로 경이로운 재력일세.”
“재력도 경이롭지만 용단도 경이롭습니다. 순화방 전체라면 성도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방대한 영역을 오직 잡과 교육만을 위해 쓴다니 잡과 출신의 교수와 훈도는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다.
“이제야 우리들이 사람 대접을 받으려나 보네.”
“다 전하의 은혜십니다.”
훈도의 말에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는 전하께서 지리학을 근간부터 흔드신다더니?”
“크, 크흠. 그때는 제가 미욱해서 전하의 깊으신 심모원려를 몰랐기 때문이지요.”
최근까지도 지리학 교수와 훈도들은 돌아가며 태안의 운하 건설에 투입되었다.
현실 지리를 익히게 만들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지리학교수와 훈도들에게는 현실 지리가 곧 풍수학이었다. 그들이 보고 배운 교재부터가 풍수학 책이거늘 무엇이 현실 지리란 말인가?
하지만 왕은 긴말하지 않았다.
지리학 교수와 훈도들에게 공사를 앞둔 지역의 지질, 지반, 습도, 경사, 면적 등을 조사케 했고 운하 건설에 어떤 점에서 적합하고 부적합한지 평가하게 했다.
그리고 그 보고를 일일이 다 받았다.
만일 보고서가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소속 관청의 장관이 벌을 받았다.
“농일세. 어휴, 그때는 나도 살이 떨려서 잠도 제대로 못 잤네.”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 고생하다 보니 어떻게든 되어서, 왕에게 한 소리 들은 장관들이 보복하는 일도 줄었다. 그리고 지겹던 운하 공사도 정직한 시간의 흐름은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끝났다.
교수가 말했다.
“학교란 세우기만 해서는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니, 훈도가 지원해보는 건 어떤가?”
“예, 예?”
“어차피 정구품 관직이고 잘 되어봐야 교수가 끝 아닌가. 어차피 전하께 녹을 받는 건 똑같으니 학교에서 일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걸세.”
“흐음.”
훈도는 풍성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막상 고민해보니 썩 괜찮았다.
교수의 말마따나 전하 밑에서 일하는 건 똑같다. 게다가 학교에서 일하면 관청의 지겨운 상관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나이도 새파란 것들이 잡과 훈도는 사람도 아니랍시고 얼마나 무시하던가!
잡과 출신의 서러움은 오직 그들만이 알았다.
“혹시,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달콤한 말을 속삭이신 건 아니겠지요?”
“내가 훈도를 꾀어서 어디에 쓰겠는가. 나보다야 잃을 것이 없으니 권해본 거지.”
“그렇다면 믿어보겠습니다.”
“하!”
교수가 가소롭다는 듯 웃자 훈도도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