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29화
79. 장손포 (3)
유극량이 술병을 들자 이순신은 마지 못해 잔을 들었다.
서로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연해도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차별과 혐오가 만연했다.
조선 출신은 여진족을 혐오했고, 목민관들은 노비 출신 관찰사를 무시했고, 문관은 무관을 차별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임기만 채워 조선으로 귀환하려는 자들은 적극적으로 임하여 공을 세우고 자신들의 빛을 바래게 만드는 자원자들을 경멸했다.
이런 와중에 서로의 출신과 성분에 연연하지 않고 지원과 협조에 최선을 다하는 이순신과 유극량은 겉보기와는 달리 절친한 사이였다.
“그동안 연해도는 많이 안정되었네. 다 군수가 바삐 고생해준 덕이야.”
“범부는 전하의 깊은 심모원려를 알 수가 없나 봅니다.”
“들리는 말로는 의정부와 육조의 당상 대신들도 전하 앞에서는 기를 못 편다더군. 누구라도 그럴 걸세.”
이순신은 의정부의 전언으로 자신의 군대를 꾸몄다.
깃대에 군기와 함께 적장의 시체를 달았고 병사들은 적병의 해골을 달았다.
현지 여진족들은 이순신과 부하들을 조선의 파견군이 아닌, 지옥의 틈 사이에서 기어 나온 악마의 군세로 인식했다.
이순신은 까라니 깠지만 옳은 선택인지 의심했다.
여진족들이 이러한 군대의 존재를 과연 순순히 납득하겠는가, 하고 말이다. 어떻게든 반발하여 일대를 혼란의 수렁에 빠뜨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여진족들은 굴복했다.
자신의 시체와 해골을 장식품으로 전락시키느니 조선의 지배에 수긍하기를 선택했다.
‘군수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FM의 화신 이순신이 이끄는 악마 군대와 타지역 목민관들의 무능으로 빚어진 방치 플레이는 역설적이게도 시너지를 냈다.
현지 유력자들은 자신이 이순신 휘하가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고 안주했다.
반대로 이순신 휘하의 유력자들은 악마 군대의 FM 철권통치에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최근까지도 반발하는 자들은 같은 여진족도 야만적이라 학을 떼는 야인여진들이었다.
이번에 제대로 토벌했으니 이제는 조용해지겠지.
한 잔 걸친 유극량이 말했다.
“저번에 아는 군기시 관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찰을 받았다던데, 어떻게 됐나?”
“잘 해결했습니다.”
“그래?”
“소관을 가르친 스승의 기예가 떠오르더군요.”
“신 공(公)말인가?”
“예.”
이순신은 회고했다.
전하의 도움으로 신립의 소개를 받아 활을 배우던 중, 그는 이따금 자신의 기예를 뽐내곤 했다.
그중 하나가 자신이 쏜 화살을 이어 쏜 화살로 맞추는 것이었다.
표적에 떨어진 화살을 맞추는 게 아니다.
날아가고 있던 화살을 맞추는 거다.
“스승께서는 먼저 화살을 높이 쏜 다음, 떨어지는 것을 이어서 쏜 화살로 맞췄지요.”
“날아가는 화살을 맞춘다고? 믿기지가 않는군.”
“소관은 직접 보았음에도 여전히 믿기지 않습니다.”
“신 공의 정체는 사람이 아니라 귀신일지도 모르겠군.”
이순신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럴지도요.”
“신 공이 연해도에서 일한다면 큰 도움이 될 텐데.”
“스승님의 궁술은 경이롭지만 냉정하게 평가하면 전력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닙니다. 일신의 무예가 가지는 의미가 갈수록 퇴색되고 있지 않습니까.”
날고 긴다는 자도 조총 앞에서 까불었다간 콩알 한 대 맞고 죽는 수가 있었다.
항우나 관우가 떼거리로 덤벼도 조총 부대 앞에서는 추풍낙엽이었다.
이순신은 짧게 덧붙였다.
“전하께서 예견하신 대로입니다.”
“흠, 처음부터 조총이 가져올 변화를 예견하셨다니 대단하시군.”
“어쩌면 조총 못지 않게 대단한 무기가 새로 도입될지도 모릅니다.”
“그래?”
“말씀드린 군기시 직장이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더군요.”
“기대되는군. 연해도에 도입되면 절반은 군수의 공일세.”
유극량은 미리 치하겠다는 듯 술을 기울였다. 이순신은 웃으며 잔을 들었다.
* * *
도성 남쪽.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갈대밭에 시연장이 마련됐다.
“이걸 해내네.”
선택을 하늘에 맡기니 하늘은 이장손의 손을 들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그가 동시 착탄의 개념을 가져온 것이다.
적이 흩어져 화력이 낭비된다면 도망칠 틈도 주지 않으면 된다고.
포각을 낮추며 연발하면 대신기전의 체공 시간 차이로 순식간에 적지에 화력을 쏟아붓게 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정확히 내가 아는 TOT의 개념 그대로였다.
“자네가 알려준 건 아니었지?”
곁의 을룡에게 물으니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옵니다. 신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 생각해 묻어두고 있었사옵니다.”
“흐음. 혼자서 생각해 낸 건가?”
어좌에 기대 시간을 죽이니 개량된 화차들이 차차 입장했다.
수레 위에는 6개의 원통형 발사대가 육각형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각 발사대에는 사람 팔뚝만한 굵기의 대신기전이 적재되어 있었다.
아니, 대신기전이라고는 못하겠군.
기존 대신기전과는 목적도 설계도 달랐다. 바닥에 대고 세우기 위한 장대는 제거되었고 탄두와 추진체는 길고 두꺼워졌다. 그리고 활공을 위해 날개가 달렸다.
전근대의 유사 로켓이 아닌 진짜 로켓이 된 것이다.
“전하.”
이장손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작을 시연할 기회를 맞아서인지, 얼굴에는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데도 생기가 넘쳤다.
“시연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시작하라.”
“예!”
군기시정은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화차에 다가갔다. 일생의 역작을 다른 사람의 손에는 맡기기 싫었는지 직접 횃불을 챙긴 채였다.
그는 로켓의 도화선에 순서대로 불을 붙이고는 물러나 수레의 손잡이를 잡았다.
‘실시간으로 각도를 조절할 생각인가.’
로켓의 심지 하나가 추진체에 가까워지자.
-뿌와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새카만 연기가 화차와 이장손을 뒤덮었다.
폭발한 건가?!
구경꾼들이 기겁하며 물러나는 순간, 팔뚝만 한 로켓이 연기를 헤치고 날아올랐다. 명적화살처럼 특유의 울부짖는 굉음을 내면서.
하나가 아니었다.
-뿌와아아아앙!
-뿌아아아아앙!
나머지 로켓들이 뒤따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새카만 연기가 여섯 개의 호선을 그렸고, 거의 지평선까지 날아갔다.
그리고.
-콰과과과광!
순차적인 폭음이 하늘과 대지를 때렸다. 시야의 끝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었다.
생긴 것부터 발사와 체공, 폭발까지 하나하나가 엄청난 박력이다.
맞지도 않을 대신기전이 한동안 이용되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적의 사기를 꺾는데 그만한 녀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장손의 개량형은 기존의 대신기전을 아득하게 능가했다.
특유의 굉음이 창공을 찢어 갈랐고 폭발은 천지를 뒤흔들 정도로 요란하다. 휘말리게 된다면 흔적도 남지 않겠지.
적들은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 전우의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질 거다. 그러고도 계속 덤빌 수 있을까?
“어, 어떻사옵니까?”
이장손이 연기를 헤치고 나와 물었다.
상기된 표정. 떨리는 목소리. 마치 일평생이 염원을 성취한 사람처럼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해 보인다.
주변의 중신들은 여전히 놀란 기색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생각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괜찮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딱 그 짝이었다.
이장손의 설계도는 나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발명이 아니었고, 단점과 한계도 분명했다.
하지만 설계도 실현되어 눈앞에서 위력을 과시하니 마음이 동했다.
아니, 마음에 들었다.
“군기시에서 큰일을 해주었군. 군기시 소속은 직무와 신분고하를 가리지 말고 한 해 녹봉을 더 지급하고, 의정부에서는 직장 이장손에게 어떠한 포상이 적합할지 논하라.”
“예.”
동행한 영의정 박순이 답했다.
나는 이장손을 내려다보았다.
“잘도 해주었군.”
“다 성상 전하의 은혜 덕이옵니다.”
“태양의 빛은 천하만물을 비추지만 싹을 틔우는 것은 오직 씨앗뿐이다.”
“망극하옵나이다.”
“직장은 신기전의 개량형이라고 칭하지만 그래서야 의미가 있겠는가. 역작으로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발명품이니 응당 새로운 이름이 붙어야 할 것이다.”
기존 신기전과는 차이가 큰 무기이기도 했다.
“직장의 이름을 붙여 ‘장손포’라 칭하는 게 어떤가?”
“하찮은 무기에 신의 이름을 붙여주시니 각골난망할 뿐이옵니다.”
“노고에 걸맞게 대우할 뿐이다.”
이장손은 망극하다는 듯 절을 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아뢨다.
“장손포는 신이 만들었으나, 아뢰옵기 송구하옵게도 포탄을 동시에 떨어뜨리는 기술은 신이 창안해낸 것이 아니옵니다.”
“누구의 발상인가?”
“용정 군수 이순신이옵니다.”
“참으로 멀리까지 도움을 청했군.”
“군수는 일전에도 비상한 지혜를 발휘하여 당파를 고안했으니, 그라면 도움이 될 줄로 알고서 서찰을 보냈사옵니다.”
“성과가 있어 다행이군. 용정 군수도 이 일에 공이 있음은 알겠다.”
“망극하옵나이다.”
시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신하들은 해산하는 와중에도 장손포의 위력에 대해 떠들어 댔다.
나는 위사와 궁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성으로 향했다.
병조판서 을룡을 대동한 채였다.
“자네 생각은 어떻나?”
“직접 보니 박력이 남달랐사옵니다. 소량이라도 생산해 연해도에 배치하면 상당한 효용을 거둘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기에는 아까운 패로군.”
장손포는 중세시대에 현현한 MLR(다연장 로켓)이다.
만일 적이 알게 되면 분석을 통해 복제를 시도하고 대응법을 연구할 거다.
조선도 임진왜란을 겪는 와중에 조총을 복제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조선의 조총 복제는 당해봐야 아는 멍청한 케이스에 속했다. 타국, 특히 내전을 거듭하는 왜놈들은 보기만 해도 복제를 시도하겠지.
“장손포와 포탄은 양산해두되 극비에 붙여라. 북방이 아니어도 쓸 때가 올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일선에서 유능한 포수들을 선발해 도성으로 불러라.”
“알겠사옵니다. 하오나, 전하.”
을룡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만일 장손포의 포수를 마련하기 위함이시라면 유능한 포수들을 미리 불러둘 필요는 없다 사료되옵니다.”
“착각하고 있군.”
나는 단언하고는 말을 이었다.
“바람이 일정하다는 전제로, 화살을 같은 각도와 힘으로 계속 쏜다면 어떻게 되겠나?”
“같은 곳에 떨어질 곳이옵니다.”
“잘 알고 있군. 물체가 날아갈 때는 조건이 같으면 같은 결과가 나오네. 즉, 투사체의 운동은 특정한 법칙을 따른다는 뜻이지.”
나는 덧붙였다.
“법칙이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몰라도 연습을 거듭하면 몸은 알게 되지.”
왕년에 활질 좀 한 나도 활과 화살만 쥐면 어떻게 날아가 어디에 떨어질지 안다.
몸이 알았다.
하지만 머리는 몰랐다.
“그게 맹점일세. 장손포는 수시로 발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닐세. 경험으로 실력을 쌓기 어렵다는 뜻이지.”
곡 장손포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투사체의 운동 원리를 연구하여 규명하여 종이 위에 그려내고 가르칠 수 있다면, 꼭 훈련을 거치지 않아도 화포 운용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질은 갖출 수 있네.”
그것이 바로 탄도학의 의의다.
이미 유럽에서는 대지와 바다 위에서 무수히 많은 대포를 운영하고 있다. 유능한 포수의 수요는 끝이 없었고 그래서 탄도학이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있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적으로라도 화포에 능한 사람들이 필요하네. 그래서 데려오라고 한 것이야.”
언제 쓰일지 모르는 장손포와 함께 먼지나 맞게 함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