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28화
79. 장손포 (2)
며칠 뒤.
“병판 대감께서 자네를 보자시는군.”
군기시정이 전했다.
이장손은 때가 되었음을 알고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기시정은 여전히 불신 가득한 시선으로 답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장손은 병조로 발을 옮겼다.
당상관청의 안쪽에서 병조판서와 보좌역인 참판, 참의, 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설계도가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세심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장손은 자신의 설계도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병조판서는 손을 맞대고는 물었다.
“용케도 이런 물건을 다 생각했군. 화차를 해체하라는 명령에 대한 반발인가?”
“아, 아니옵니다!”
“농일세.”
병조판서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당상들과 논의해보았지만 다들 입장은 이 사람과 같았네. 장단점이 워낙 명확해서 말이야.”
“예에.”
“직장의 개량안은 화차에 소신기전이나 중신기전이 아닌 대신기전을 적재하자는 걸세. 근본적으로는 말이지.”
소신기전은 추진체로 화약이 담긴 통을 부착한 화살이고, 중신기전은 거기에 폭약을 탑재한 형태다.
마지막으로 대신기전은 미래의 로켓과 유사한 물건으로, 몇m 길이의 장대에 탄두와 추진체를 붙여 날리는 물건이었다.
파괴력은 확실했다.
단 한 발로 다섯 장 길이의 범위를 초토화 했으니까.
문제는 그뿐이라는 거다.
야만인들은 곱게 싸우지 않는다.
난전을 유도하는 만큼 진형이 유동적이었고, 밀도 낮은 적지에 떨어진 폭탄은 효과가 낮았다.
장대한 대신기전을 적지까지 날게 하는 데만 소모되는 화약까지 감안하면 낭비나 다름없었다.
“예, 예. 하지만 조금이라도 화약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도록 개량했습니다.”
“탄두와 화약통이 분리된다는 개념은 놀라웠네. 의도대로 될지는 의문이네만.”
일체형인 기존 신기전과 달리 이장손의 개량형은 화약통 마디와 탄두 사이를 분리, 열에 약한 접착제로 접합했다.
그래서 화약이 연소 되면서 빈 화약통이 탄두와 분리됐다. 예상대로는.
“실험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충분히 개선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만일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직장은 끝까지 책임을 지려 하겠지.”
“예.”
“하지만 직장의 새로운 개념을 고려해도 화약이 무자비하게 소모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네. 과연 그만한 효용이 있을까?”
“······.”
“적지에 두어 발 떨어지면 오랑캐들은 모두 산개하겠지. 우왕좌왕 흩어져서 달려드는 그들에게 이만한 무기는 화력, 화약 낭비야. 괜히 북방에서 조총이 힘을 쓰는 게 아닐세.”
“한꺼번에 여러 발을 발사한다면 다를 겁니다.”
“화력, 화약 낭비도 그만큼 심해지겠지. 직장은 조총을 한 번 발사하는데 들어가는 화약의 양을 아나?”
“2돈입니다.”
7.5g.
“직장이 제안한 화차에 대신기전을 전부 적재하는데 들어가는 화약이면 몇 발의 조총 사격이 가능할 것 같나?”
이장손은 바로 계산할 수는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수도 없이 쏠 수 있었다.
“조총은 사거리 안에 들어온 적은 반드시 죽일 수 있네. 화약 2돈에 목숨 하나지. 직장의 대신기전은 한 발에 몇 명을 죽일 수 있나?”
확신할 수 없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대신기전이었으니까.
“······소관의 발사대는 장대를 교차해 만든 기존 발사대와 달리 원통형 전용 발사기를 이용하니 명중률은 높을 것이옵니다.”
“기존 대신기전은 맞으라고 쏘는 게 아니었지.”
기존의 대신기전은 장대를 X형으로 세운 뒤 교차점에 얹고 점화했다.
조준 자체가 불가능한 물건이었다.
“당연히 그보다는 나아야 할 것 아닌가?”
이장손은 침을 꼴깍 삼켰다.
병조판서가 노비 출신이라기에 나름 동병상련인 면도 있겠다, 어쩌면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었으나 완전 반대였다.
실전 경험으로 무장한 그는 사대부 출신 관리들 못지않게 원칙적이었으며 실효는 그 이상으로 추구했다.
“더 할 말 없나?”
“······예.”
이장손은 처량하게 답했다.
화차와 신기전을 부활시킬 웅대한 계략이 대판 깨지자 이장손은 중년의 나이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사실, 누구라도 상급기관의 임원진들 앞으로 불려 나와 하는 말마다 까이면 눈물을 글썽일 수밖에 없으리라.
나아가 이장손은 열정마저 좌절당했다.
그 모습에 병조판서가 답했다.
“직장, 너무 슬퍼하지 말게. 첫술에 배부르기는 힘든 법이지.”
“예에. 크흥!”
“자네는 전하께서도 군기시에서 첨정을 지내셨다는 건 아나?”
“네.”
“전하께서도 처음 신무기를 개발했을 때는 병조판서를 설득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셨을 걸세. 그 ‘전하’께서도 말이야. 새로운 걸 내놓기란 쉽지 않네. 하물며 군대처럼 보수적인 조직에는 특히 말이야.”
“······예.”
“나보다야 전하께서 더 오래 전장에서 일하셨고 안목도 있으시니 설계도는 올려보겠네. 희망을 놓지 말고 내가 지적한 것들을 보완할 방도를 강구하게.”
“알겠습니다.”
“가봐.”
“감사합니다.”
이장손은 킁, 콧물을 삼키며 발길을 돌렸다.
* * *
“군기시 직장 이장손이라는 자의 설계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예상보다 잠재력이 뛰어난 사람이군. 탄두와 연료통이 분리되는 미사일이라니.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개념 자체는 놀랍군.”
“소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개량한 화차의 형태도 익숙했다.
원통형 발사기를 쌓아 올린 형태로, 미래의 전형적인 다연장 로켓 발사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이장손의 작품이었어야 할 비격진천뢰도 엄연히 원형이 존재하는 물건이어서 창의력은 기대하지 않았거늘.
제법이다.
유능한 사람은 우연으로 성공하지 않는 법이지.
내가 무엇을 얼마나 선점하더라도 유능한 사람은 그 위에 다시 탑을 쌓을 거다. 보아하니 이장손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다 좋지만 화약이 문제로군.”
대신기전을 효율적으로 개량했으나, 기존의 대신기전이 두어 발 날려서 사기를 떨어뜨리는 용도였다면 이장손의 개량형은 진짜로 적진에 때려 박는 용도였다.
이런 물건은 고작 한두 발 날려서야 의미가 없었다.
이래서야 개량의 의미가 무색하게도 화약 소모는 도리어 늘어난 형국이었다.
“역시 화약이 문제로군요.”
“오랑캐 놈들은 한 발만 떨어져도 진형을 해체할 거야. 그게 놈들 방식이지. 난전을 좋아하니까.”
“개선점이 있습니까?”
“개선점은 모르겠고 보완법은 있네.”
을룡이 경외 어린 시선으로 물었다.
“무엇이옵니까?”
“동시 탄착 사격을 하는 거지.”
“한꺼번에 떨어지도록 쏜다는 말입니까? 일제사격을 말씀하시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하나의 발사대로 다수의 대신기전을 동시에 탄착시키는 겁니까?”
“바로 이해하는군. 적지에 동시다발적으로 떨어뜨려 흩어질 틈도 주지 않으면 되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번만 쓸어버리면 끝이지.”
“가능하다는 말이옵니까?”
“당연히.”
동시 착탄.
또는 TOT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각기 다른 지점에서 쏜 포탄을 동시에 같은 지점에 떨어뜨리는 거다.
둘째는 하나의 포가 연속으로 쏜 포탄을 동시에 같은 지점에 떨어뜨리는 거다.
결과적으로 적들이 참호로 피신할 시간을 주지 않고 표적지에 쑥을 재배하는 것은 같지만, 내가 말하는 건 후자였다.
하나의 포문이라도 먼저 고각으로 발사해 체공 시간이 긴 포탄부터 보내고 차차 각도를 낮추며 체공 시간이 낮은 포탄을 쏘아 보내면, 발사 간격을 체공 시간의 차이가 메워주기 때문에 동시 착탄이 가능하다.
다만 체공 시간의 간격은 길어봐야 초 단위.
달리 말하면 대포 하나로 TOT를 하려면 초 단위로 장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동장전장치도 없는 요즘 시대에서는 당연히 불가하다.
하지만,
“화차는 하나에 여러 발의 대신기전을 장전할 수 있으니 동시 착탄이 가능하지.”
다연장이라서 포수들이 애쓰면 흉내는 낼 수 있을 거다.
물론 유도장치 없이 추진력만 받고서 수 km를 날아가는 로켓의 정확성은······, 뭐어. 당연하지만 개판일 수밖에 없다.
TOT의 의미가 퇴색될 정도.
즉 이장손의 화차는 애써 실현할 정도로 성능이 엄청나지는 않았다.
“정 이장손이 동시 착탄을 고안해 낸다면 시제품 정도는 만들어주게. 위력이 어떤지나 보자고.”
“알겠습니다.”
* * *
시기상 한여름이지만 이곳의 여름은 선선한 정도다.
그래서 정자에 자리한 사람들은 모두 옷을 껴입고도 더운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다들 기온보다는 자신의 앞에 차려진 연회상에 더 관심이 있었다.
상석에는 연해도 관찰사 유극량이 자리해 있었고 오른쪽 아래 자리에는 용정 군수 이순신의 차지였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소관은 연회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유극량이 답했다.
“군수가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승전한 사람에게 아무런 포상도 하지 않아서야 면이 서겠는가.”
이순신은 최근 해삼위의 야인여진 반란군을 소탕하고 귀환했다.
“게다가 용정군수는 연해도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니 내가 각별히 아낄 수밖에 없네.”
“소관이 이끄는 병사들이 강군으로 평가 받는 이유는 불가피하게 많은 경험을 쌓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이 개발한 특수 당파는 그가 부임한 용정부터 보급되었다.
당파를 땅에 세우고 날 사이에 조총을 끼우면 발포 시의 흔들림도 잡아주고, 근접전 때 대응력을 높여주니 효용이 뛰어났다.
신무기가 검증을 받자 당파는 연해도 전체로 보급되었지만 니탕개를 일방적으로 격멸한 이순신의 부대는 강군으로 평가받아 연해도 각지를 다녀야 했다.
“소수의 강한 병사들에게 의지하지 마시고 도의 병사 전체를 강군으로 길러내셔야 합니다.”
“어찌 나라고 군수처럼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타지역의 수령들은 군수처럼 심지가 곧지 못하여 여진족이나 군사를 다루는데 부족함이 많네.”
자원자가 아닌 수령들은 사기가 극도로 낮았다.
토관에 임명된 현지 유력자들에게 행정을 맡기고 수동적으로 있다가 일이 발생하면 도움이나 구하는 수준이었다.
때문에 연해도의 군사 전체를 강군으로 기르자는 주장은 말만 쉬웠다.
이순신이 임지인 용정을 떠나 여기저기 불려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목민관들을 엄히 다루셔야 합니다. 제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는 자들이 만일 관찰사 영감의 출신을 빌미 삼아 협조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군율을 물어 벌하셔서 일벌백계로 삼으십시오.”
“하하······.”
유극량은 쓰게 웃었다.
어디까지나 말로는 쉬운 간언이었다.
“내가 아니라 군수가 관찰사가 되었으면 좋겠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관찰사 영감께서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 그래. 군수 말이 옳네. 지금은 공을 치하하는 자리이니 공무에 대해서는 차차 나누기로 하고 지금은 자리를 즐기세.”
유극량이 술병을 들자 이순신은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