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27화
79. 장손포 (1)
“저, 전하······.”
이이는 감동했다.
두창은 오랫동안 백성들을 괴롭혀왔다. 조선만의 일도 아니다. 전조는 물론 삼한과 그 이전의 백성들도 두창으로 고통받았다.
걸리면 둘 중 하나는 죽을 정도로 극도로 흉악한 병!
살아남더라도 두창은 마치 자신이 왔다 갔음을 증명하듯 얼굴에 곰보 자국을 남겼다.
무지한 백성들은 극도의 공포감에 오히려 두창을 큰손님, 두신, 마마라며 신격화할 정도였다.
그것을 금상은 극복해낸 것이다. 아니, 정복했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물길을 바꾸고 산을 깎는 자다. 아무리 독한 역질이라도 금상 앞에서 성하기는 어려웠다.
기어코 왕은 병신(病神)의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
“경하드리옵니다!”
이이의 선창에 제신들이 합창했다.
“경하드리옵니다!”
이이만 아니라 다른 신하들 역시 속으로는 감탄과 경외를 느끼고 있었다.
일부는 방향성이 달랐지만 말이다.
대신이라고 몸에 칼이 안 들어가지는 않듯, 두창 역시 그들에게는 백성과 마찬가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제 왕이 정복해주었으니 두창으로 죽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내가 듣기에 나라에서 가장 악질이 두창이라 하니, 상고해보건대 왕이 두창보다 못났다, 왕이 두창 같다, 왕이 두창보다 더하다 세 평가 중에 마지막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두창의 예방법을 개발했다는 투로 왕이 농담하자 제신들이 대소했다.
“하하하.”
“하하하!”
한동안 이어지던 웃음이 잦아들자 영의정 박순이 물었다.
“하온데 두창은 어떻게 예방하는 것이옵니까?”
“경들도 우역은 알고 있을 것이다. 소가 걸리는 두창이라 할 수 있으나, 사람이 걸리는 것과는 비교하면 증세가 무척이나 가볍다.”
“그동안 사람이 소만도 못한 일면이 있음에 탄식할 뿐이었사옵니다.”
“내가 가만히 보니 우역과 두창은 주로 걸리는 대상과 병세의 경중만이 다를 뿐 무척이나 유사하니, 먼저 우역에 걸려 이를 극복해내면 두창을 방비하는 데 도움 되지 않을까 추측했다.”
“오오······.”
박순을 포함해 신하들은 썩 그럴싸한 이론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이야 어떻건 왕이 옳았으니까.
박순이 물었다.
“하오면 우역에 걸렸던 자들은 두창을 앓지 않게 되는 것이옵니까?”
“9할 9푼은 그럴 것이다. 일단 실험대상인 스물세 명의 지원자 모두 두창 환자의 유품을 장기간 이용했음에도 이상이 없었다.”
“만일 환자의 유품에서 병의 기운이 다 씻겨나가 지원자들에게 옮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합리적인 지적이다. 하지만 무방비한 사람을 투입하여 두창에 걸리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자원자들을 두창 바이러스에 노출한 것도 인체실험이지만, 나는 이기는 도박임을 알고 있었기에 감행한 것이지 인명을 업신여겨서가 아니었다.
“나는 두창을 하루라도 속히 진압하기 위해 전국의 백성들에게 우역 접종을 감행하려 한다.”
나는 신하들이 가타부타 말을 달기 전에 다시 나섰다.
“하나 나랏일이란 응당 냉철한 이성으로 고려하고 진행해야 한다. 사사로운 생각이나 감정으로 천만 백성의 명운을 함부로 좌우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중적인 발언이었다.
백성들에게 우역 접종을 해야 한다는 말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 두 입이 아닌 하나에서 나오고 있었다.
하나 제신들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겠지.
그들은 무거워진 분위기에 입을 닫고서 경청했다.
“나 역시 우역 접종이 확실하게 효과가 있는지 검증해야 할 필요성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단지, 효용을 입증하고자 인명을 허비할 수 없기 때문에 억지를 부리려는 것이다.”
좌의정 노수신이 답했다.
“전하께서는 원칙대로 행함을 높이 사시고, 예외를 둘 때는 신중하게 판단하여 항상 최선의 결과만을 내오셨사옵니다.”
“국가의 대사란 경험적인 결과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염려치 마시옵소서. 신들은 주상 전하의 뜻을 받들더라도 예외의 경우를 만드는 것을 항상 우려하고 근심할 것이옵니다.”
“좌의정이 그렇게 말해주니 안도가 된다.”
노수신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사실, 전하께서 예외를 만드시는 일은 한두 번만은 아니었나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나의 일이고······ 백성들에게 우역을 접종하는 일은 나라에서 시행하는 대사이니 각별이 유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흠흠.”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왕의 유치한 변명에 제신들도 저마다 작게 웃었다.
“의정부는 한성부와 각도 감사, 수령들에게 나의 뜻을 전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 * *
화포장 이장손.
그는 이순신과 함께 조총수 전용의 당파를 개발한 공로로 군기시 봉사에 제수됐다.
파격적인 영전에 질시를 보내는 자들도 많았으나, 이장손은 이 자리에서도 부족한 사람이 아님을 입증하면 자신에게는 물론 왕에게도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
그래서 역작을 개발하기로 했다.
‘조총수 당파는 사실상 이 공(公)이 개발한 것이지, 내가 개발한 것은 아니다. 나만의 성과를 보여여 한다.’
그런 웅대한 마음을 품은 지도 한참.
화포장일 때는 몸이 일해서 머리는 따로 놀 수 있었는데, 이제는 머리가 일하니 역작을 구상할 틈이 없었다.
시간만 죽여댄 끝에 관직도 올라 군기시 직장이 되었다.
비원은 여전히 미뤄둔 채였다.
“다들 우역 접종은 맞았나?”
군기시정이 물었다.
이장손을 포함한 하관들은 고개를 숙이며 합창했다.
“예.”
최근 육조거리의 목청 좋은 여인과 신문을 통해 극적인 소식이 퍼졌다.
단지 우역에 걸리는 것으로 두창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도성의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고 보니 우역을 앓은 뒤에 두창 앓은 사람이 있던가?’ 정도로 말이다.
악명에 비해 허무한 두창의 예방법은 나라의 권위와 위세를 곁들여도 영 긴가민가한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관직자들이 모범을 보일 것을 채근했다.
‘재상들도 다 맞았는데 별일이야 있겠어.’
이장손은 별생각이 없었다.
하관들을 모아 놓고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전달하던 군기시정이 해산을 명했다.
그리고,
“이 직장은 나 좀 보지.”
“예······.”
뭔 일이라도 있나, 싶었으나 이장손은 꿀리는 일이 없었다. 최근 게을러진 감은 있지만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았다.
아마도.
관사로 들어서니 군기시정이 말했다.
“자네에게 맡기려는 일은 별거 아니고, 군기시에서 보관 중인 화차랑 신기전들 있지?”
“예.”
“병조에서 퇴역시키라는군. 전부 해체하게.”
“어, 없애버린단 말입니까?”
“그렇지.”
“왜, 왜요?”
당돌하게 묻는 이장손이었다.
바쁘게 사느라 많이 죽었지만, 그에게 폭발이란 여전히 예술이었다.
그런 점에서 화약을 추진제 삼아 적진으로 무수히 떨어지는 신기전과 이를 발사하는 화차는 지상최대의 예술작품이었다.
그것들을 모두 퇴역시키라니.
비극이나 다름없었다.
군기시정이 답했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지. 명령 내리는 데 해명이 필요한가? 자네가 직접 병판 대감 찾아가서 물어보겠나?”
“그, 그것은 아닙니다만.”
“예전부터 화약 효율이 안 좋다는 얘기가 꾸준히 나왔어. 그 때문이겠지.”
“하지만 화약은 남아돌지 않습니까? 양주목 궁방전에서 지급하는 초석의 양만 하더라도······.”
“전하께서 방금 자네가 한 말을 들으시면 초석 공급을 끊어버리실 걸세. 어쨌건 아껴 쓸 생각을 해야지.”
연해도에서 조총의 위력과 효율이 갈수록 빛을 발하는 지금, 맞지도 않을 화살 한 발을 날리고자 원통 한가득 화약을 채워야 하는 신기전은 퇴물이 아니라 폐물이었다.
“내가 일부러 자네 불러서 이런 명령을 전하는 것도, 다 자네를 생각해서야.”
이장손의 화약 사랑은 군기시에서도 유명했다. 폭발에 대한 찬미를 숨 쉬듯이 읊어댔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장손을 단순히 미친놈 취급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누군가는 좋아했다.
부하가 일에 열정적인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자네 손으로 직접 보내주는 거다, 생각하게. 그리고 이만 가봐. 나 할 일 많아.”
“······예.”
이장손은 터덜터덜 관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찾아간 창고에는 수십 여 대의 화차가 오와 열을 맞춰 일단의 군세처럼 도열해 있었다.
한참이나 쓰이지 않아 구석에 몰려 먼지만 먹고 있던 녀석들을 이장손이 직접 끌어내어 닦고 정리한 덕이었다.
하지만 그 광경도 오늘까지였다.
“휴.”
이장손은 공구를 챙겼다.
관노는 부르지 않았다.
본인이 장인 출신이고, 또 제 새끼 같은 화차들이다. 직접 해체하고 싶었다.
하나하나.
잊지 않도록.
“너희들이 무슨 죄겠냐? 세상이 매정한 것이 죄지.”
이장손은 정을 꺼내 금속과 나무 사이의 접합부에 끼워 넣었다.
약간의 힘에 지렛대 원리를 더하면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부품 하나가 파손되겠지.
사랑스런 화차와 신기전들은 땔감, 고철, 화약으로 분리되어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터였다.
“······.”
주저하던 이장손은 결국.
“흐엉!”
자식 잃은 짐승처럼 울었다.
화차들을 이대로 보내기는 아까웠다.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말단 관직자인 이장손에게는 방도가 없었다.
그나마 실낱같은 가능성이 있다면······.
개량이다.
맞지도 않는 화살을 수백 발 쏘아 보내느라 화약만 더럽게 낭비해댄다며 폐물, 고물, 쓰레기, 화약 낭비기 소리를 듣는 화차다.
단점이 명백하니 그것을 개선한다면 다시 채용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사무직을 지내며 차차 죽어가던 이장손의 정열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일 밤.
이장손은 문방사우를 구해 서안에 백지를 펼쳐놓았다.
그리고 연구를 시작했다.
무엇이 화차의 약점인가.
개선법은 무엇인가.
어떤 방법으로 개선할 수 있는가.
개선된 화차의 효용은 무엇인가.
여타 무기가 가지지 못한 어떤 장점이 있는가?!
“오오······ 오오오······! 오오옷!”
* * *
“이봐.”
군기시정은 종삼품의 준 당상관에 해당하는 귀한 몸을 이끌고 임기 내내 찾아갈 일이 없었을 창고를 방문했다.
화차를 해체하라고 맡겨놓은 직장 이장손이 며칠 새 조용한 탓이었다.
몇몇 부류의 인간은 설칠 때보다 얌전할 때가 더 수상스러웠고 이장손은 딱 그런 경우에 속했다.
-드르륵
좌우 문이 열리자.
“아니?!”
군기시정은 경악했다.
해체하라고 명해놓은 화차들이 보라는 듯 오와 열을 맞춰 서 있는 게 아닌가. 오히려 이전보다 관리상태가 더 좋아 보였다.
박살 내라고 명했는데 말이다.
이장손은 예상치 못한 상관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허각스!”
“이게 무슨 짓인가, 직장!”
“그, 그것이 아니오라.”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닌 직장에게 화차를 맡긴 것은 전적으로 배려해준 것인데, 자네는 나를 이렇게 배신하는 건가?”
“아, 아닙니다!”
“철부지 같은 소인배들의 말이 옳았음을 입증하려는 건가? 천박한 철장 따위는 관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자네를 믿은 내가 병신인 건가? 응?!”
“오해이십니다!”
군기시정은 관복 아랫단을 붙잡으며 늘어지는 이장손을 걷어차고는 발길을 돌렸다.
당장 관노들을 불러 모두 때려부수라 명할 참이었다. 겸사겸사 직장의 직무유기 행태에 대해서도 고할 생각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장손은 놓아주지 않았다.
“이것만 봐주십시오!”
“더는 봐줄 생각 없네!”
“그게 아닙니다!”
이장손이 계속해서 늘어지자 관복 어깻죽지에 뿌득, 하고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비단으로 만들어 입는 관복은 억 소리 나게 비싸다. 때문에 막 관문에 들어선 자들은 아버지의 옷이나 타인의 옷을 빌리거나 사서 입는 것도 마다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미친놈이 기어코!”
군기시정은 이장손의 턱을 꺾을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주먹을 들어 올리자 이장손도 반사적으로 얼굴을 막았다.
지저분한 종이를 든 손으로.
죽탱이를 내지르려던 군기시정은 문득 종이에 설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잠깐의 관심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