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26화
78. 정해진 수순 (3)
예조판서 이양원.
미래 역사서에서는 지분이 하나도 없는 자이지만, 이 시대에서는 나름대로 존재감 있는 자였다.
애매한 위치라곤 하나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지금은 공정왕)의 후손이었고 바로 위인 아버지 이원부령 이학정까지 종친의 지위를 유지했다.
자신의 대에서는 끗발이 떨어지게 되었지만, 대학자 이황의 밑에서 공부하여 조상보다 높은 명성을 가졌다.
그런 이양원이었으나······.
“내가 봉상시 부정이라니!”
선생은 앞으로 대감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재상이 아니라는 뜻이오. 징계가 가장 중요한 곳을 지나갔다, 이 말입니다.
“아핡, 아핡······.”
이양원은 고통을 호소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거늘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양원은 별종 왕에게 찍히지 않고자 처신에 애썼다. 그래서 수동적이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최후에 미소 짓는 사람은 자신일 테니까.
착각이었다.
왕은 심계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의 진노는 마른하늘의 소낙비와 같았다.
예측이 불가했고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불합리하니 오히려 공정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더러워서라도 도망치고 싶으나.”
왕은 엄중한 경고를 남겼다.
보름의 근신 동안 처분의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어디까지 떨어질지 몰랐다. 자신이 사직서를 낸다고 고이 가납할 왕이 아니었으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럴 때 전하를 오래 모신 홍 대감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되었겠거늘.”
전 영의정 홍섬은 노모를 모시고 팔도강산 유람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를 대신해 박순이 영의정 자리에 올랐으나 빈번히 깨지고 있었다.
명목상 하관인 직제학이 개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이놈 위로, 내 밑으로 싹 다 집합’을 당해서 머리까지 박지 않았나.
평판은 좋았지만 신용은 안 가는 사람이었다.
“으음. 결국 그 수밖에는 없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병조판서 이 대감······.”
이양원은 종친으로 우대받은 아버지 밑에서 자라 당대 최고의 유학자 밑에서 공부했다.
그런 자신과는 반대로 병조판서 이을룡은 노비 출신에다 주먹구구로 학문을 배웠다.
현재 그의 평가나 신분이 어떻건 자신과는 뿌리부터 다른 존재였다. 그래서 친분을 만들지 않았고, 우연히 엮일 때도 사무적인 태도를 지켰다.
“이런 사이니 이 대감이 나를 도와줄지도 의문이거늘 도리어 망신만 당하면 어쩐단 말이냐?”
이양원은 똥 마려운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혈맥과 학맥의 차이로 알량한 자존심을 발휘하려는 게 아니었다. 근신 기간이 끝나가는 지금, 이양원에게는 퇴로가 없었다.
만일 이을룡에게 도움만 받을 수 있다면 바짓가랑이도 붙잡고 매달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한 이유를 잘 알고 있을 이을룡이 순순히 도와주겠냐는 거다.
“이양원아, 어쩌자고 왕의 유일한 총신에게 줄 하나 댈 생각을 못 했느냐?”
끙끙 앓았지만 대안이 없었다.
사실 이을룡의 바짓단이라도 붙잡고 매달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고민은 며칠 전부터 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오직 촉박해진 기한뿐이었다.
그 기한이 다하면 과연 왕은 어떤 징벌을 내릴까?
관직이 지금보다 더 떨어질 수도 있었다. 봉상시보다 더 굴욕적인 관청은 많았다. 가축을 키우는 사축서나,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 등.
어쩌면 교화소행일지도 몰랐다.
재상까지 지내고서 말년에 악질 죄수들과 곡괭이질만 하다, 이번에 도성에 불려온 놈들처럼 인체실험을 당하는 수가 있었다.
‘흉악하게 생긴 자들이 지키는 격리소에 갇혀 다른 죄수들과 두창 환자의 의복을 돌아가며 입게 한다던데!’
최근 떠도는 풍문을 떠올린 이양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 안 돼!”
이양원은 경악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갑에 고이 숨겨둔 쇄은을 모조리 챙겨 허둥지둥 저택을 나섰다. 향하는 곳은 병조판서 을룡이 기거한다는 북촌 관광방이었다.
* * *
-쿵, 쿵, 쿵!
“병판 대감, 문을 열어주시오! 나 예조에서 판서하던 이양원이요!”
차마 예조 판서라고는 못하는 이양원이었다.
흔치 않은 휴일이거늘 백주 대낮에 소란을 벌여서일까. 솟을대문이 열리고는 고대하선 사람이 등장했다.
“벼, 병조 판서 대감.”
이양원은 웃음을 쥐어 짜냈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이을룡은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두어 걸음 물러나 뜰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오시지요.”
“예, 예에······.”
이양원은 서둘러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정갈했다. 을룡을 뒤따라 입장한 사랑방도 마찬가지였다. 벼락출세해 치장을 좋아할 줄 알았거늘 장식이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의외의 검소함이다.
상석을 점한 을룡이 물었다.
“무슨 일로 이 사람을 찾으셨습니까?”
“그것이······.”
“아.”
이양원이 채 대답을 잇기도 전에 을룡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송구합니다. 괜한 질문이었군요. 짐작은 갑니다. 사실, 예판 대감께서 찾아올 줄은 예상치 못해서 말이에요.”
“아, 아닙니다. 저야말로 더 송구하지요. 일단 사죄의 차원에서 조금 챙겨온 것이 있습니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이양원은 허리춤에 매단 쇄은 꾸러미를 풀어 내놓았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이 사람은 예판 대감께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을룡은 다시 사양하듯 손을 내저었다.
그의 대답에 이양원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염파가 인상여에게 매를 청하던 기분이 이러했을까?
“병조 판서의 그릇은 소관의 것보다 아득히 크십니다.”
“아닙니다, 하하하. 저라고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단지 오래전부터 전하를 모신 사람으로서 주인에게 흠결이 가지 않게 하고자 애썼을 뿐이지, 그릇은 소인배입니다.”
“소인배는 스스로를 소인배라고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 사람이 듣기로, 소인배는 상대의 그릇이 더 크다고 인정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을룡의 능청스러운 답에 이양원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예판께서는 이 사람에게 빚지신 것 없습니다.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을룡은 작게 웃어주고는 답했다.
“전하께서 예판에게 진노하신 이유는, 직설적으로 말해 외국의 동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명나라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답니까?”
“외국이 명나라만 있는 건 아니지요.”
“명 외에는 순 오랑캐들 아닙니까? 그들에게 딱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주변의 정세를 다양하게 알아야 큰 그림을 짤 수 있는 법입니다.”
“으으음.”
이양원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나라를 다스림에 내치만 있지는 않음을 알지만, 조선이 외국을 대하는 방식은 정해져 있다.
명은 세계의 제일가는 문명국이자 초강국으로서 사대한다.
이외의 북쪽 오랑캐나 남쪽 오랑캐는 야만적이나 위험하니 회유와 토벌로 위협이 되지 않게 한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대외정책인 사대교린(事大交隣)이다. 관리들이 조선 밖의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이양원만 아닌 이 시대 관리 모두가 가진 한계였다.
오직 별종 왕과 오래 함께한 을룡만이 예외였다.
“전하께서는 안만이 아니라 밖으로도 큰 그림을 짜시길 원합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하였습니다. 설령 야만적인 오랑캐들이라도 그들의 사정을 알지 못해서야 그림을 짜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무유기를 했다는 겁니까?”
“예.”
“전하께서는 여진족이나 왜구들의 사정에 대해 알아오라 하명하신 적은 없으셨잖습니까.”
“전하께서는 예조라면 응당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이양원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왕에게 극진하게 충성하는 이을룡 앞만 아니었어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으리라.
“나쁘게 생각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기대 없는 실망은 없는 법이니까요. 전하께서는 예판 대감에게 거신 기대가 많았기에 실망이 크셨던 겁니다. 그리고 예판 자리가 어디 간 것도 아니잖습니까? 다시 복직시키겠다는 안배시지요.”
이양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왕이 자신을 숙청할 생각이었다면 왜 예조 판서 자리를 공석으로 두겠는가. 당장 빈자리에 새 사람을 꽂았을 터이다.
하지만 성은이 가시지 않았다고 안도할 수는 없었다.
“제가 무능해서 전하께서 거시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니, 앞으로도 이런 일이 거듭 발생할까 두렵습니다.”
“두려워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신하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하하.”
을룡은 쾌활하게 웃었다.
그의 태연한 대답에 이양원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왕의 내리는 난제를 시원하게 해결한 신하가 없었다.
다들 한참이나 고생하고도 마땅한 결과를 내지 못했고, 왕이 실망한 티를 팍팍 내며 직접 나서는 모습에 절망하기 일쑤였다.
의정 대신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구도장원공 이이조차 왕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다. 그들도 꼼짝을 못 하는 사람이 왕인데 자신이라고 별수 있을 리 없었다.
“전하께서는 예판 대감께서 이 사람의 누처를 방문하셨다는 것도, 또 이 사람이 예판 대감을 도와주셨다는 것도 아실 겁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제 방문한 이양원이었다.
“전하의 눈과 귀는 용안에 달린 한 쌍이 전부가 아니지요.”
“음.”
“이 사람이 비책을 알려드려, 전하께서 벌을 내리신 의미가 없어졌으니 예판은 곧 복직될 겁니다.”
“병판께 해가 가는 건 아닌지······.”
“전하께서는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리고 신하들을 아끼시니까요. 이 사람에게 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병판이시야 전하를 오래 모셨으니 저보다야 잘 아시겠지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곤란한 상황에 처하신다면, 알려주시지요. 어떻게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예, 하하.”
* * *
이을룡의 예측대로, 근신 기간이 끝나자 이양원은 예조 판서로 복직했다.
다음 어전 회의가 되어 원래 자리로 돌아온 이양원은 누구보다 앞서서 입을 열었다.
“전하.”
“말하라.”
“동래의 왜관에 낭청을 보내 왜구들의 동향을 조사케 하였사옵니다.”
“충분히 반성을 하였나 보군.”
“예.”
“그만하면 됐다.”
이양원은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좌우 중신들은 어째서 낭청급 인사를 고작 왜구들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파견하느냐,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양원은 조용히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에 왕이 화제를 돌렸다.
“그대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 내의원정은 앞으로 나와 전하라.”
“예.”
대오 사이에 숨어 있던 내의원정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내의원정이 밝혔다.
“기쁜 소식입니다. 두창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
기쁘다는 말과는 달리 제법 담담한 전언이었으나 제신들의 눈동자는 한없이 커지고 동요했다.
두창의 악명은 사나운 여진족과 미개한 왜구들을 능가했다. 오죽하면 왕가의 일원에게만 붙는 마마라는 존칭이 질병에 붙겠는가.
이와 비견될 정도로 독한 존재는 오직 금상뿐이었다.
그리고 도성에는 금상이 죄수들에게 두창 환자들의 옷을 돌아가며 입게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두창이 예방 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과 깊게 관련되어 있으리라.
이독제독이라던가?
금상과 두창 중에서 더 독한 쪽은 금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