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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25화 (225/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25화

78. 정해진 수순 (2)

당일 밤.

이곳의 풍경은 조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확하게는 조선에서 남동쪽으로 800km 정도의.

앞머리를 싹 벗기고 뒷머리를 말아 대머리에 개똥을 얹은 듯한 멍청한 헤어스타일을 선호하는 야만인들의 소굴.

그 속에서 왜구들은 좌우로 늘어져 앉아 주인에 대한 예를 표했다.

하나가 입을 열었다.

“말이야 전의를 고취하기 위한 전봉(轉封, 영지를 옮김)이라지만, 적인 모리의 땅으로 영지를 옮기라니요?! 이건 숙청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사 하나가 언성을 높였다.

상석의 다이묘가 조용히 답했다.

“히데미츠. 나는 주군의 결정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적에게서 의탁한 자로 시작해 오십만 석고의 대영주에 이르렀다.”

“장인 어르신, 이제는 그 오십만 석고도 사라지고 적지의 이름뿐인 영지만 남았습니다!”

“······.”

“후다이(譜代, 대대로 주인을 모신 가신)인 사쿠마 노부히데는 장남과 할복했고, 하야시 히데사다와 미노부터 오다에 충성한 안도 모리나리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영지를 몰수당했습니다!”

바로 일가친척과 함께 적과 내통하여 모반을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대대로 오다 가에 충성했으며, 그래서 오다 가가 승승장구하자 덕을 제대로 본 하야시나 오다 가가 부상할 때부터 충성한 안도가 배신할 이유라곤 추호도 없었다.

히데미츠가 간청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이건 하야시와 안도가 당한 몰수와 다르지 않은 처우입니다! 노부나가가 이미 세상 전부를 얻었다는 착각에 취해 수족들을 숙청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

상석의 노인, 아케치 미츠히데는 눈을 감은 채 침묵했다.

가신단은 히데미츠의 과격한 발언을 조금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도 히데미츠와 같았다.

주인인 아케치 미츠히데가 영지를 잃게 된다면 그를 따르는 가신들 역시 영지를 잃는다.

그들에게도 휘하의 가신과 가로가 있었다. 챙겨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만일 윗사람이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해줄 생각이 없다면 가신단도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왜국의 질서 구조는 단순하고 명료했다.

봉공과 은혜다.

수하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면 주인은 부하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것이다.

권력과 이익을 위해 아비와 자식이 배신하고 형과 동생이 배신하는 냉정한 시대다. 설령 주군과 수하 사이라도 일방적인 거래란 있을 수 없다.

아케치 미츠히데.

과연 그는 가신단을 위해 오다의 부당한 처우에 굴복할 것인가.

혹은 맞서 싸울 것인가.

* * *

허준은 황해도로 떠났다.

그가 고생할 동안, 나는 반전을 꾀하고자 했다.

신하에게 어려운 일을 맡겨놓고는 한동안 구경하다 이상적인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나의 나쁜 취미이자 인생의 낙이었다.

“전하, 어찌하여 우역에 걸린 소를 찾으시옵니까?”

상선 김기문이 물었다.

우역에 걸린 소라니, 미래에서 글자 좀 봤다는 인간들이라면 아주 진부하고 뻔한 전개가 벌어지겠다고 생각하겠지.

과연 그대로다.

나는 종두법을 실현할 생각이었다.

“다 쓸모가 있어서 찾는 것이다.”

“신이 어찌 전하의 명령에 의심을 품겠사옵니까? 단지 궁궐에 소를 들이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 꼭 우역에 걸린 소여야 하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옵니다.”

“말해주더라도 믿지 못할 터이다.”

김기문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참, 상선이랍시고 왕을 오래 모셔서인지 사람의 약점을 잘 알았다.

“두창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두창이 예방 가능했사옵니까?”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김기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역 걸린 소가가 두창을 예방하시는 것이옵니까? 오직 우역 걸린 소만이 제에서 효험이 있사옵니까?”

조선시대 냄새가 씨게 나는 발언이었다.

소로 제사를 지낼 거냐니.

“내가 그동안 해온 짓거리가 있거늘 창의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추측이로군.”

“전하께서 팥으로 메주를 쑤신대도 아니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옵니다. 하나 우역 걸린 소에게 무슨 용처가 있겠사옵니까?”

“오호통재라. 가랑잎으로 물 위를 걷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드는 내가 우역 걸린 소로 고작 제사나 지내겠는가.”

자신 있게 말하니 김기문은 정말인가 싶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리액션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아, 내시 노릇도 힘들겠다. 상관이 미친놈이라서. 내가 생각해도 나 같은 놈이 위에 있으면 사직 마려울 거다.

꼬우면 나처럼 왕이 되는 수밖에 없다. 예전 상관이 어지간히 미친놈이어야 말이지.

“다 방도가 있다. 내 직접 보여줄 터이니 일단 소부터 공수하라. 그리고 교화소 죄수 중에서 두창에 걸리지 않은 자들에게서 자원자를 받아라. 많을 수록 좋다.”

죄수를 동원한 생체실험이라니 참으로 비인도적이지만 중세시대에 무엇을 기대하겠나?

천만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중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을 동원하는게 맞다.

타인과 사회에 막중한 피해를 끼쳤으니까 교화소에 간 거 아닌가.

그럼 한 목숨 초개처럼 불사질러서 갚아야지.

“전지하겠나이다.”

“그려.”

승정원의 일 처리는 빨랐다.

도성에는 많은 사람이 살았고 주변에는 경작지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차이는 게 소였고 우역 걸린 놈 하나 공수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도가 빨라서 좋군.”

나는 후원을 구경하며 대동한 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똘망똘망하고 커다란 눈을 보니 인간은 가지지 못한 순수함이 느껴졌다. 괜히 백정들이 소를 도축할 때 얼굴에 천을 덮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순진한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살생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이냐.

이 짐승에게 유일한 죄가 있다면 맛있다는 것뿐이다.

-음뭐어어······

불쌍한 소는 후원에 코를 박은 채 풀을 뜯었다. 그것이 약속된 파멸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는 행위임을, 소는 알까?

아!

셰익스피어가 연출하지 않아도 삶은 이미 비극이다!

며칠 뒤.

“죄수들에게 우역을 접종한 지 달포가 지났다. 그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내의원정이 보고했다.

“전원 환부에 발생한 딱지도 다 떨어지고 건강도 회복했사옵니다. 완전히 치료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예상대로다.”

“하온데 어찌하여 ‘그것’의 입수를 명하셨사옵니까? 내의원에서 보관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물건이옵니다.”

“죄수들 수용소에 보내라. 그리고 각 혼자가 돌려쓰게 하라.”

끄음!

내의원정이 숨이 막힌 사람처럼 경악했다. 지칭조차 쉽지 않은 입수품의 정체는 두창환자가 입었던 옷이다.

의원들조차 맨손으로 만지지 못하는 극도로 위험한 물건.

위험성을 미래로 치자면 고준위 방사능 폐기물에 상응한다.

그런 물건을 내의원에서 확보, 보관한 것만으로도 내의원정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하물며 왕은 이제 두창 환자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저, 전하.”

“환자 수용소는 정자의 사람들이 지킬 것이다.”

정자의 사람들.

공인된 관품도 없이 공공연히 왕의 후원을 출입하는 인원들을 일컫는 말이다.

원칙에 위배되는 자들이라며 공공연히 비판 받았으나, 그들이 재령에서 실력을 과시하자 중신들은 입을 닫았다.

산마저 폭파하는 자들이 집 한 채 못 터뜨리겠는가?

“하오나······.”

“두창이 외부로 퍼지는 일은 없을 것이야. 내가 장담하겠다. 만일 조금이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수용소 전체를 불태워 없애겠다.”

“······알겠사옵니다.”

내의원정은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금상은 온갖 이상하고도 비상한 업적을 남겼다. 하찮은 죄수들에게 두창을 옮기려는 이유가 고작 그들이 고통스럽게 죽는 모습을 보기 위함만은 아니겠지.

설령 맞다 하더라도, 왕이 작정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의원에서 담당하는 편이 나았다.

“수용소를 오가는 의원들 중에 병이 옮는 자가 없도록 극도로 주의하라.”

“하명하신 대로 두창에 걸리지 않은 자들은 일체 배제하고 있사옵니다.”

“그건 최소한의 경계다. 내가 말한 다른 지시 사항들도 이행하고 있는가?”

“예. 수용소를 출입할 때는 입구에 비치한 별도의 의복으로 환복하게 하고, 또 죄수나 그들이 쓰던 물건에 일체 손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사옵니다.”

“전염병 환자들을 다루는 일은 재삼 주의와 경고를 거듭해도 부족하지 않다.”

“지당한 분부이시옵니다.”

내의원정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금상이 두창의 위험성을 간과하면서 벌인 일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앞으로 매일 죄수들의 건강 상태를 보고하라. 특히 두창의 조짐이 조금이라도 발견된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즉시 알려야 한다.”

“각골명심하겠나이다.”

“좋다. 이만 물러가라.”

“예.”

내의원정은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상선 김기문이 보고했다.

“전하, 병조 판서의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드르륵

좌우 문이 열리고 을룡이 입장한다.

평소보다 더 진지한 인상이었다.

막상 을룡은 왕을 발견하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무엇을 쓰고 계신 것이옵니까?”

“슬슬 볕이 따가워져서 말이야.”

나는 선글라스를 살짝 들어 보였다. 전근대의 쉰내 나는 스타일이 아니라 21세기 간지에 맞춘 선글라스다.

기술력의 한계로 그라데이션은 넣지 못했다.

그리고 콧등도 좀 무겁다.

재질이 유리라서.

하지만 희생 없는 간지란 없다.

“병판도 하나 원하나?”

“성은은 망극하옵니다만 사양하겠사옵니다.”

“아쉽군.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왜관에서 입수한 첩보이옵니다. 왜추 직전신장(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이 명지광수(明智光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배신을 당해 죽고, 수하들이 사분오열되어 싸우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혼노지의 변인가.

조선의 불구대천 원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난을 신속히 진압한 공으로 권력을 휘어잡는다.

“흠.”

선택의 분기로군.

왜구들이 사분오열한 지금이, 내가 개입하기에는 최적의 시기다.

하지만 그들이 판을 깨려는 외부 세력의 개입을 순순히 납득할지 의문이다.

궁지에 몰린 다이묘들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건 못하겠냐만, 달리 말하면 개입을 위해 결정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제야 굴포운하라는 큰 공사를 마쳤고 북방의 영토를 안정화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왜국의 혼란에 개입하자는 주장은 명분도 실익도 없는 억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선을 대는 정도는 문제 없겠지.’

만일을 위해서라도 끈 정도는 만들어둬야 했다.

김자강이나 율보리와의 연 없이는 북방을 먹지 못했으리라. 왜국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열도에도 끈이 있어야 여차할 때 힘을 투사할 수 있었다.

물리적이건 정치적이건.

‘고려할 수 있는 세력은 다이묘 세력은 모리, 류조자, 오토모 정도인가.’

왜놈들이 동족상잔을 일으키는 중부는 개입할 여지도 가치도 없다. 살아남은 놈은 배가 부를 테고, 죽을 놈은 도와주는 의미가 없으니까.

중부의 형세에 겁을 먹고 사태를 주시하는 세력이 건드리기 좋았다.

그리고 지형적으로도 멀리 있는 관동보다야 큐슈나 주고쿠가 훨씬 낫겠지.

상기한 세 세력은 이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자들이다. 시마즈는 꽤나 악바리 있기로 유명하지만 큐슈의 정남쪽에 있어 접근하기 어려웠다.

‘모리······.’

120만 석고로 서부 다이묘 중에서는 가장 강한 세력이다. 첩보상 여러모로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 대를 가는 법이다.

조선의 지원을 반기기보다는 독으로 여기겠지. 그 정도의 분별력은 발휘할 줄 아는 놈들이다.

‘류조지······.’

큐슈 북부의 강자로 지리적으로도 조선에서 가장 가까운 종자들이다.

이 점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지만 당주 류조지 다카노부의 평가가 거슬린다.

의심이 많고 음흉하다.

이런 놈들을 구슬려 수족처럼 부리기란 쉽지 않다. 당장은 따르더라도 이해관계가 청산되거나 아쉽지 않은 상황이 되면 바로 등을 돌리겠지.

‘오토모······.’

마찬가지로 큐슈의 세력이다.

서양과의 무역으로 재미를 봤는지, 전 당주 오토모 소린은 쇼군에게 막대한 헌금을 내고 큐슈의 명목상 지배자 자리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력으로 내부가 혼란스러웠고 외부에서도 서쪽에서는 류조지, 동쪽으로는 모리, 남쪽으로는 시마즈와의 충돌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최근에는 열도 패자 오다 가에 베팅하여 모리의 후방을 공격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고 그의 명령으로 모리와 싸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츠히데와 싸우러 군을 돌렸다.

졸지에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것이다.

‘똥 밟았지. 아케치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킬 줄은 누구도 몰랐으니, 오토모가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토모는 굉장히 혼란스럽겠지. 이런 상황에서 외부 세력의 개입은 어쩌면 동앗줄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더 판단할 것도 없군.

“오토모에 내가 접촉할 의향이 있음을 전해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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