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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24화 (224/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24화

78. 정해진 수순 (1)

재령을 다녀온 김성일은 대동한 화공이 그린 그림을 바쳤다.

권자 사이에 말린 한 폭 종이에는 산이 산산조각이 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 폭발은 예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만한 예술도 없으리라!

“재령까지 가서 두 눈으로 직접 산이 폭발하는 모습을 봐야 했거늘.”

신하들이 얼마나 말리던지.

자기는 놀아도 왕이 노는 모습은 볼 수 없다는 거다. 참으로 이기적인 인간들이다.

“전하.”

“무슨 일인가, 영의정?”

“재령의 일로 일각에서 불만을 표하고 있사옵니다.”

“나처럼 산이 폭발하는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함을 아쉬워한단 말인가?”

“아니옵니다. 산이 높고 물이 흐르는 것은 천지 만물의 이치인데 전하께서는 물길을 바꾸고 산을 깎았으니 하늘의 뜻에 어긋난다고 하옵니다.”

16세기 환경주의자라니 이게 실화인가?

“어떤 머저리들이 그따위 발언을 지껄인단 말이냐.”

“성균관 유생들이옵니다.”

“아, 유생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다 보면 질리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지랄쟁이라도 지랄만 하다 보면 지칠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보아하니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성균관도 폭파해 버리고 싶군.”

“저, 전하.”

“진심이긴 하지만 여건이 되지 않음을 아쉬워할 뿐이다.”

신하들은 당혹한 표정으로 입술만 핥았다.

“그런데 유생들은 왜 아가리만 놀리고 권당(捲堂)이나 공관(空館)은 아니 한단 말인가?”

권당이란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음을 뜻하고, 공관은 숙소에서 떠남을 뜻한다.

성균관에서는 출결을 식당에서 식사했느냐로 파악했고 출결이 부족한 유생은 시험을 칠 수 없었다.

즉, 권당과 공관을 통한 시위는 나라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안 드니 관리가 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과거에는 유생들이 이렇게 시위를 벌이면 성균관의 당상관까지 직접 나서서 달래주고 왕에게 유생들의 시위 사유를 전달했다.

이에 왕이 비답을 내리면 유생들은 납득하고 식당으로 돌아가거나 계속 째면서 보다 나은 대답을 기다렸다.

오냐오냐도 이런 오냐오냐가 없었다.

“권당이나 공관을 해봐야 내가 조금도 편의를 봐주지 않을 건 아나 보지? 그러면서 뒤에서는 입을 놀려? 아주 건방진 놈들이로고.”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서 원리와 원칙만 배워온 자들이옵니다. 너무 노여워 마시옵소서.”

이이가 달래듯 말했다.

“유생 중에는 손주와 손녀까지 본 인간도 있거늘 어떻게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만 치부할 수 있겠는가?”

당장 대과 급제자의 평균 연령만 해도 삼십 대 중후반이다.

결혼을 고작 십대 후반에 하는 세상이니, 자식을 일직 본 사람이라면 벌써 할아버지가 된 인간도 있다는 뜻이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자들이 철부지처럼 굴어서야 쓰겠는가? 식당을 보름 동안 폐쇄해라. 내가 강제로라도 권당을 하게 만들어주겠다.”

“저, 전하…….”

“사사건건 개소리로 나랏일 초칠 인간들 밥 먹여주자고 세금 거두는 게 아니다. 이행하라. 이견은 받지 않겠다.”

성균관을 폭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부처의 대자비를 실현했다.

중신들은 내가 한 번 마음을 굳히면 돌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생들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 다른 일을 꺼냈다.

“전하.”

“공조판서.”

“신이 황해도를 다녀오면서 현지 사정을 전해 듣게 되었는데 해안의 일부 고을이 침수로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 하옵니다.”

“문제가 심각하군. 그런데 황해도 감사에게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의정부에서는 아는 바가 없는가?”

세 의정들을 훑어보며 물으니 영의정 박순이 답했다.

“감사가 일부러 보고를 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피해 현황을 조사하느라 보고가 늦어지는 줄로 사료되옵니다.”

“흠.”

“침수된 지역은 백성들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되는 것도 피해가 크지만, 전염병까지 덮치는 경향이 있사옵니다. 미리 대비함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현명한 지적이다.”

침수지는 갖가지 이유로 질병을 초래한다.

밀려들어 온 물이 바다나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지역에 있던, 혹은 오물이나 짐승의 분변에 있던 병균을 사방으로 퍼뜨리기 때문이다.

물이 빠져나간 뒤에는 무수히 많은 웅덩이가 만들어져 부패와 모기 번식의 온상이 된다.

농사를 망쳐 궁핍해진 사람들은 면역력이 취약해지니 하나의 법칙처럼 전염병이 돌게 되는 것이다.

“구휼을 위해서는 피해 현황부터 알아야 한다. 황해감사에게는 지체 없이 보고를 올리게 하라. 나랏일과는 별개로 금천병원에서도 의료진을 선발하여 파견하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 *

전문화가 부족한 시대라고 의료진들까지 모든 의료분야에 능통한 것은 아니었다.

명의로 유명한 허준도 실록에서는 자신이 침을 놓지 못한다고 말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가 진정으로 소질을 타고난 분야는 전염병 관련이었다.

저서인 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 등에서는 전염병을 예방하는 방법과 치료하는 방법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리고 황해도가 전염병에 무척이나 취약해진 상태이지.’

허준에게는 그만의 목표가 있음을 안다.

의서를 통일해 현시대 의료의 정수를 추출하는 거다. 진정한 의료 발전의 기틀로 삼을 수 있도록 말이다.

존중하고 지원할 가치가 있는 목표다.

그래서 존중하고 지원했다. 허준은 금천병원의 원장이 되었다. 의료지식을 쌓기에는 최적의 공간이자 위치다.

하지만 진정으로 위대한 일은 방구석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역사가 인정하는 의료인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씨앗이 꽃필 자리가 있다면 마땅히 소개하고 주선함이 옳았다.

“전하.”

밖에서 내시가 불렀다.

“금천병원 원장 허준의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윤허가 떨어지자 미닫이 문이 열리며 허준이 입장했다.

굉장히 오래간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그동안 나라를 다스리느라 바빴고, 허준은 그만의 목표를 추구하느라 바빴다.

“얼마만인가?”

허준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예를 표하며 답했다.

“족히 몇 년은 되었사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소신이 직접 면대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옵나이다.”

“그래. 그랬지. 일은 잘되어가고 있나?”

“예.”

대답이 짧았다.

아니, 내가 허준에게서 고지식한 예법을 바라서가 아니다.

그가 하는 일은 상당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복잡한 작업이다.

이 시대에 통용되는 의서는 셀 수 없이 많았고 의서마다 의료와 질병에 대한 시선, 시야, 철학이 달랐다.

그래서 같은 증상에도 구분과 해석, 접근 방법이 달랐다.

개중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란 힘든 일이다. 필요하다면 실험해야 했고 실험을 통해 신뢰도 있는 결과를 얻어내기란 더욱 힘들었다.

일이 잘 될 수 있겠는가?

“잘 되고 있다니 이상한데.”

“…….”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떤 일들은 최선만 다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지. 정 문제가 없다면 간섭하지 않겠지만, 아니라면 말해주게.”

내가 의료인은 아니나 지금보다 수백 년은 발전한 세상에서 살았다.

그 시대에서는 상식에 불과한 것조차 이 시대에서는 둘도 없을 진귀한 가르침이 될 수도 있었다.

허준이 나에게 자신을 가르칠 기회를 줄지는 그의 마음에 달렸지만 말이다.

응하지 않는다고 따질 수는 없겠지. 객관적인 시야에서 나는 의원을 상대로 의료를 가르칠 인물은 아니니까.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허준이 운을 뗐다.

나는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생각만 해오던 일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사옵니다.”

“공감하네.”

“과연 신이 진정으로 세상의 의서들을 취합할 능력이나 자격이 있는 것인지…… 작업이 늦어질 때마다 고민하게 되옵니다.”

“전형적인 증상이로고.”

열의를 가지고서 일에 착수했다가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흔히 벌어지는 증상이었다.

과연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의심과 의심이 꼬리를 물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도, 하는 와중에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사람을 괴롭힌다.

그런 상태에서 반전을 찾지 못하고 한참이나 방치되면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다. 그리고 다 타고 남은 장작처럼 열의를 잃어버린다.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는 없지만…….

“자네는 자네가 하는 일에서 누구보다 자격과 가질을 갖추었네. 다른 사람들은 추구하지 않은 길이니까.”

“망극하옵니다.”

“형식적인 위로로 들리나? 그럼 내가 확신을 들게 만들어주지.”

나는 장막을 들추고 미래의 지식을 전수했다.

그것을 증명할 도리가 없는 시대에서는 터무니없는 소리에 불과했다. 나는 오직 왕의 권위에 기댈 뿐이었고 허준이 믿을지는 의문이었다.

만일 허준이 어떠한 반응이라도 한다면 그의 생각을 읽겠거늘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경청할 뿐이었다.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지, 헛소리로 치부하고서 딴생각이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치지 않았다.

기왕 꺼낸 금단의 지식이다.

둘도 없을 가르침이니 나는 이 한 번의 기회에 정성을 다했다.

“이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의 전부일세. 이제 자네는 누구보다 앞선 지식을 가졌어. 쓸만한 건 별로 없겠지만 말이야.”

나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개념과 원리에 지나지 않았다. 환자를 치료하는 실전 의료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기본 없는 응용은 없다.

잘만 이용한다면 허준은 그의 특기인 전염병에 대해서는 족히 수 세기를 앞서리라. 바이러스만 해도 19세기나 되어서야 존재가 추측되었다.

허준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그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보채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있었고 허준은 어렵사리 덧붙였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알고 계시옵니까?”

“내가 한 말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나?”

“믿기는 어려우나 전하께서 허언을 남발하셨으리라 생각지는 않사옵니다.”

왕의 권위가 좋긴 좋군.

“내가 가진 은밀한 지식의 일면을 엿보여 준 적은 자네가 처음이 아닐세. 반응이 한결같더군. 어떻게 알고 있냐고?”

나는 웃으며 답했다.

“나의 대답도 한결같을 수밖에 없지.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가 아닐세.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사실이 아니옵니까?”

“당연히 사실이지. 내가 입증까지 해줄 수는 없고, 대신 검증할 수 있는 장소는 마련해 줄 수 있네.”

“어디이옵니까?”

“황해도의 몇몇 고을이 침수되었네. 피해 규모는 보고가 안 들어와서 미상이지만 직접 다녀온 공판의 말을 들어보면 무시할 정도는 아닐 것 같더군.”

“원장의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무슨 상관인가. 자네가 왕도 아니고, 일개 원장인데 자리 좀 비운다고 별일이야 생기겠나. 쓸만한 사람들을 데리고 황해도로 떠나게.”

허준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게 만들어 주지.

“명령일세. 황해도 떠나게. 마치 삼장이 불경을 구하기 위해 서천으로 떠난 것처럼, 그대도 황해도에서 내가 한 말의 진위를 확인하게. 그러고 나면 완성될 책 서문에 한 줄 정도는 적어놓을 게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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