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23화
77. 전지전능 (2)
“이게 화약의 정수이옵니까?”
화포장이 물었다.
고단한 작업과 복잡한 절차 끝에 정체불명의 액체가 남았다.
“나도 궁금하네. 과연 이것이 내가 원하던 결과물이 맞는지.”
화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시대다.
몇 년 동안이나 방치된 나의 뇌 한구석을 뒤적이는 것도 일이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나는 밑바닥부터 전부 쌓아 올려야 했다.
이상적인 결과물이 나오기는 어렵다.
단지 최소한의 기능은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걸 확인할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직접 확인해 보세.”
나는 철판 위에 종이를 깔고 플라스크의 액체를 한 방울 부었다. 그리고 작은 망치를 가져왔다.
그러자 화포장 하나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의아한지 물었다.
“무엇을 준비하시는 것이옵니까?”
“만일 내가 원하던 결과물이 만들어졌다면, 단지 액체를 가볍게 치는 것만으로도 폭발할 걸세.”
“어떻게 치는 것만으로 폭발까지 한단 말입니까?”
“무척이나 민감한 물질이기 때문이지. 그러니 다들 주의하게. 만일 내가 성공했다면 그대들은 화약 대신 이걸 만들어야 할 테고, 보관에 조금이라도 부주의했다간 한 조각도 안 남을 테니까.”
긴장 어린 침묵이 감돌았다.
그사이에서.
나는 액체 위로 망치를 떨어뜨렸다.
-팡!
경쾌한 폭음이 귀를 때렸다.
눈 깜짝할 사이, 액체에 젖었던 종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주 작은 파편만이 주변에 조금 흩날렸을 뿐이다.
화포장들은 경이어린 탄식을 흘렸다.
성공했냐 실패했냐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고작 한 방울의 액체가 한 줌 화약에 맞먹을 정도로 요란하게 폭발했다.
그리고 만일 왕의 손에 들린 투명한 도자기에 담긴 액체 전체가 폭발한다면…….
“성공했다.”
화포장들은 경외와 공포감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겨, 경하드리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나는 플라스크를 걸어두고 물었다.
“다들 반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았겠지?”
“예……. 신은 모든 과정을 외웠나이다.”
“앞으로 자네들은 이곳 정자에서 ‘화약의 정수’를 효율적으로 추출하는 법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화약과 마찬가지로 초석과 유황, 그리고 기름으로 만들어지는 이 ‘화약의 정수’라는 물질은.
니트로글리세린이다.
이걸 다공성 흙인 규조토에 부어 반죽한 것이 알프레드 노벨이 발명한 것으로 유명한 다이너마이트다.
“하지만 나의 가르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남았단 말이옵니까?”
“그래.”
나는 여기에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다이너마이트로 만족해서야 되겠는가? 목숨 걸었으면 갈 데까지 가봐야 한다.
나는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가 아닌 니트로셀룰로오스와 반죽할 생각이었다.
니트로셀룰로오스도 기름이 아닌 목화가 들어간다는 점만 제외하면 마찬가지로 초석과 유황으로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폭발물이다.
대신 점토 형태로 가공이 가능해져 액체 상태인 니트로글리세린보다 훨씬 쉽게 다룰 수 있다.
물론 그게 조금이라도 안전해진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편의성이 생길 뿐이지. 폭발력도 더 강해진다.
“전하…….”
“무슨 일이지? 겁이라도 난단 말이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들은 화약의 정수를 추출하는 일만으로도 심정이 벌렁거릴 지경이옵니다. 게다가 이 친구는.”
화포장이 옆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슬픈 사람처럼 고개를 축 숙이고 있었는데 발과 바짓단이 유난히 퉁퉁 불어나 있었다.
“소피(所避, 오줌)를 지린 건가.”
“송구하옵니다.”
“좋아. 알겠네. 오늘은 이만하지. 나도 지쳤으니.”
폭발물을 다룬다는 건 정신도 피로하지만 몸은 더 피로했다. 긴장이 가시지를 않았으니까. 그렇지 않겠나?
내가 실수라도 했다간 손목이 날아가는데.
그리고 재수가 없어도 날아간다는 점에서, 이건 조폭이 운영하는 불법 도박장에서 밑장 빼는 것보다 더 위험했다.
“내가 만든 건 전부 폐기해라. 만들어진 화약의 정수는 충격이 가해지지 않아도 시간이 지연되면 폭발하게 된다.”
“……너무 위험하지 않사옵니까?”
“나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조만간 쓸 일이 생기니 내가 극도로 위험함을 감수하고서 그대들에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
작업복과 기자재를 갖출 동안 나는 재령 교화소에 관상감 지리학 교수를 보냈다.
그는 금남경(錦囊經)이라는 도술서를 근간으로 삼는 사이비 풍수지리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운하 건설에 동원되어 측량과 지질 조사를 몸에 익힌 친구였다.
어쨌거나 교수는 재령 철광산의 지질을 나에게 보고했다.
철 원석은 사암 등 부드러운 퇴적암층에 주로 묻혀 있고 그 위를 편마암이 덮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노천광산으로 개발하려면 편마암을 벗겨야 하는데, 단단한 편마암을 인력으로 벗기려 들었다간 멀쩡한 사람들을 병신으로 만들 터였다.
‘결국은 폭발물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이 시대에서 흔히 쓰이는 흑색화약의 폭속은 고작 300m/s.
현대에서는 저속폭약으로 분류되고, 그중에서도 폭속이 독보적으로 낮아 저속폭약 계의 저속폭약이었다.
유사 폭발물, 폭발물 조무사, 폭발물 언저리에 불과한 셈이다.
이런 녀석으로는 편마암층을 벗길 수 없었다.
나는 제대로 된 놈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플라스틱 폭탄이었다.
니트로글리세린과 니트로셀룰로오스를 반죽해 만드는 이 쌈박한 친구는 폭속이 7700m/s를 상회한다. 폭발물의 전투력 자체가 다르다.
이놈 앞에서는 편마암이 아니라 편마암 할애비가 와도 한 줌 먼지로 전락하겠지.
‘게다가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두면 왜구들이 쳐들어왔을 때 쏠쏠하게 써먹을 수도 있고.’
기존의 비격진천뢰가 왜구들을 산산조각 낸다고 하면, 플라스틱 폭탄은 조각도 안 남을 터였다.
그러니 왜구들은 산산조각이 아닌 ‘산산’이 되는 거다.
쓰레기 같은 농담이라고?
내가 장담하건대 면전에서 플라스틱 폭탄이 터진 왜구들은 그런 불평조차 할 수 없을 거다.
* * *
김성일은 영 긴가민가했다.
왕이 붙여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고 말도 적었다. 그래서 발소리는 많은데 말소리는 없었다.
조용히 며칠을 움직이니 일행은 마침내 교화소에 다다랐다.
“이제 도착했는데 자네들은 여전히 상세한 이야기는 안 해줄 건가?”
김성일이 불만 가득한 투로 물었다.
아무리 왕에게 망신을 당했다지만 자신은 무려 정이품 재상! 나라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존재였다.
그런 자신이 통성명은 몰라도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나 보겠다는데 차림새부터 꽉 막힌 이 친구들은 한 마디 설명조차 없었다.
“말씀드렸지만 소인들이 하는 일은 철저히 기밀입니다.”
“나는 이 나라의 재상일세.”
“소인들은 전하의 엄명을 받들고 있습니다.”
“피차 전하의 명을 받드는 건 같은데 서로 협조하지는 못할지언정 말을 그리도 아낀단 말인가?”
“너무 아쉬워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금방 아시게 될 테니까요.”
“크흠!”
김성일은 크게 헛기침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시겠다고 말을 아끼는 건지, 원.
알음알음 들어본 게 있어서 대강 이 친구들의 출신은 짐작할 수 있었다.
군기시에서 오래 일했던 화포장 열 명이 왕명을 받들고 입궐했다가 그날 사직했다던가?
고작 화포장 따위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김성일도 더 보채지 않고 무뚝뚝하게 교화소를 찾았다.
입구에 이르자 미리 연락을 받은 소장이 맞이해 주었다.
“오셨습니까, 공조판서 대감. 하명하신 대로 인원은 전부 대피시켰습니다.”
“잘하셨네.”
“감사합니다. 이건 송구한 질문입니다만, 갱도 위의 지표마다 흙을 치우고 구멍을 뚫으라 하셨는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이 자들이 잘 알 걸세. 하지만 나에게도 설명은 하지 않더군.”
김성일은 퉁명스럽게 사내들을 가리켰다.
소장은 난생처음 본 복장을 한 사내들의 모습에 눈을 찌푸렸다. 자신이 눈이 어떻게 된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비벼도 요상한 차림새를 한 사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누구들입니까?”
“전하의 명을 받고 나와 동행한 사람들일세. 어쩌면 내가 이 자들과 동행하는 신세일 수도 있고.”
명색이 공조 판서의 출장이건만 뚜렷한 역할도 없었다.
그냥 사내들을 안내하고 차질 없이 일을 진행하게 도우라는 것이 전부였다. 재상이나 되어서 품계 하나 없는 인간들 수발이나 든다니 굴욕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왕에게 밉보였으니 까라는 대로 깔 수밖에.
사내 중 하나가 말했다.
“작업이 진행되면 교화소 건물은 남아나질 않을 겁니다. 유의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어떤 일을 하시기에 건물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겁니까?”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김성일이 거들었다.
“이 친구들은 이런 식으로밖에 말을 못하네. 그러니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판서 대감. 그리고 소장. 두 분께서도 이만 대피하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저희들이 알아서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닿을 때까지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명을 받들겠네.”
김성일은 빈정거리고는 소장에게 턱짓했다. 이 과묵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이 알아서 하게 물러나자는 신호였다.
두 사람이 찾은 곳은 교화소 인근의 주둔지였다.
그곳에 죄수들과 철장관들도 대피해 있었다.
다들 바란 바는 아니었겠지만 정든 교화소를 떠나 삭막한 군인들이 감시하는 주둔지 한복판에 오와 열을 맞춘 채 기립해있어서인지 영 꼴이 말이 아니었다.
뜰을 둘러본 소장이 김성일에게 물었다.
“소관에게 조금만 알려주시지요. 뭘 하러 온 사람들입니까?”
“나도 모르네.”
“에이.”
“예이, 가 아니라 진짜로 모르네. 전하께서는 이 사람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으셨어. 그러니 내가 그 치들 명령 듣고 여기로 온 거 아니겠나?”
“흐음…….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소장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맞은편 뜰에 기립한 자들은 물론 주변을 지키고 서 있던 군관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그 모습에 소장은 말을 잇는 대신 김성일과 함께 모두의 시선을 쫓았다.
“……!”
교화소가 있던 곳에서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산이 트림하며 내용물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영문인지 채 알기도 전에,
-콰아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주둔지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휘청거리다 못해 쓰러졌고 다들 엉덩방아를 찧은 채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당최 사람의 일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광산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교화소 건물이 남아나질 않을 거라는 경고는 사실이었다. 산조차 남아나질 않는데 건물이라고 남아나겠는가?
-우릉…… 꾸르릉…….
잔해물이 대지를 때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과도 같았다.
흙먼지가 바람에 날렸고 사람들은 따가워진 눈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팔을 들었다.
그리고 좁아진 시야 속에서 이상한 복장을 한 사내들이 위풍당당하게 흙바람을 가로지르며 다가왔다.
그들 중 하나가 답했다.
“작업은 끝났습니다. 계산이 정확했다면 편마암 지층이 파괴됐을 겁니다. 잔해를 치우고 나면 광맥이 드러나겠죠.”
“…….”
“하지만 위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으니 당분간 일대 고을에서 휴식하고 있겠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인편을 보내 알려주십시오.”
소장과 김성일은 생각했다.
위력이 부족하다고?
실시간으로 산이 박살나는 광경을 목도한 그들은 결과물이 어떻건 위력이 절대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말을 이었다.
“아니라면, 소인들은 때가 되면 알아서 떠나겠습니다. 그럼.”
일을 마친 사내들은 다시 위풍당당하게 흙먼지 부는 바람을 가로지르며 멀어졌다.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과묵하다는 것과 가지 없다는 것이 전부였던 김성일은 길잡이에 불과했던 자신의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어떤 방법으로 사내들을 도울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전하께서는 나에게 이것을 보여주시려고 했구나.’
왕은 물길을 바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산을 없애 버리려 들기까지 했다.
전지전능이라는 표현은 과할지 모르겠지만 땅에서 두 발 딛고 사는 사람 중에서 그만큼 전지전능에 가까운 사람도 없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