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22화
77. 전지전능 (1)
“어이가 없네.”
서안에는 각사의 보고서, 그리고 보고서를 빙자한 도움 요청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즉위할 때는 나라가 개판이라 당연히 일감이 많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죠빠지게 일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왜 일이 하나도 안 줄어드냐?
가장 악질적인 경영 시뮬레이션을 여럿 합쳐도 이것보단 친절할 거다. 하나를 해결하면 두 개의 문제가 생긴다.
아랫놈들 일 안 하냐?
“그냥 배 째라 하고 놀아버릴까.”
만력제의 파업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오늘 건 마저 해결하고 놀아야지.”
일중독 아니냐고?
아니다.
설마.
투덜거리면서도 처결하고 있으니, 재령 교화소에서 온 공문도 눈에 들어왔다.
“허. 이런 말단 기관에서 나한테 직통으로 공문을 보내? 얘들 진짜 일 안 하네.”
교화소는 죄수 교화, 철광석 채광 및 납품 등 형조에서 공조, 호조까지 걸친 영역이 많아 특정 기관의 소속도 산하도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교화소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 책임지고 나설 상위기관이 없다는 뜻.
그러니 어딜 찾아가도 자기네 소관이 아니라며 문전박대나 당할 터였다.
‘어느 조직이건 다 그렇겠지만…….’
나랏일 하는 놈들이 그래서는 안 되지.
자기 소관이 아니면 소관인 곳을 소개라도 해줘야 한다.
그랬다가 타 관청이랑 껄끄러워지면 어쩌냐고?
나랑 껄끄러워지는 건 상관없냐?
뒤질라고.
여차하면 장관들 다 불러서 대가리 박게 할 각오로, 교화소에서 온 공문을 읽어 내렸다.
“흐음……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군.”
지하광산의 맹점은 채굴이 진행될수록 갱도가 길고 깊어진다는 거다.
길게 파고든 갱도는 공기의 순환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호흡이 힘들다. 또 깊은 갱도는 지하수가 누출되어 침수된다.
그래서 미래에서는 짧은 터널에도 천장에 환기구를 달고, 보이지는 않지만 지하철도 펌프가 24시간 돌아가며 하루에 수천 톤의 지하수를 배출한다.
이 시대에서는 어느 쪽이라도 실현하기 어렵다.
새 환기구를 뚫는 것도, 물을 퍼내는 것도 이 시대에서는 다 인력이 들기 때문이다.
또 두 작업 모두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다는 걸 생각하면 개선이 시급한 문제였다.
‘그전에 앞서서…….’
정리할 게 있었다.
나는 밖을 향해 말했다.
“게 아무도 없느냐.”
“부르셨사옵니까.”
문 밖의 내시가 답했다.
“공조판서에게 패초를 보내 속히 들라 하라.”
“예.”
이런 일이라면 교화소에서 반드시 공조에 먼저 문의해 봤을 거다. 하지만 공조에서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의정부가 나에 의해 놀아나는 광경에 겁이라도 먹은 건가?
자신들도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부여 받고서 헛고생만 하다, 왕이 나서서 뚝딱 해결해 버리고는 ‘자네들은 이 정도도 못하나?’하고 까이는 게?
망신당하는 건 무섭지만 의도적으로 중요한 일들을 누락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후환은 무섭지 않은가 보다.
그렇다면 무섭게 만들어 줘야지.
“전하, 공조판서 김성일 입시이옵니다.”
내시가 보고했다.
“들라 하라.”
윤허가 떨어지자 집무실 문이 열렸다.
김성일은 잔뜩 긴장한 채였다. 상관이 일정 외의 일로 부른다는 건, 대체로 좋은 일은 아니다. 왜 불려가는지 이유를 모른다면 더더욱.
나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그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내가 물었다.
“흔치 않게 만들어진 둘만의 자리이니 편하게 스승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예……. 전하.”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편히 하문하시옵소서.”
“교화소에서 공조로 보낸 공문은 없었습니까?”
잘만 대답하던 김성일이 일순 침묵했다.
나쁜 예상은 정말 한 번이라도 틀리질 않는군.
“교화소 소장이 나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염치상 왕인 나에게 바로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소, 송구하옵니다. 달포 전에 소장이 신에게 도움을 청했사온데 일이 난해할 뿐만 아니라 죄수들의 일이라 처리하지 않고 넘겼사옵니다.”
“흐음…….”
나는 서안을 툭툭 두드렸다.
“나는 경을 스승이라고 해서 특별대우할 생각은 없어요. 왠지 아십니까? 지금 나는 왕이고 그대는 공조의 판서라는 중임을 맡은 신하예요. 과거의 사적인 관계로 편의를 봐줄 위치가 아니란 말입니다.”
“지당한 분부이시옵니다…….”
“교화소에서 일하는 자들이 죄수라고는 하나, 작업자들의 신분과 작업 환경에 따른 효율은 별개의 일입니다.”
“예.”
“만일 교화소의 소출이 줄어들어 치명적인 수준이 된다면, 공판이 전적으로 책임질 겁니까? 그럴 생각이 있으면 내가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
김성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한심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공직을 지내는 사람이 책임감이라곤 하나도 없습니까?”
“소, 송구하옵니다.”
“대가리 박으세요.”
나의 명령에 김성일은 당혹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게 아니냐는 듯 물어보는 투였다.
그래.
환청이 아니다.
“내 말이 안 들립니까?”
“아, 아니옵니다.”
김성일은 주춤주춤 물러나 다리를 벌리고 머리를 박았다.
“이 일을 어전에서 말하지 않고 공판만 불러서 말하는 이유는, 기회를 한 번 더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 망극하옵니다.”
김성일은 짜내듯 답했다.
“하지만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경고가 있었음에도 재차 태만한 마음으로 나를 실망시켰다간, 왕을 우습게 여기는 걸로 알고서 엄벌에 처할 겁니다.”
“각골명심하겠나이다.”
“한 식경 동안 그러고 있으십시오. 만일 정수리와 발끝 외의 신체가 땅에 닿게 된다면 판서 신분으로 복날 개 쳐맞듯 맞게 될 겁니다.”
마침 나의 주변에는 권자라고, 나무 막대에 종이를 말아둔 예비 몽둥이가 즐비했다.
부디 내가 옛 스승을 패는 일은 없기를 바라면서, 나는 밖을 향해 일렀다.
“군기시에 전해라. 경력 많고 조심성 있는 화포장들을 선발해서 보내라고.”
전근대에서는 지하광산의 작업 환경을 개선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선해야 한단 말인가? 바로 지하광산 자체를 바꾸는 거다.
재령의 철광산은 조선반도 전체에서 손꼽힐 정도로 철이 많이 난다. 얼마나 유서가 깊은지 고려 시대에도 철광이 있었고,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북한의 핵심 철 산지로 기능했다.
지표부터 지하까지 막대한 양의 철이 묻혀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개조할 가치가 있다.
지하광산에서 노천광산으로.
“저, 전하…….”
김성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목을 보아하니 보통 힘든 게 아닌 모양이다.
“재령의 죄수들은 고작 한 식경 머리 박기보다 훨씬 고된 노동에 종사하고 있거늘, 그들의 작업 환경 개선은 하찮은 일로 치부해 놓고 엄살이라니?”
“저, 전하. 다시는 실망 시키지 않겠사옵니다. 한 번만 봐주시옵소서!”
“내는 그대의 직을 삭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 번 봐주었거늘 얼마나 더 봐주란 말인가?”
“부디…….”
김성일이 처량하게 간하니 나도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좋다. 머리 대신 두 팔로 엎드리고 있으라.”
“망극하옵나이다!”
“대신 하나가 아니라 둘로 몸을 받치게 되었으니 시간도 두 배는 되어야겠지.”
“…….”
이 정도면 합리적인 배려 아닌가?
아니라고?
그럼 왕의 고뇌를 방해하지 말았어야지.
어쨌거나, 지하광산을 노천광산으로 개조한다는 건 여건이 있어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광맥이 드러날 때까지 지표를 벗겨야하기 때문이다.
미래라면 빌딩 크기의 초대형 굴삭기로 부숴버리겠지만 이 시대는, 뭐, 당연하지만 다 사람의 손으로 해결해야 했다.
‘너무나도 야만적이고 한심한 일이지.’
생각만 해두고 있던 비장의 수단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걸 구현하는 과정은 극도로 섬세하며 또 위험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후자로, 폐 손상과 폭발 사고를 야기할 수 있었다.
이런 작업에 동원 가능한 인력은, 이미 위험도 높은 작업 환경에 익숙해진 베테랑 화포장들뿐이다.
* * *
“천 사람의 일을 열 사람이 위험을 감수해 해낼 수 있다면, 응당 그래야겠지. 물론 열 사람에게는 천 사람의 노고에 준하는 보상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경복궁 후원.
나는 열 사람의 화포장을 줄 세워두고 말했다. 그들은 나의 말에 긴장 반, 기대 반으로 가득 찬 채 결의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대들은 앞으로 팔도 조선에서는 물론, 사해를 통틀어서 그 어디의 누구보다 위험한 일을 맡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이옵니까?”
화포장 하나가 물었다.
“화약보다 20배 이상 강한 폭발물을 만드는 걸세.”
“스, 스무 배나 말이옵니까? 그런 게 있었사옵니까?”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내가 왕이나 되어서 그대들을 불러 헛소리나 하겠나. 문제는 이걸 만드는 과정이 극도로 위험하며, 지금 아조의 기술로 구현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라는 걸세.”
제법은 안다.
하지만 화학 지식처럼 알기는 쉬운데 구현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19세기 중반이나 되어서야 발견된 물질을 과연 16세기, 그것도 과학을 등한시하는 나라에서 구현할 수 있을까?
의문은 들었지만 시도하지 않고서는 결과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실험부터 시작하지. 이 금단의 지식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 천추의 한이로군.”
합성 과정에서 폭발의 위험성을 감수 안 할 수는 없지마 하필이면 왕인 내가 폭사를 감수해야 하다니.
내가 그렇게 우습게 죽기라도 했다간 조선에는 암흑기가 찾아올 거다. 누구를 빈자리에 앉히더라도 준비되지 않은 왕일 테니까.
그러니 각별히 주의해야지.
일단 할 수 있는 대비란 다 해두었다.
“따라오게.”
나는 연못 가운데 위치한 섬으로 향하는 다리에 올라섰다.
잠시 걸어가니 멀찍이서는 형체만 보였던 위사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화포장들은 위사들의 생소한 차림에 당혹을 드러냈다.
“도대체.”
위사들은 전신을 두툼한 가죽옷으로 덮고 있었다.
살갗이라곤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고, 눈 쪽에 달린 석영렌즈만이 안에 사람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입에는 사람 주먹만 한 크기의 정화통이 혹처럼 나 있었다. 미관이라곤 추호도 찾아볼 수 없는 형상이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괴기하기까지 한 형상이었다.
“자네들도 저렇게 차려입어야 하네. 그리고 익숙해져야 할 걸세. 그러니 집 밖에서는 무엇을 하더라도 항상 입고 다니는 걸 추천하지.”
사람들이 겁을 내겠지만 앞으로 예민하고 위험하며 특히 아주 비밀스러운 작업을 하게 될 화포장들은 차라리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게 나았다.
연못의 섬 내부에는 꼴에 복층 정자도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벽면에는 밖의 위사들이 입고 있었던 작업복이 켜켜이 걸려 있었다. 또 중심에는 금단의 지식을 실현할 사악한 실험의 재료들도 켜켜이 쌓여 있었다.
눈치 좋은 화포장 하나가 물었다.
“저건 초석과 유황이 아니옵니까?”
“맞네. 내가 만들려는 것도 결국은 초석과 유황이 주재료지. 차이가 있다면 화약은 두 재료의 원형을 그대로 이용한다면, 이쪽은 정수를 추출해서 이용한다는 것일세.”
나는 대답을 마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곱게 갈아낸 석영렌즈는 이 시대 기준으로는 제법 괜찮은 퀼리티였다.
정화통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거웠지만 황산 가스를 흡입했다가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마음껏 무거워져도 됐다.
“다들 갈아입었나? 정화통 양쪽을 막고 숨이 쉬어지는지 확인하게. 숨이 쉬어진다면 틈이 있다는 뜻이니까 복장을 다시 점검하게.”
“예.”
다들 걸친 게 있어서인지 목소리가 웅웅하고서 울었다.
나는 조금 더 설명을 곁들였다.
“틈이 있는지도 모르고 작업하다간, 하루 이틀 동안 두통, 기침, 호흡 곤란이 심해지다가 헐떡이는데도 숨이 안 쉬어지는 지경에 이르러 죽게 될 걸세.”
화포장들은 서둘러 틈이 있는지 점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