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21화
76. 종이의 생산자 (2)
박순이 물었다.
“만일 전하의 행보와 뜻이 대변인과 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알려진다면, 타국이나 오랑캐들이 접할 가능성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우려하는 건가.”
“조선의 사정이 적에게 알려진다면 좋을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다분히 합리적인 추론이로고.”
예로부터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百勝)라고 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 싸워도 다 이긴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적은 나를 모르는데 나는 적을 잘 안다면, 객관적인 수치에서 밀리더라도 얼마든지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잠재적인 적이 이용할 것을 안다면, 반대로 우리도 이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정보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만일 이 나라에서는 가능하지만 명이나 왜, 여진은 불가능한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한다면 저들의 반응이 어떻겠나?”
“……음.”
“예를 들자면, 소출의 사분지 삼을 세금으로 거둬가는 왜인들이 아조의 세율을 조보로 접하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냐는 말이네.”
쟤들은 해주는데 왜 우리는 안 해주냐는 생각이 들겠지.
인간의 마음은 간사한 법이니까.
쟤들은 할만하니 하고, 우리는 안 되니 안 된다고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얼마 없다.
“나는 원한다면 적들에게는 독이 될 정보를 얼마든지 대변인의 말이나 신문에 탈 수 있네. 필요하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신문을 유출할 수도 있지. 족히 경이 걱정할 바가 못 되네.”
이게 나와 선조의 차이다.
놈은 매사에 보신적이고 편협적이었으며 책임을 지기 싫어했다.
그래서 조보의 유출이 손해가 된다, 싶으니 덮어놓고 금지했다.
나는 반대다.
얼핏 손해가 되고 적에게 유리할 것처럼 보이는 환경과 수단마저 이익에 맞게 이용하고 가공한다.
“곧 종이를 막대하게 소모할 터이니, 나는 세종대왕처럼 조지서를 크게 일으켜 무자비하게 종이를 찍어내야겠다.”
박순이 답했다.
“배부한 신문을 다시 회수하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물론 신문은 가능한 만큼 회수하겠지만 인력이 들고 절차가 번거로우며, 또 사람에 따라서는 신문을 소장하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회수를 떠나서 종이란 많을수록 좋았다.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구전 아니면 책인 세상이다.
하지만 구전은 한 번 전해지면 증발하고, 발언자의 기억과 태도에 따라 전달되는 뜻이나 내용이 변질될 수 있었다.
합리적으로 지식을 전달할 수단은 책밖에 없는 셈이다.
그러나 책의 재료인 종이는 주먹구구식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어져 무식하게 비싸고 귀했다.
오죽하면 나라의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조차 세초(洗草)라 하여 초고를 씻어 재활용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정 영상이 내키지 않는다면 내가 내수사를 통해 조지서를 세우겠다.”
“아, 아니옵니다. 세입도 늘어났으니 조지서를 확장하는 것까지 내수사에 기댈 필요는 없사옵니다.”
처음 왕이 거액을 쾌척하여 나랏일을 진행했을 때, 신하들은 왕이 배포가 큰 사람이어서 사적인 재산을 기꺼이 공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독이 되었을 줄 누가 알겠는가?
왕의 사유재산이 나라의 재정을 잠식하자 자연스럽게 왕의 입김이 강해졌다.
그러고도 재산이 남은 왕은 아예 독자적인 기관까지 세웠다. 대표적으로 화약생산에 소모되는 초석의 8할을 내수사가 공급하고 있었다.
만일 왕이 ‘이제 초석 안 줘’ 해버리면 화약도 못 만드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외에도 왕은 다양한 분야에서 알음알음 지분을 잠식해 오고 있었다.
고작 종이나 만드는 조지서라 해도, 아쉽지 않다고 하나씩 내주다 보면 조정은 개털이 되고 왕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세상이 올 수도 있었다.
“영의정이 그렇게 말해주니 좋군. 해마다 종이 일천 권 증산을 목표하라. 지장(紙匠)의 별도 모집은 허락하지 않겠다.”
“일천 권이라 하심은…….”
“십만 장이지.”
“지장을 증원하지 않고 일천 권을 증산하시란 말씀이시옵니까?”
“경은 내가 말할 동안 무엇을 들었나.”
박순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이게 무슨 창조경제도 아니고 사람은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증산을 하란 말이냐.
지장들을 밤낮으로 착취하면 조금은 증산할 수 있겠지. 하지만 십만 장 증산은 지장들에게 분신술을 가르쳐 그들이 열 배로 불어나지 않는 한 불가한 일이었다.
물론 분신술이란 괴력난신을 추종하는 자들의 꿈결 같은 소리이니 논할 가치는 추호도 없었다.
“전하, 신은 지극히 미욱하여 어떻게 사람을 늘이지 않고 종이를 증산할 수 있을지 모르겠나이다.”
“나는 아는데 어찌 경은 모른단 말인가?”
박순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진짜 답이 없는 왕이었다.
예전부터 이 새ㄲ…… 가 아니라 전하께서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리고는 신하들이 끙끙대는 모습을 즐겨왔다.
그러다 만족하면 뒤늦게 나타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덕분에 한참이나 끙끙댔던 신하들은 바보 멍청이로 전락해야 했다.
보아하니 이번에는 조지서까지 장악할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박순은 도 넘게 짓궂은 왕에게 곱게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대신들과 상의하여 방도를 내어보겠사옵니다.”
“불쌍한 지장들을 더 괴롭히겠다는 한심한 결론만 아니었으면 좋겠군.”
“최선을 다해 강구하겠나이다.”
하지만 며칠 뒤…….
“최선을 다해 강구하겠다더니?”
왕의 물음에 박순은 합죽이가 되었다. 툭 튀어나온 입술은 무언의 항의였다.
어떻게 사람을 충원하지 않고 생산량만 늘리란 말인가.
철장들이야 설비를 하나로 합쳐 능률을 올릴 수 있었지만, 지장의 작업은 달랐다.
종이를 만드는 절차를 간략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닥나무를 찌고, 껍질을 벗기고, 씻기고, 짓이기고, 물에 녹여서 얇게 떠내고, 말린다.
인력과 설비를 집중한다면 약간의 능률은 올라가겠지만 철장들처럼 극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왕의 태연한 존안을 보아하니 그에게는 방도가 있었다.
처음부터.
“…….”
박순은 침통한 심정이었다.
홍섬이 영의정 노릇을 하고 있을 때는, 노신이 어울리지 않게 왜 젊은 왕에게 쩔쩔매나 싶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의 통찰력은 끝이 없었고 지극히 사악했으며(박순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하들을 놀리면서도 실속은 챙기는 고약한 취미와 성정을 가졌다.
설령 홍섬이라고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조지서는 당분간 내수사에서 관리한다.”
“조지서는 정식 관청이옵니다. 어떻게 전하의 자산을 관리하는 내수사에서 관리해서야 되겠사옵니까?”
“조지서의 작업환경이 달라질 터이니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 내수사에서 적응을 도와주려는 것뿐이다. 관리 기간이 달포 이상 길어지지는 않을 터이니 염려치 말라.”
가만히 말을 듣던 박순은 어라, 싶었다.
“지금 바로 말이옵니까?”
“그렇다.”
“혹, 미리 증산을 계획하고 계셨사옵니까?”
“영 진전이 없으니 기다려 봐야 달라질 것은 없겠다 싶었다.”
기다려봐야 달라질 것이 없으니 먼저 작업해 두고 있었다니?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부들부들…….
얼마나 왕에게 얕잡아 보였단 말인가? 원통하고도 억울했다. 어떻게든 방도를 고안해서 왕에게 한 방 먹였어야 했다!
하지만 왕은 사악한, 아니 악마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작정하고서 낸 문제를 어떻게 범인이 풀어낸단 말인가?
일각에서는 영의정이 무능해서 왕에게 또 신하들이 얕보였다고 욕하겠지만, 저들이었다고 방도가 있었겠는가?
“전하…….”
“말하라.”
“신이 우매하여 영의정의 직임을 다하지 못하니, 죄신은 물러나게 하고 다른 유능한 사람에게 대신 맡기시옵소서.”
“아, 영의정. 그대가 스스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말라. 내가 보기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그대만큼 어울리는 사람도 없다.”
얼핏 듣기에는 위안이었지만, 영의정이 된 이후 당하기만 했던 박순은 다르게 들렸다.
너처럼 영의정으로서 만만한 놈이 없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박순은 홍섬이 그리워졌다.
* * *
퇴청 후.
박순은 의정들과 함께 왕의 사악한 역작을 두 눈으로 목도하기로 했다.
“얼마나 기상천외한 방법을 썼길래 사람을 늘이지 않고도 증산이 가능하단 말인가?”
우의정 이이가 답했다.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의심을 가지지 않는 편이 이롭습니다.”
“군말 없이 따르기나 하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단지 그편이 심신의 안정에 도움 되기 때문이지요.”
이이는 하찮은 두엄더미에서 궁궐까지 뒤져가며 찾아낼 정도로 귀한 초석을 연성하는 광경을 보았다.
이후 이이는 왕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작정 다 옳아서가 아니라, 이따금 태연히 인간의 이해를 능가하는 짓을 벌이기 때문이었다.
“광인(狂人)이라는 평도 있었던 우의정도 이제는 다 죽었군.”
“소관이 단순하게 광인(狂人)이었어도 전하 앞에서는 별수 없었을 겁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천재와 광인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데.”
이이가 보기에 왕은 천재였고 광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즐기는 자였다.
이이 역시 아홉 번 장원할 정도로 천재였고 한때는 광인의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의 그와 지금 왕은 줄타기를 하는 높이가 한참은 달랐다.
과거의 자신이 했던 줄타기는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됐고, 전하의 역작이나 목도하러 가세.”
왕은 순순히 새로운 조지서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성저십리, 한강의 상류였다.
박순은 언젠가 그쪽에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 지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진즉에 찾아갔어야 했거늘.
일행은 성 밖으로 나와서 두어 각을 걸었고, 마침내 규칙적인 소음을 내는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어.”
좌의정 노수신이 감탄을 토해냈다.
강을 낀 조지서는 건물만큼이나 큰 물레방아를 달고 있었다. 그래서 물레방아에서 낙하하는 물은 거의 폭포처럼 보일 정도였다.
의정들은 새로운 조지서의 원리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물레방아를 이용해 곡식을 빻는다는 말이야 들어보았으니까.
대충 그런 원리로 종이를 만들지 않겠나?
“돌아들 가세.”
박순은 질렸다는 투로 말하자 이이가 물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니 들어가시겠습니까?”
“여기서 봐도 원리가 뻔히 보이거늘 굳이 들어가서 볼 필요야 어디 있겠는가.”
“원리야 뻔합니다만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잖습니까. 조지서가 돌아가는 장면을 눈에 담아두면 나중에 도움이 될 겁니다.”
“젊은 우의정이나 실컷 담아두시게. 이 사람은 늙어서 어차피 의정 노릇도 오래 해먹지도 못할 텐데. 흥.”
박순은 입술이 툭 튀어나온 채로 한껏 삐진 티를 내며 발을 돌렸다.
내키지 않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왕은 기묘한 자였고 어디까지 알고 모르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왕을 따라잡겠다고 얼마 남지도 않았을 여생 내내 악을 쓰느니 차라리 곱게 당해주는 편이 나았다.
이이의 말대로, 그편이 심신의 안정에 도움 될 테니까.
일행이 도성에 도착하자 연단에서 일전에도 보았던 궁녀가 외치고 있었다.
“패하지 않는 자, 운하의 건설자, 종묘를 바로잡은 자, 사직의 선택을 받은 자, 팔도강산을 비추는 유일무이한 해와 달, 만백성의 수호자, 죄를 정화하는 자, 북방의 지배자, 광산 개발자, 철장과 목수들을 비호하는 자, 초석 공급자, 산학의 주인, 종이의 생산자, 이하 주체 강성대국 대조선의 영도자 성상 전하의 전언이 있으시겠습니다…….”
그새 한 단어가 늘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