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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20화 (220/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20화

76. 종이의 생산자 (1)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무지한 영혼들은 그걸 모른다.

여전히 철 지난 유학 타령이라니.

임진왜란 때도 그랬으리라 생각하니 손발이 띵하고 머리가 덜덜 떨렸다.

조선이 얼마나 낙후됐는지를 따지면 서양까지 갈 필요도 없다.

잘난 유학자 나부랭이들은 땅딸보 야만 수상 오랑캐로 치부하는 왜놈들조차 조선을 능가한 지 오래다.

놈들은 백 년 넘게 내전 상태에 있었지만 멸종되는 대신 오히려 인구와 생산량은 늘어났으며 코쟁이들과의 교류로 신무기와 신문물을 받아들였다.

조선통신사의 기록에서도 나오지 않는가?

왜놈들이 극도로 번영하였다고.

이런 와중에도 조선이 내린 결론은 보고 배우자는 것이 아니라, 오랑캐들이 영화를 구가한다는 사실에 이만 부득부득 갈면서 더욱 같잖은 자존심을 부려댔다는 거다.

그런 와중에 왜놈들은 코쟁이들에게 조선이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라고 속여 왔다.

조선은 자의와 타의로 국제관계와 무역에서 배제되었고 왜국과의 격차는 가속되어 결국에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하찮은 놈이 알량한 자존심이나 부려댔으니 인과응보다.

하지만 이 나라에는 스스로를 소중화라 여기며 영원불멸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잘난 존재로 남으리라 자위하는 자들이 즐비했다.

‘한심한 것들.’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이라 평가받는 유생들이 제일 심했다.

사대부에 어울리는 학문은 오직 유학뿐이며, 산학 따위는 가르치거나 배울 필요도 없다며 최근의 변화는 나라가 망할 징조라며 지랄이었으니까.

미래에 IS가 있다면 이 시대에는 유교 탈레반이 있다.

저들의 사상만이 제일이라며 다른 학문과 지식은 양지로 나오지도 못하게 압박하고 통제하고 파괴한다.

이런 놈들을 관리로 만드니까 나라가 망하지.

변화가 필요했다.

이미 많은 일을 벌였지만 부족했다. 더욱 많은 일을 벌여야 했다. 파격적으로 변화를 꾀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이야.”

병조판서 을룡이 답했다.

“사대부들은 대대로 유학을 배워 애착이 부모를 따르는 것과 매한가지인데, 과연 저들이 몇 마디 말을 듣는다고 생각을 달리하겠습니까?”

“사람의 의지는 목숨을 초개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풍 앞의 촛불처럼 한없이 약하게 마련이지.”

을룡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이 시대에서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수단이 제한적이었다.

미래처럼 전 세계 사람과 양방향으로 소통 가능한 스트리밍 시스템은 꿈조차 꿀 수 없다.

오직 말로 전하거나, 혹은 글자로 전하거나.

전자는 메시지를 호소력 있게 전파할 수 있지만 대상이 제한적이고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후자는 줄 수 있는 느낌이 제한적이고, 비용이 많이 소모된다.

각기 장단이 있으니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두 방법을 모두 취해야 했다. 그것도 굉장히 효율적으로.

“자네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 있나?”

“목소리가 좋다 하심은…….”

“말함에 절도와 조리가 있고, 힘과 호소력을 담을 수 있는 자일세. 그렇다고 평소에 말을 잘할 필요는 없어. 누가 대신 써준 말이라도 그렇게 말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네.”

“마침 해당하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다행이었다.

알아보고 나서가 아니라 바로 있다고 말할 정도면, 을룡도 눈여겨보던 사람이겠지. 그가 인정하는 자라면 검증이란 불필요했다.

나는 반색해서 물었다.

“누군가?”

“이춘희라고, 함경도에서 영입한 사람입니다. 하나, 이름만 들어보셔도 알겠지만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여자라…….

여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안방에만 처박아두고 나오지도 못하게 하는 세상이 아닌가?

공개적인 장소로 나와 나의 대변인 노릇을 하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장점이 될 수도 있네. 어차피 나의 목적은 사람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니까.”

“바로 입궐시키겠습니다.”

“궁인들이 외부의 여인이 왕을 찾는 일로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주의하게.”

“예.”

“그리고 유능한 소목장(小木匠)도 수배하게. 아주 유능한 사람으로 말이야.”

소목장이란 건물처럼 큰 구조물을 다루는 대목장과 달리 가구 따위를 다루는 목수를 뜻한다.

대소(大小)의 차이를 둔다고 소목장이 대목장 밑은 아니다. 단지 전문적으로 다루는 영역의 차이일 뿐이다.

“무엇을 만드실지 알려주신다면, 적합한 소목장을 수배할 수 있을 겁니다. 소목장마다 적성이 다르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다양한 적성의 소목장들이 필요하다고 해야겠군. 내가 만들려는 건 인쇄기일세. 활자를 이용한.”

공예품 만들던 사람은 작은 활자를 깎으면 될 테고, 복잡한 가구를 만들던 사람은 프레스식 인쇄기를 구현하면 된다.

거의 로스트 테크놀로지로 전락한 인쇄술을 부활시키려면 목수들이 고생을 좀 하겠지만 금전이라면 충분히 보상될 거다.

부족하다면 단지 모자라서일 뿐이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이란 없다.

당일 밤.

을룡은 여인을 대동하고서 집무실을 찾았다.

이춘희.

그녀는 장옷을 걸치고서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내라.”

“예…….”

여인답지 않게 묵직한 대답이 들려왔다.

장삼이 걷어지고, 이춘희의 모습이 드러났다. 면면을 살펴보니 익숙한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이름부터…….

함경도에서 왔다고?

-주체↗ 조선의↗ 첫 수소탄 시험! 완전↗ 성공↗!

“음…….”

당혹감에 쓰게 침음하자 을룡이 물었다.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닐세. 생각보다 목소리가 걸걸한 편이군.”

“그편이 더 호소력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내 앞의 이춘희는 미래의 리춘히의 조상쯤 되는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이 사람을 나의 대변인으로 쓰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 기분을 이해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이춘희에게 말했다.

“병판에게 설명은 들었나?”

“예.”

“미리 들었다니 이해가 빠르겠군. 자네는 앞으로 나를 대신해서 몇 가지 소식을 백성들에게 전할걸세.”

“예에.”

“기운이 별로 없어 보이는군. 왕 앞이라 그런가?”

리춘히…… 아니 이춘희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하기야 다른 사람 앞도 아닌 왕 앞이다. 이 시대에서는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그런 사람 앞에 비밀스레 도착했으니 겁은 나겠지.

“차차 익숙해질 걸세. 잘 부탁하네. 이춘희, 동지.”

* * *

-웅성웅성.

관리들이 입궐하다 말고 육조거리에 멈춰 섰다.

거리 한복판에는 연단이 발표자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서로 연단에 대해서 아느냐 물어보았는지만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금상이 또 별난 일을 벌이는 게 아니냐는 합리적인 추론에 도출했다.

왕은 그가 벌이는 일을 항상 신하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따금 중요성이 높은 일마저 별다른 고지 없이 독자적으로 시행하고 있다가, 우연히 알아챈 신하가 물어보면 대답이나마 해주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질문까지는 필요없으리라. 연단의 정체가 무엇이건 곧 알게 될 터이니까.

과연.

“비키시오들.”

위사들이 인파를 뚫고 나타났다.

신하들이 좌우로 물러나 길을 트자 장년의 여인이 나타났다.

궐의 상궁인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녀는 연단에 섰다.

“으흠, 흠…….”

가볍게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있었고,

“패하지 않는 자, 운하의 건설자, 종묘를 바로잡은 자, 사직의 선택을 받은 자, 팔도강산을 비추는 유일무이한 해와 달, 만백성의 수호자, 죄를 정화하는 자, 북방의 지배자, 광산 개발자, 철장과 목수들을 비호하는 자, 초석 공급자, 산학의 주인, 이하 주체 강성대국 대조선의 영도자 성상 전하의 전언이 있으시겠습니다.”

“……?”

“왕의 역할은 오직 경국제민(經國濟民,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구원함)이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오직 결과이니 만백성과 대조선의 적들은 들어라, 우리의 앞길은 오직 영광뿐이요 가로막는 자들은 짓밟힐 것이니, 순응하지 않으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리라! 성상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모인 신하들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휘황찬란한 칭호들은 다 무엇이며, 이 패기 넘치는 선언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선언을 왕 본인은커녕 승지나 승전색도 아닌, 고작 상궁쯤으로 보이는 장년의 여인이 왜 대신 전한단 말인가?

의문이 채 해소되기도 전에 육조거리에 종이가 흩날렸다.

어디에서 날아오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 광화문 누각에 서서 뿌려대고 있었다.

“도대체가.”

다들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했다.

의문을 제기하기에는, 당찬 목소리로 왕의 전언을 남긴 상궁과 그녀를 대동한 위사들도 어딘가로 사라진 뒤였다.

남은 것은 오직 손에 들린 종이뿐.

거기에는 최근 왕의 행보에 대한 소식과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산학 강의의 비중이 높았다.

산학의 효용과 그동안 산학에 대한 과소평가를 지적했으며 유학 원리주의자들은 발전을 저해하는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

선전문을 정독한 관리들이었지만 여전히 의아한 기분이었다.

왕이야 신하들을 놀리고 놀라게 만드는 것이 나쁜 취미인 분이었으나, 이번 행보는 진정으로 예상 밖이었다.

산학에 다한 지지와는 별개로 일부는 왕의 선전이 유치하다고 생각했으나, 다른 이들은 근본 불명의 충족감을 느꼈다.

미래의 용어로 치환하자면 ‘뽕’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 * *

“전하, 거리에서 벌어진 일은 도대체…….”

영의정으로 진급한 박순이었다.

그는 노신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지만, 그런 박순이 보기에도 출근길에서 벌어진 일은 사고회로가 마비되기 충분했다.

“마음에 들던가?”

“마음에 드냐고 물으신다면…….”

박순은 솔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신도 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으나, 뿌듯한 기분은 들었나이다.”

조선의 왕이 왕이 아닌 황제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도. 명나라 황제도 그런 식으로는 선전하지 못할 터였다.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니 다행이로군.”

“어찌하여 이런 일을 꾸미셨나이까?”

“세상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일세. 영의정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광화문에서 뿌린 신문(新聞)을 보았겠지?”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는 조보(朝報)라는 표현이 더 익숙할 거다.

조보란 원시적인 형태의 신문으로, 날짜와 날씨는 물론 신문의 핵심적인 기능인 새로운 소식을 담았다.

시대를 앞선 문물의 영화는 잠깐이었다.

관직자와 사대부 일부에게만 허용된 조보가 유출되어 민간이 복제하여 판매하거나, 심지어는 해외로도 반출되자 이를 알게 된 선조가 조보를 금지한 것이다.

이번 생에서는 그러지 못했지만.

“백성들은 물론 현직 관리들도 나의 행보와 뜻을 다 알지 못해 곤란해하는 경우가 많네. 만일 사람과 신문을 써서 여러 사람이 알게 한다면 이익이 크겠지.”

“……연단에 섰던 여인은 누구이옵니까?”

“대변인일세. 아, 똥 같은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나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박순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승정원의 승지들이나 승전색도 있습니다만, 어찌하여 궁녀를 대변인으로 쓰시옵니까?”

“현직자들과의 사무 소통을 위해서 있는 승지나, 이외의 경우에 동원되는 승전색과 선전관들은 공무의 성격이 크지. 이번에는 백성들에게도 공개적으로 나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니 급을 조금 낮추기로 했네.”

이편이 남녀유별을 강조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합리적으로 느껴지겠지.

그렇다고 바로 납득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경우가 달라 쓰는 사람도 다르다는 것은 이해하겠사오나, 궁녀가 궐 밖에서 공공연히 돌아다니는 모습이 좋지만은 않을뿐더러 현직자들이 오가는 육조거리 한복판에 연단에 서서 전언하는 행위는 썩 예법에 맞지 않다고 사료되옵니다.”

“제신들도 금방 익숙해지리라 믿는다. 여인이 나랏일을 하는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잖은가?”

조선 시대의 여경에 해당하는 다모(茶母)나 의녀가 그러했다.

“제신들이 반발할까 우려되옵니다.”

“우려는 마음껏 해도 좋다. 나를 대변하는 사람을 모욕하거나 망신을 주는 식으로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암.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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