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18화
75. 마법의 가루 (2)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이가 없었다.
“다짜고짜 무엇을 통촉하란 말인가?”
“경연을 시행하시옵소서!”
성균관 떨거지들은 나에게 다시 경연을 시행하라며 주기적으로 상소 테러를 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왔다는 행운의 편지만도 못한 저질 스팸질에, 승정원 레벨에서 커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지치기를 바라고서.
보아하니 무의미한 기대였다. 이놈들은 종기였다. 내버려 둘수록 커지는 악성 종기.
“경연을 시행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시간 낭비를 싫어하기 때문인데, 지금 그대들은 나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전하!”
“느그들은 느그 입장밖에 모르지?”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고집불통을 치료하는 유서 깊은 방법이 있다. 바로 물리 치료다. 하지만 이 혈기방장한 철부지들을 바로 사람 불러서 뒤지게 팼다간 폭군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타협할 생각은 없다.
단지 놈들이 내가 폭군 짓을 하도록 자발적으로 동의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좋다. 그대들이 정 원한다니 경연을 열고, 그대들이 경연관으로 참석하라.”
“오!”
오, 는 무슨.
“대신 그대들은 경연장에서 각자가 하는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책임이라 하신다면?”
선두의 유생이 물었다.
“겁이라도 먹은 건가?”
“아니옵니다!”
“좋아. 다들 자신이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 인지하기를 바란다. 나중에 다른 소리를 낸다면 기군망상으로 처벌할 테니까.”
유생들은 고작 하루만의 시위에 원하는 것을 얻자, 기뻐하면서도 어색해했다.
상황이 너무나도 쉽게 돌아간다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증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유생들에게 동물적인 감각은 있을지언정 연륜은 없었다.
우의정이나 경연관들도 다시 시행하지 못한 경연을 자신들은 시행하게 만들었다는 자부심으로 이 순간을 즐길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하?”
경연장에 자리한 유생이 물었다.
“조용히.”
“하오나.”
“누가 감히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함부로 입을 연단 말이냐. 밤낮으로 앉혀만 둘 것도 아니거늘, 감히 왕과 대면한 자리를 가벼이 여겨 조금도 참지 못한단 말이냐?”
“······.”
유생은 더 말하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만 지은 채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불청객이 있었다.
왕이 경연을 연다는 경천동지할 소식에 찾아온 우의정 이이를 말하는 건 아니고, 주변을 가득 메운 위사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들 육모방망이를 쥔 채 유생들을 적의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령만 떨어진다면 모조리 떡으로 만들어버릴 기세였다.
정적이 이어지는 가운데.
상궁과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선두의 상궁들은 수라상을 끼고 있었다.
대열 중에는 빳빳한 턱수염이 시커멓게 난 조선판 장비도 있었다.
수라상이 놓이자 장비가 설명했다.
“전채는 다진 채소 위에 뭉근하게 끓인 과즙을 뿌린 것이옵고, 아무······. 아무주······.”
“아뮤즈 부쉬.”
“예! 송구하옵니다. 아뮤즈 부쉬는 김으로 식초 먹인 밥을 감싸고 위에 성게알을 얹은 것이옵니다. 메인은 관자에 칼집을 내어 직화로 굽고 후추를 볶은 기름을 뿌린 것이고, 후식은 설탕을 끓여 꽃 모양으로 빚은 것이옵니다.”
장비의 정체는 조선의 궁중 요리사인 대령 숙수였다.
그는 왕에게 정체불명의 요리법을 하달받고서 일단 까라는 대로는 깠으나, 과연 자신이 잘 깠는지를 무척이나 의식하고 있었다.
“어떻사옵니까?”
“내가 원하던 그림과는 다르지만, 숙수들은 이렇게라도 만드느라 진땀을 뺐겠지.”
대령 숙수는 부정하지 못했다.
한평생 만들어온 것과는 완전히 판이한 양식의 음식들이었으니까.
“음식은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중요하지, 꼭 형식과 틀에 좌우될 필요는 없네. 숙수들이 하루 이틀 수라를 준비한 사람도 아니니 완전히 망치지도 않았을 테고.”
대령 숙수는 침만 삼켰다.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으나 난생처음 만든 음식이다.
일단은 내놓았으나 왕의 기대대로 ‘완전히 망치지’ 않았는지는 숙수들도 몰랐다.
하지만 진귀한 경험이었다는 것은 숙수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리라.
“기미 해보게, 맛이 있는지 말이야.”
“예.”
기미상궁은 요리를 조금씩 담아 자신의 수저로 맛보았다.
기미를 하라면서 맛을 보라던 왕의 터무니 없는 명령에도 반응하지 않던 상궁은 눈이 조금씩 커지더니 입도 다물지 못했다.
“무슨 일이지? 몸에 힘이라도 빠지는 독이라도 있나?”
대령 숙수가 기겁하며 끼어들었다.
“아, 아니옵니다! 어찌 감히 신이 수라에 허튼짓을 하겠사옵니까?!”
“농담으로 한 말일세.”
기미상궁은 자신의 반응이 부끄러웠는지 수저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그새 포커페이스를 찾았지만 홍조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독은 없사옵니다.”
“이제야 내 차례인가.”
두 번 기미하면 식은 밥만 먹겠군.
하나하나 맛을 보고 있으니 보다 못한 유생 하나가 나섰다.
“전하, 어찌하여 소신들을 불러놓고 수라를 들이시옵니까? 게다가 지극히 사치스러운 것이, 도저히 성인의 가르침을 본받는 모습이라고 할 수 없사옵니다!”
“그래서?”
“상을 물리고 신들의 간언을 귀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좋아. 대령 숙수, 고생했네.”
“아니옵니다.”
대령 숙수와 상궁, 궁녀들은 예를 표하고는 경연장에서 물러났다.
개중에서 어린 궁녀들은 생소한 음식의 맛이 무척이나 기대되는 눈치였다.
선배 궁녀들이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내가 장담하건대 신세계를 맛볼 거다.
좌중이 정리되자 나는 위사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분명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라 말해두었거늘, 방금 유생 하나가 무례하게도 왕의 식사를 방해했군.”
“처치하겠습니다.”
“죽지만 않도록 처치하게.”
“예.”
위사들은 눈치를 교환하더니 가까이 있던 몇이 유생에게 나아갔다.
간언이랍시고 한마디 했다가 매 맞게 생긴 유생은 앉은 자리에서 기듯 물러났으나, 단지 몇 초의 시간만 벌었을 뿐이다.
곧 사람이 다짐육으로 변하는 소리가 경연장을 울렸다.
다른 유생들은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하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좋아. 다음은 누구지?”
물어보기 무섭게 선두의 유생이 따지듯 말했다.
“전하, 동서고금을 통틀어 간언하고자 모인 유생들에게 이렇게 가혹하게 대한 일은 없사옵니다!”
“유생이라면 간언을 빌미 삼아 왕의 잠과 식사를 방해해도 된다는 말인가?”
“수라를 경연장에 들이신 건 전하이시옵니다.”
“잠은?”
“······.”
“야밤에 범궐하는 것은 중죄 중의 중죄가 아니냐?”
“신들이 편전에 모인 이유는 전하께 간언하여 정치를 바로잡기 위함으로······.”
“좋은 의도였다?”
“그러하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답했다.
“그렇다면 나도 자네에게 준법정신을 새겨주겠다는 좋은 의도로 교화소로 보내줘야겠군. 위사들?”
이번에도 유생 하나가 끌려갔다. 억울하다고 호소했지만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다음?”
두 명이나 연이어 박살이 나자 유생들은 상황이 지극히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함께 자리한 대신인 우의정 이이를 바라보았지만, 이이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그도 다음 표적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듯이.
그러자 왕이 도발하듯 손짓했다. 들어오라고.
“전하! 어찌 전하께서는 간언하고자 모인 유생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트집 잡으시어 벌을 주시옵니까?!”
“고작 트집이나 잡혀서 벌을 받을 정도로 안이한 마음으로 왕을 대면하였다는 말인가? 기군망상이 따로 없군. 자네도 정신 개조가 필요하겠어. 교화소에서 말이야.”
용감하게 나선 유생도 악을 썼으나 결국에는 떡이 되도록 맞고 끌려나갔다.
“······.”
세 명의 유생이 발악조차 못 해보고 떡이 됐다.
유생들은 현실이 눈앞에 닥친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조용해진 것을 보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시선을 돌린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나는 눈에 띄인 유생을 불렀다.
“어이, 너!”
“시, 신 말이옵니까?”
“마침 나서주었군.”
“마침이라 하신다면······.”
유생은 자신을 부른 게 아니었냐는 듯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나섰다고.
“나에게 할 말 없나?”
“그것이······.”
“고작 내 시야나 가리고자 앞에 자리한 건 아니겠지?”
“아니옵니다!”
유생은 힘차게 답하고는, 힘없이 물었다.
“아뢰옵자면······ 처음에 수라가 지극히 사치스럽다는 말이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하실 말씀이 없으시옵니까?”
“아. 내가 그쪽으로는 할 말이 없어서 안 걸고넘어졌다고 생각하나 보군. 머리가 잘 돌아가는 친구야.”
나는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유생은 나의 반응으로 자신의 미래를 직감했는지 처참한 표정이 되었다.
“우환이 있거나 근심이 있다면 손에 잡히는 게 없는 법. 능률은 사람의 기분을 따라가지. 천만 백성의 명운을 쥔 나라면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사치를 부려도 되지 않겠나?”
“하, 하오나 그러한 이유로 사치를 경계하지 않는다면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재물을 낭비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질 것이옵니다.”
“예를 들자면?”
“서진의 석숭과 왕개처럼 말이옵니다.”
사치로는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의 부유함은 한계가 없기로 유명했고, 누가 더 많은 사치를 부렸느냐로 쓸데없이 기싸움을 했다.
“석숭과 왕개가 사치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부가 백성들에게 돌아가기라도 했겠는가? 그렇게 민생이 구원되고?”
“정 쓸 곳이 없다면······.”
“좋아. 재미있군. 흥미로워. 자네를 가르친 사람이 누구지?”
유생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답했다.
“조부이옵니다.”
“그냥 조부라고 하면 내가 아나.”
“중종대왕 시절 보성 군수를 지낸 권연이라 하옵니다······.”
“좋아. 자네는 아주 좋은 사고를 함양하고 있어. 조부에게 배웠다니, 분명 자네 조부도 용처 없는 부를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를 원할 걸세. 위사! 권연과 그의 자식들이 가진 재물을 조사해 땅뙈기 하나만 남겨두고 모조리 압류하여 인근 관아의 경비로 쓰게 하라!”
졸지에 친척들에게 맞아 죽게 생긴 유생이 기겁했다.
“저, 전하!”
“뭘 그리 놀라는가?”
“소, 소신이 말하고자 한 바는······.”
유생이 다급히 말을 이었지만, 뻔한 변명이나 지껄이겠지.
나는 가볍게 일축했다.
“왕에게 말할 때 신중을 기하지 않았다니 나를 우습게 여긴 건가? 이 친구도 교화소에서 심신을 수련할 필요가 있겠어.”
그것으로 족했다.
위사들은 항변하려던 유생을 떡으로 만들어 끌고 나갔다.
신기한 점은, 이미 많은 위사들이 반인반떡이 된 유생들을 끌고 나갔지만 경연장에는 여전히 많이 자리해 있다는 점이다.
마치 인원수를 맞추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래!
나는 인원수를 맞췄다. 모두 떡으로 만들어버릴 생각을 하고서!
“왜 다들 말이 없지?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게 만들어 경연을 다시 시행하게 만들자는 없나? 아니면 단순히 의정과 경연관이 자신들보다 못난 줄로 알고서 산책하듯 경연장을 찾았나?”
유생들은 일이 정말로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깨닫고서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보는 사람만 없다면 당장 도망칠 놈들도 몇 보였다.
물론 나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어허. 미리 생각해두지 않고 이제야 잔대가리 굴리며 왕의 시간을 하염없이 뺏을 생각인가? 이제부터 말이 끊어질 때마다 열을 세겠다. 숫자를 다 세게 된다면 전원 왕을 기만한 것으로 알고서 교화소에 처박겠다.”
“저, 전하!”
결국 유생 하나가 엎드려 외쳤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소신들이 잘못했사옵니다!”
“전하!”
안돼.
봐줄 생각 없어.
“내가 열까지 세겠다 했거늘 제대로 된 말을 하는 자는 없고, 무작정 저지른 일을 용서받기만을 원하는구나. 위사들!”
나의 명을 받은 위사들 모두가 경연장으로 뛰어들었다.
유생들은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복날의 개 맞듯이 몸으로 피육음을 연주해댔다.
악단이 따로 없었다······.
“그만.”
유생들이 상갓집 상주들보다 더 서럽게 울 지경이 되어서야 나는 매를 거두었다.
그리고 우의정에게 물었다.
“내가 대신들에게 초석의 수급을 확충할 방안을 고려하라 하였는데, 우의정은 나에게 할 말이 없나?”
“그, 그것이!”
이이는 뒤편에서 몸을 엉킨 채 눈물과 곡소리를 쏟아대는 기괴생명체를 의식했는지, 시선을 바들바들 떨며 답했다.
“취토군을 늘려 생산량을 증대하는 것으로······.”
취토군!
특정한 장소의 흙은 초석을 많이 품고 있었고, 이 흙을 캐는 군인을 취토군이라 불렀다. 예나 지금이나 부려먹기 만만한 놈이 군인이었다.
“이미 많은 취토군이 초석을 생산하고자 궁궐까지 들쑤시거늘, 취토군을 늘리자? 질 좋은 흙은 갈수록 줄어드는데 근본적인 개선 방법은 없고 정해진 땅에 사람만 많이 투입하자니, 이게 의정부가 달포 넘게 일한 결과물의 수준인가?”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뒤편의 비탄에 빠진 유생들로 이루어진 기괴생명체에게 물었다.
“그대들 중에 방도를 가진 자는 없나?”
“······.”
나올 리 없었다.
“좋아! 뭘 먹어봐야 똥만 싸지르는 자네들과 달리, 나는 비싼 밥을 먹어도 괜찮은 이유를 알려주도록 하지. 우의정!”
“예, 예!”
“양주 궁방전의 비료 만드는 곳을 찾아가게. 취토군들과 함께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