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17화
75. 마법의 가루 (1)
왕은 더 말 섞기 싫다는 듯 벌떡 일어나 정전을 빠져나갔다.
뻥 열린 정문에서 연초의 스산한 바람이 몰아쳤다. 본전도 못 건진 홍섬은 관복의 목을 내리며 숨을 돌렸다.
“후.”
맞은편의 좌의정 노수신이 말했다.
“쇄골표풍(碎骨飄風)이라니,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쇄골표풍이란 매장된 시신을 꺼내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린다는, 시신조차 예로 다하는 조선에서는 지극히 흉악한 형벌이었다.
“진심은 아니실 거외다.”
“음······. 모르지요. 전하의 성격이 예전 같지는 않잖습니까?”
“정무의 부담으로 날이 서신 것뿐이요. 좌상께서도 내가 의금부까지 다녀왔지만 몸 성히 나왔다는 걸 알고 계시잖소.”
사실 홍섬은 단순히 의금부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온 정도가 아니었다.
모두가 방심한 사이 왕과 비밀스러운 자리도 가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홍섬은 그때의 일은 굳이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흔들면 따뜻해지는 자루?
하!
늙은이가 갈 때가 되어서 정신이 어질어질하신가, 하고 비웃음 사기 딱 좋았다.
“영상께서 호언장담을 하신다면야 이 사람이 더 무어라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사군 이야기를 이어가신 건 상책이 아닌 듯합니다.”
“연해도를 다스리는 일이 쉽지 않으니,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 때를 우려했지요.”
연해도 관찰사 유극량은 현지의 사정과 돌아가는 흐름을 상세히 기록하여 주기적으로 보내고 있었다.
이제 의정부의 대신들은 유극량이 보낸 장계라면 펼치는 것조차 두려울 지경이었다.
야만적인 여진족에게 세입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단지 협조만을 바랄 뿐이거늘 놈들은 그조차 하지 않았다.
세제개혁으로 세입은 늘어났으나 그 늘어난 세입이 모조리 연해도에 들어갈 판이었다.
“하지만 좌상의 말씀대로 상책은 아니었소이다.”
왕은 평소 신하들에게 책임감을 강조했다.
그런데 영의정이라는 사람이 여차하면 발 뺄 생각으로 떡밥을 뿌렸으니 화가 안 났겠는가.
짐작하고 있었던 반응이었다. 의정으로서 만일을 대비하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연해도의 사정은 그만큼 어려웠다.
“전하께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어 보이셨습니다. 설마 폐사군을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시는 건 아니겠지요?”
“흐음! 이미 연해도도 부담이 큰데 사군까지 회복하라 하시겠소?”
“설마가 사람 잡는 법입니다. 게다가 전하께서는 무언가를 해내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해내는 사람이 아닙니까?”
개국 이래 조선의 숙원이었으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 굴포운하와 종계변무를 성사한 사람이 바로 금상이었다.
노수신이 말을 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전하께서 무언가를 시행하시고자 한다면 예전에는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셨지만 지금은 우리 제신들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의정 이이가 끼어들었다.
“다 나라와 종묘사직을 위한 일이니 전하께서 하명하신다면 시행할 따름입니다.”
“우의정, 성인들의 말씀을 언어와 심력의 낭비라 평가하시고 경연을 폐하신 것도 다 나라와 종묘사직을 위한 일인가?”
“빈정대시려는 의도가 아니리라 믿습니다. 좌의정 대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걸세. 정녕 우의정께서 진심으로 전하의 일이 다 맞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신하의 책임감을 강요하고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건지.”
“아니, 이 사람이 언제 신하의 책임감을 강요했단 말입니까? 그리고 신하가 책임감을 가지는 게 문제라도 된단 말입니까?!”
노수신과 이이가 언성을 높이자 퇴장하지 않고 있던 중신들의 시선이 모였다.
결국 홍섬이 나섰다.
“자, 자. 진정들 하시게. 우의정 말대로 신하로서 책임감을 가지는 것도 맞고 전하의 명을 믿고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좌의정이 종묘사직을 위해 목숨 걸고 소윤 일당과 맞서 싸운 사람임을 잊지 마시게.”
“크흠.”
“흠.”
두 사람이 헛기침하자 홍섬이 말했다.
“사군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지역이지만 당장은 아니야. 지금은 연해도의 일만으로도 모두가 바쁘지 않나.”
이이도 유극량의 장계를 펼칠 때는 긴장부터 했다.
전하께서 내리는 분부는 마땅히 진심과 전략을 다해 이행함이 맞다. 하지만 연해도에 이어 사군 같은 어려운 일은······.
당분간 피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흠흠. 하지만 전하께서 명을 내리신다면 이행하는 수밖에는 없잖습니까?”
“방도가 없지는 않네.”
“무엇입니까?”
노수신도 귀를 기울였다.
“전하의 관심을 다른 데 끄는 거지.”
“가능하겠습니까?”
“시도는 해봐야지 않겠나. 내가 좋은 생각이 있으니 다들 따라오게. 삼의정이 함께 청한다면 들어는 주시겠지.”
* * *
편전.
“내가 여진족들과 많이 어울려봐서 그쪽 사람들 생리는 많이 알지. 그들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 아니라 상하일세. 누가 위인지 아래인지 확실하게 가르쳐 줄 필요가 있단 말이지.”
왕이 말했다.
“일일이 다 찾아가서 때려눕힐 여유는 없으니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과 공포를 준다면 효과가 크겠지. 저번에 몰살했다던 니탕개와 수하들을 고이 묻어주지는 않았겠지?”
용정 군수가 적병의 장례까지 치러줬는지는, 삼의정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적병의 시체에서 두개골만 분리하여 투구 위에 붙이는 건 어떤가? 아니면 반으로 갈라서 앞뒤로?”
홍섬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흉물처럼 보일 것이옵니다.”
“내가 원하는 바가 바로 그걸세! 지옥에서 막 기어 나온 싱싱한 악마의 군대처럼 보인다면, 겁대가리 없는 여진족 친구들도 어설프게 반항하기 전에 생각을 한 번쯤은 더 해보지 않겠나?”
홍섬은 왕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장인 니탕개는 높은 장대에 매달아서 대장기와 함께 들고 다니는 게 좋겠군. 다른 시체들도 함께 말이야. 악마의 군대가 따로 없겠군! 좋아, 이순신에게 명해 내가 말한 대로 꾸미고 연해도를 한 바퀴 돌아다니라 하게!”
“전하!”
“응?”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왕은 그제야 삼의정을 발견했다는 듯 아, 하고 감탄하더니 물었다.
“무슨 말인가?”
“지극히 중요한 나라의 일이옵니다.”
“말하게.”
홍섬은 좌우의 노수신, 이이와 눈을 마주치더니 결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의 춘추가 많은 편은 아니시나, 세상의 일이란 모르는 법이옵니다.”
“후사라도 가지란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군주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후사를 튼튼히 하여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종묘사직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급작스럽군.”
“······.”
왕이 자신들에게 사군을 회복하라는 지극히 어려운 명령을 내릴까, 관심을 돌리고 싶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야 있겠는가.
금상께서는 약간 일에 관심을 덜 가지실 필요가 있었다.
처음 금상이 즉위했을 때 적잖은 사람이 우려를 표했다. 눈치 볼 사람이 없어진 왕이 폭군, 적어도 암군이 되어 정사(政事)가 아닌 남녀 간의 정사(情事) 따위에 몰두하는 건 아니냐고.
하지만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왕은 즉위한 이래 쉬지 않고 일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도 쉬지 않고 일을 시켰다.
세제개혁, 토지 조사, 호구 조사, 철광 개발, 철장 단지 개발, 농기구 생산, 연해주의 행정 수립, 조직 재편, 군사 파견, 일정 조율, 물자 조달 등등.
왕은 용정 군수 이순신의 군대가 지옥에서 갓 기어 나온 악마처럼 보여야 한다고 했지만, 그들이 어떻게 꾸미더라도 경관들 눈에는 이쪽 이순신이야말로 진짜 지옥에서 갓 기어 나온 싱싱한 악마였다.
이제 신하들은 왕이 정사(政事) 대신 정사(情事)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다주길 바라고 있었다.
“경들도 내가 바쁜 몸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하지만 이런 때라도 국본을 세우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는 없사옵니다.”
“바쁘다니까.”
“시간을 내시옵소서.”
“그럼 삼의정이 당분간 내 일을 맡아줄 건가?”
왕이 서안을 밀어냈다. 위에는 돌돌 말린 권자가 탑을 이루고 있었다.
신하가 일을 많이 하면 자연스럽게 최고 책임자인 왕도 일이 많아지게 마련이었다.
“······.”
“왜 말이 없어지나, 영의정.”
“시, 신들이 어찌 감히 전하의 일을 대행할 수 있겠사옵니까.”
“나보고는 합궁할 시간을 내라기에 내가 잠시 경에게 일을 맡기려는데, 마다한다면 내가 어떤 장단에 맞춰야 한단 말인가?”
홍섬은 민망했는지 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왕이 웃는다.
“하하!”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삼정승의 곁을 돌았다. 홍섬은 화들짝 놀랐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주물렀으니까.
잠깐 동안이었으나 홍섬에게는 혼란스러운 경험이었다.
자신이 느낀 감각이 환상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영의정이 겁이 많으시군!”
왕은 한 바퀴 돌아 다시 어좌에 자리했다.
“설마 폐사군이니 쇄골표풍이니 하는 말에 놀란 건 아니겠지?”
“······.”
“심각해지지 말게.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나? 회복은 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너무 늦었다고.”
이에 왕의 반응을 제법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노수신이 당혹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어전에서는 어찌하여 노하셨사옵니까?”
“연출일세, 연출. 내가 지랄을 떨어야 중신 친구들도 조금은 자기 일에 진지해지지 않겠나. 영의정이라면 다른 의정들에게는 미리 말해줄 줄 알았는데.”
“달리 들은 바가 없사옵니다.”
노수신은 무엇을 숨겼냐는 투로 홍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홍섬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날 밤의 일을 자신이 말해도 되는 거였냐고.
“아, 영의정이 곤란해할 수도 있으니 내가 말해주지. 언젠가 나와 영의정은 늙은이 대 젊은이로, 왕 대 신하로, 결정적으로는 남자 대 남자로 밀회를 가진 적이 있지.”
“남자 대 남자로, 말이옵니까?”
“사나이 대 사나이로.”
노수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두 남자가 밀회를 가졌다는 표현에 불량한 망상이라도 하는 게 분명했다.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다면 관두게. 그날 밤 있었던 일이라곤 나와 영의정이 술상을 끼고서 진귀한 음식을 먹으며, 추운 곳에서 몸을 데웠다는 게 전부이지.”
“예?”
“자세한 사정이 궁금하다면 나중에 영의정에게 물어보게. 하지만 좌상이 생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걸세.”
“전하. 혹시 신들을 놀리고 계시옵니까?”
“경들도 알겠지만 나 같은 친절하고 착한 사람이 모두의 앞에서 재미없고 날 선 군주를 연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세. 그래서 반동이 오는 거지.”
딱딱한 사람으로 연기한 만큼, 가벼운 사람이 되는 거다.
“그렇다면 폐사군은 진정으로 급하게 생각지 않으시는 것이옵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어쩌기에는 너무 늦은 일이라고. 다들 연해도로 힘들 텐데 사군으로 또 지지고 볶을 수는 없지. 나도 바쁘긴 매한가지라고.”
“······천만 다행이옵니다.”
노수신이 가슴을 쓸어내리자 이이가 물었다.
“전하, 혹시 오래전 경연의 자리에서 나누었던 대화도 진심이 아니셨사옵니까?”
“그런 취지를 전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 하지만 버릇없는 경연관들의 기강을 잡을 필요도 있었을 뿐이네.”
“신은 일생을 고민하여 주기론을 도출하였사옵니다!”
“그게 어디 가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
이이는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가긴 했나 보다.
불태워져 한 줌 재로 흩날렸다던가.
경연에서 들은 쓴소리에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아, 너무 아쉬워하지 말게. 경의 주기론은 300년 뒤에는 밥 한 끼 먹기 힘든 친구들만 집착하는 이론이 될 테니까.”
21세기 대한민국은 선비들이 밥 빌어먹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졸지에 자신의 역작과도 같은 사상이 밥 한 끼보다 못나게 된 이이는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300년은 무엇이고, 소관의 주기론에 무슨 문제가 있어 밥도 못 먹는 자들만 집착하게 된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설명해줘도 모를 걸세.”
“말씀이나마 해주시옵소서!”
“경은 잡곡이 쌀보다 가치가 더 높아진다면 믿겠나?”
“그건······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이거 봐.”
미래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상식과 어긋난 예측은 믿지 않는다.
이이가 아무리 천재라도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 순간의 시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법.
“다들 우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확인했으니, 마음 편하게 먹게. 남의 밤일 사정에는 관심 가지지 말고.”
“예······. 그럼.”
삼정승들은 발등에 붙은 불은 껐으나 도리어 의문만 한가득 늘어났다. 하지만 왕이 친절하게 설명해 줄 분위기는 아니었으므로, 이만 물러나기로 했다.
무슨 일이 더 벌어질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삼정승이 채 일어나기도 전에 일은 벌어졌다.
“그런데.”
“······?”
“화약 비축이 계속 줄어들고 있더군. 초석 수급이 부족한 모양인데 삼의정이 알아서 방도를 강구 해봐.”
홍섬과 노수신, 이이는 기우로 찾아왔다가 진짜로 일이 늘어나서 돌아가게 되자 ‘그런데’라는 말이 나왔을 시점에서 도망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 * *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댓바람부터 밖이 시끄러웠다.
덕분에 자다 깬 나는 방문부터 열었다.
좌우를 지키고 선 내시들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 상태가 정상이냐는 투로 팔짱을 끼고 있으니 하나가 보고했다.
“성균관의 유생들이옵니다.”
“언제부터 성균관 유생 딱지만 달고 있으면 범궐을 해도 용납해주었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정문을 열어젖혔다.
동쪽에서 어스름히 태양이 솟아오르는 가운데, 밤잠도 없는 유생 놈들이 박석 위에 오와 열을 맞춰 무릎 꿇고 있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이가 없었다.
“다짜고짜 무엇을 통촉하란 말인가?”
“소신들의 상소를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두고두고 개소리만 지껄이기에 안 받아주는 것이거늘, 뭐가 불만이라 바쁜 사람을 더 바쁘게 만드는 건가?”
“경연을 시행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