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16화
74. 니탕개의 난 (2)
“걱정해주니 마음은 고맙네만 필요하면 부를 터이니, 섣불리 개입하지 말게.”
토관이 보기에 이순신은 똥배짱을 부리고 있었다.
주겠다는 도움도 굳이 마다한다면 강요할 수는 없겠지.
조선군이 니탕개군에 격멸 당하더라도 토관들이 가져온 병력이 있었다. 다들 몇 번이고 실전을 겪어보았고, 휘하의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이 아무리 개판을 쳐놓아도 니탕개군이 소금간 정도는 될 터이니 그때 나서면 되리라.
“알겠습니다.”
토관은 성의 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행군을 이어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토관들이 말을 세웠다.
“군수, 여깁니다. 여기부터 니탕개의 영역입니다.”
“좋아. 전 권관.”
이순신의 부름에 권관이 나섰다.
그는 미끼작전을 수행했을 때부터 입었던 갑주를 여전히 걸치고 있었다. 화살에도 맞았고 낙마까지 했거늘 추호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상태는 괜찮나?”
“괜찮습니다.”
“오기를 부렸다가 실수하게 된다면 나는 그대를 벌할 수밖에 없네.”
“자신 있습니다.”
“그래. 믿고 맡기지. 조총수 스물을 이끌고 전방을 확보하게.”
“예.”
권관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수하들을 불렀다. 개중에는 함께 미끼 작전에 동원되었던 자들도 있었다.
명장 아래 약졸 없다던가.
권관을 제외하고는 말단 병졸이거늘 대오를 갖추니 풍기는 기개가 남달랐다.
“그럼,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가게.”
권관은 말을 맡긴 채로 하마하여 수하들과 먼저 떠났다. 그들이 제법 앞서 나갈 즈음 이순신과 토관들도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나아가니 병사 하나가 길에서 이순신을 맞았다.
“전언인가?”
“예. 이 앞에서 숲이 끝나고 구릉 아래 초원이 펼쳐집니다.”
토관이 곁들였다.
“니탕개의 본거지입니다.”
이순신이 말했다.
“권관에게 더 나아가지 말고 경계에서 기다리라 전해라.”
“예.”
병사는 예를 올리고는 저만치 나아갔다.
이순신은 말허리를 걷어차며 토관에게 물었다.
“니탕개는 허술한 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만만한 자였다면 진즉 회령군에 의해 복속됐겠지요.”
과연 니탕개는 겁대가리 없이 조선의 사정에 개입할 정도의 강단과 들키지 않고 영내에 침투해 파발대를 죽인 교활함, 그러고서 서찰까지 탈취한 철저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런 자가 경계를 허술하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맞습니다. 아마 매복은 섣불리 선발대를 노리는 대신, 본대의 규모까지 확인하고서 물러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민한 놈이다. 숲에서 나오면 맞아주겠군.”
이순신의 예상대로였다.
숲을 빠져나오자 언덕 아래에서 여진족들이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권관이 답했다.
“숲에 첨병을 숨겨둔 모양입니다.”
“바보는 아니라는 거지.”
“시계가 좋지 않아 정확한 추산은 어렵습니다만, 기병 이백에 보병 백 정도로 예상됩니다.”
“어렵지 않겠군. 합류해라. 언덕을 내려간다.”
높은 위치라는 이점을 놓치기는 싫었지만 니탕개는 이쪽이 대오를 갖추는 동안에도 관망했다. 절대 올라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토관들은 언덕을 지켜라. 별도 명령이 있기까지 전투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전황이 안 좋아진다면 효시를 쏠 터이니 그때 구원하라.”
“알겠습니다.”
“우리는 내려간다.”
이순신은 병력을 준시킨 뒤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적진에서는 적장이 무어라 외치기 시작했다. 수하들의 전의를 고취하는 것인가. 이순신은 그에 맞서 연설 대신 명령을 내렸다.
“모두 창을 세우고 조총을 얹어라!”
전열은 수평으로, 후열은 사선으로.
대군이라고는 못하겠으나 병사들이 일시에 사격 자세를 취하자 위엄이 살았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함부로 방아쇠를 당기지 마라!”
이순신은 엄하게 외쳤다.
군관들의 긴장어린 시선이 주변을 향하는 가운데 병사들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토해내며 적을 주시했다.
새로 부임한 군수는 무관 출신임을 자랑하듯 사무만이 아니라 군무에도 공을 들였으며, 적극적으로 훈련을 실시했다.
나아가 신상필벌을 확실하게 하고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군수는 피곤한 사람이었으나 존경할 이유가 있는 자이기도 했다.
-두두두두…….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어둠속에서 인영들이 흉흉한 기세로 접근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마치 최면이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과연 적들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 걸까.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와 모두를 베어 넘기는 것은 아닐까.
생사의 기로에서 몰아치는 긴장은 판단력을 떨어뜨리고 생존 욕구를 부추겼다. 거의 몽롱할 지경이다. 그 가운데 이순신이 외쳤다.
“내가 너희들과 함께한다!”
자신감 어린 목소리가 밤을 쩌렁쩌렁 울렸다. 병사들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창대와 조총을 힘주어 쥐었다.
맞은편의 발소리가 멈추자, 이순신은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명령했다.
“방포하라!”
전열의 병사들이 손가락을 당겼다. 쇳덩어리인 방아쇠가 부러질 정도였고, 붉은 점으로 타들어가던 화승의 끝이 화약접시를 때렸다.
-타타타당!
요란한 폭음과 함께 야밤의 안개가 자욱하게 일었다.
그 안개 너머로 비명이 터지더니 곧바로 화살이 날아왔다. 하지만 적의 규모에 비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이순신은 적이 화살을 쏘기 직전 먼저 사격한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가오던 적이 어찌하여 일순 멈춰 섰나. 이순신은 처음으로 전장을 경험했으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적들이 화살을 쏘고자 멈춰 선 것이라고. 그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격을 명령했다. 정확한 반격이었다.
“전열, 거창하라!”
총열을 비운 전열의 병사들이 조총 대신 창을 쥐었다.
자루가 가슴께 오는 단창이나 몸을 낮추고 양손으로 틀어쥐니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두 개로 갈라진 꼬챙이 같은 창날은 얼핏 창벽이 두텁게 보이는 착시도 만들었다.
“후열, 조준하라!”
적진에게서 발악적인 고함이 나왔다.
아까의 반격으로 제대로 피해를 입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은. 저들은 저들의 굴혈과 가족을 지키고자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는 게 분명했다.
-두두두두…….
다시 말발굽 소리가 대지를 강타했다.
40보.
정면에서 야만적인 고함 소리가 하늘을 때렸다. 갈수록 커져가는 비명 섞인 고함에, 조총수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떨었다.
30보.
적들은 마치 멧돼지처럼 돌격하고 있었다. 조총수들은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기고픈 충동을 느꼈다.
주변에서는 군관들이 기다리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러댔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보다 적들의 목소리가 더 크다.
그리고 20보!
“방포하라!”
병사들을 만류하던 군관들이 갑자기 말을 바꾼다.
“방포하랍신다!”
“쏴라!”
-투다다다다다!
다시 총연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적의 면상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이루어진 사격의 결과물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지만 방심이란 있을 수 없다.
이순신은 맞은편에서 여전히 무언가가 달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살아남은 적인가!
거대한 물체가 총연을 뚫고 나타났다.
말이다!
“헉!”
이순신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다. 가려진 시선 너머로 전마의 빈 안장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 잃은 말은 펄쩍, 뛰어 조선군의 대오를 넘어버리고는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이순신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태연하게 외쳤다.
“전원 창을 들고 돌격해라! 나아가면서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모두 찌른다!”
군관들은 환도를 뽑아 들고서 군수의 명령을 받아 전달했다. 조총수들은 이제 총을 놓고 창을 들었다.
이제 고함을 지르는 쪽은 조선군이었다.
무수히 많은 인파가 자신들이 만든 연기를 헤치고 달려나갔다.
채 죽지 않은 적들이 연기 속에 드문드문 서서 방황하고 있었다. 무기도 없이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던 그들은 단말마도 없이 꼬치가 되어 쓰러졌다.
조총병들은 계속해서 달려나갔다.
연기가 흩어지고 전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만! 정지!”
이순신이 외쳤다.
전장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거칠고 야만적인 적들의 존재는 마치 환상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맞은편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친 바람 소리만이 주변을 메울 뿐.
병사들이 밟고 선, 그리고 그 주변으로 펼쳐진 적과 전마의 시신만이 전투가 환상이 아니었음을 입증할 뿐.
조선군의 진영에 적막이 감돌았다.
“돌아간다.”
지휘관의 명령에 병사들은 숨을 헐떡이며 물러났다. 전투는 이겼다. 하지만 기쁨을 표하기에는 너무나도 으스스한 밤이다.
아마도 내일이 되면 마음을 놓을 수 있겠지.
이순신은 조총수의 총원과 부상자의 숫자를 확인하고 토관들을 찾았다.
“벌써 끝내셨습니까.”
토관 하나가 말했다.
제법 고생할 줄로 알았던 이순신과 조선군은 순식간에 니탕개군을 끝내고서 귀환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토관들은 은근히 경외 어린 시선이었다.
“수하들을 이끌고 적진을 진압하게.”
“아주 없애버릴까요.”
“병사들이 지쳤으니 쉬게 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군.”
“받들겠습니다.”
토관들은 각자의 여진족 장정들을 이끌고 전장을 가로질렀다.
거치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여진족과 전마의 시체요, 어디에도 조선군은 없었다.
* * *
“전하.”
병조판서 을룡이 모두의 앞에서 운을 뗐다.
“무슨 일인가.”
“용정에서 파발이 습격받아 전멸하는 일이 있었는데, 군수 이순신이 배후를 밝혀내어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토멸했다 하옵니다.”
“나는 험지를 자원해서 공을 세우는 사람을 좋아하지.”
왕은 남 말하듯 말했으나, 그의 경력을 따져본다면 꼭 남의 말만 하는 건 아니리라.
하지만 자신을 금칠하는 투는 아니었다.
몇몇 관리들은 연해도 관직에 제수되자 사직을 청하거나 잠적을 시도했다.
물론 그들은 지엄한 명령을 무시한 죄로 재령의 교화소로 보내졌으나, 왕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게 분명했다.
영의정 홍섬이 눈치껏 나섰다.
“연해도 각지에서 여진족들의 반발이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 대승을 거두어 적추(賊酋)를 죽이고 굴혈을 소탕하였으니, 여러 여진족이 보고 배우는 바가 있을 것이옵니다.”
“각사, 특히 의정부와 병조는 연해도 안정에 각고의 노력을 다하라. 나는 나의 대에서 사군(四郡)의 치부를 재현할 생각은 없다.”
함경도 육진과 함께 개척된 사군은, 육진과 달리 개척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졌다.
“폐사군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홍섬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현실적인 한계가 있어 잠시 폐지된 것이옵니다.”
“잠시? 영의정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건가?”
“당시에도 행정구역만 없애기로 논의하였지 영토를 포기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사옵니다.”
“하!”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사군을 지속적으로 침입하여 마침내 행정구역까지 폐지하게 만든 적호(賊胡)들을 번호라 칭하고 그 땅에서 살도록 ‘인정’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거늘, 그들에게 넘어간 백성들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잖나!”
정신승리가 따로 없었다.
“영의정은 목에 칼이 들어오면, 칼을 신체 일부로 인정하고 그것이 목을 가로지르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할 생각인가?!”
“…….”
“패배자로서 부끄러움도 없단 말인가! 사군은 적호들에게 넘어갔어! 그게 현실이야! 만일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자가 있다면, 행정구역이 ‘잠시’ 없어졌을 뿐인 사군의 한 가운데로 요양을 보내주지!”
홍섬과 중신들은 죄인이라도 된 듯 허리만 숙였다.
“사군을 개척하겠다고 하삼도에 잘살고 있던 백성들을 고향에서 떼어내어, 한반도를 바닥에서 천장까지 가로지르게 하고, 이주까지 금해놓고는 폐군이라니 염치없는 짓거리 아닌가!”
“……송구하옵니다.”
“폐사군을 인정하는 걸 보니 연해도도 비슷하게 돌아갈까 봐 미리 간을 보는 모양인데, 과거 폐사군을 논하던 자들의 시체가 뼛가루도 안 남았음을 다행으로 여겨라!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놈들을 쇄골표풍(碎骨飄風, 뼈를 가루 내어 바람에 날림)했을 테니까!”
왕은 더 말 섞기 싫다는 듯 벌떡 일어나 정전을 빠져나갔다.
뻥 열린 정문에서 연초의 스산한 바람이 몰아쳤다. 본전도 못 건진 홍섬은 관복의 목을 내리며 숨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