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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13화 (21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13화

73. 조선 스트렐치 (1)

금상이 군기시 첨정을 지내던 시절.

사내는 비격진천뢰 시연을 보러 나왔다.

나랏님까지 참석하는 자리여서 가까이서는 보지 못하였으나, 멀리서도 느껴지는 우레 같은 폭음과 땅의 흔들림에 전율했다.

그는 소녀처럼 화약과 폭발을 사모했다.

몇 년 후.

“금상께서 직접 발명하신 조총과 비격진천뢰의 생산량이 왜 이렇게 적단 말인가?”

사내는 철장 단지의 장인이 되었다.

주변은 가마의 빛으로 눈이 따가웠고 철 두드리는 소리에 귀는 멎을 지경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칠공분혈하며 도망치겠지만, 다들 고된 환경에 익숙한 장인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사내의 중얼거림에 답했다.

“우리는 위에서 만들라는 대로 만들면 그만이야!”

“허!”

사내는 가당찮다는 듯 이쁘게 깎은 총열을 들어 보였다.

“이렇게 대단한 물건을 고작 달포에 수십 정만 만든다고? 열 배, 백 배, 천 배는 만들어야지!”

“지금 달에 몇 개 만드는 조총도 사람 잡을 지경인데 백 배, 천 배를 만들라고?”

다른 동료들도 빈정거렸다.

“장손이, 대가리 고장 났나?”

“우리 장손이가 고생을 덜 했구만.”

“앞으로 총열 깎는 일은 장손이가 일임하면 되겠는데?”

조총의 총열은 좌우를 따로 주조해 접합하여 만든다.

만일 접합부에 요철이 있다면 총열이 폭발할 수 있고, 최소 가스 누출이었다.

제대로 연마할 필요가 있었으나 사람의 힘으로 쇠를 깎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분업화된 철장 단지에서 연마장(鍊磨匠)은 모두가 사양하는 헬보직이었다. 그런 연마장 사이에서 총열 더 깎자는 소리는 공병 사이에서 장간조립 더 하고 싶다는 급의 미친 소리였다.

“자네들은 조총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몰라!”

“어이 이씨, 아가리 닫고 총열이나 깎아!”

당일 오후.

장인들은 작업을 끝내고 각자의 처소로 흩어졌다.

그 가운데 이장손만은 손을 달달 떨면서도 쉬지 않고 따로 찾아가는 곳이 있었다.

철장 단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주둔지.

교화소에서 발생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자 다수의 무관과 병사들이 상주하는 곳이었다. 또한 단지에서 만들어진 군수물자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주둔지는 보안을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했으나 이장손은 물자를 나른다는 명분으로 태연히 드나든 지 몇 달째였다.

“고생들 하십니다.”

출입구에 선 이장손이 초병들을 향해 인사했다.

“고생하시오.”

초병이 답하자 이장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주둔지로 들어섰다.

안쪽에서 총성이 나고 있었다.

-탕!

이장손은 가져온 조총을 창고에 인계하고 뜰을 찾았다.

무관 하나가 막 조총을 장전하고 있었다. 그의 좌우에는 시험사격 전후의 조총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나으리.”

이장손의 부르자 무관이 고개를 돌렸다.

“아, 자넨가.”

“금일 물자를 막 수납하고 오는 길입니다.”

“좋은 변명거리가 있어 다행이로군.”

무관은 피식 웃었다.

그는 이장손이 제집처럼 주둔지를 드나들며 친분을 쌓은 몇 안 되는 무관 중 하나로, 유일하게 통성명까지 한 사이였다.

이순신!

여해.

주둔지 안팎의 사람들은 이순신을 재미없는 원칙주의자로 평가했다.

실제로도 그랬으며, 이순신은 친한 이장손이라도 물자를 수납한다는 이유 없이 주둔지를 드나들었다만 무단출입으로 죄를 물을 자였다.

하지만 이장손은 그런 이순신이 싫지 않았다.

“석반은 드셨습니까?”

“아직일세.”

“송구한 말씀이지만, 괜찮으시다면 누택에서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러지. 하지만 당장은 안 되네. 아직 쏴야 하는 조총이 많이 남아서 말이야.”

“기꺼이 기다리겠습니다.”

이장손은 자리에 앉아 이순신이 방아쇠 당기는 모습을 구경했다.

-탕!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총연이 자욱하게 퍼졌다.

이장손도 직접 조총을 쏴보고 싶었으나, 일개 장인에게는 턱도 없었다.

하지만 과거 비격진천뢰 시연을 구경하며 깊게 감명받았던 것처럼, 그는 굳이 방아쇠를 당겨보지 않아도 만족할 수 있었다.

시험사격이 끝나자 이순신은 병사를 불렀다.

“모두 수납하게. 전부 사격이 끝난 것들이니 기존의 것들과 섞이지 않도록 유의하도록.”

병사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동료들을 불렀다.

일을 마친 이순신이 이장손에게 나아갔다.

“가지.”

“예!”

* * *

문관은 무관을 양반 언저리로 치부하며 업신여겼으나, 양인 혹은 관노 출신인 장인들에게 무관은 하늘처럼 높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장손이 이순신과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음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조총 전술 연구는 진전이 있으십니까?”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군.”

폭음이 주는 감동은 신무기를 이용한 전술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주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주변에 각자의 관심사를 공유할 사람이 없었다.

장인들에게 화약과 열병기는 일감에 지나지 않았고 무관들에게는 한평생 갈고 닦은 무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물건이었다.

한평생 갈고 닦은 무예를 헛수고로 만드는 원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총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났으니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점은 참고할 사료가 많지 않다는 걸세. 그나마 총통이 조총과 원리는 비슷하지만, 성격이 달라 참고는 제한적이지.”

“전하께서 함경도에 계실 때 조총을 이용해 여진족을 패퇴했다고 들었습니다.”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셨지.”

“그쪽 사료는 없답니까?”

“하하. 나도 마음 같아서는 현장을 답사하고 참전자의 증언을 듣고 싶지만, 여의치 않아서 말이지.”

전장은 그냥 함경도도 아니라, 함경도에서도 끝자락인 육진 너머에 있었다.

황해도 재령에서 일하는 이순신이 답사를 위해 잠시 다녀올 거리가 아니었다.

“복직하기 전에 진즉 다녀왔어야 했는데.”

“아쉬운 일입니다. 괜한 참견이겠지만, 굳이 복직을 서두르실 이유도 없으셨잖습니까?”

“그게.”

이순신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잔만 기울였다. 이장손이 눈치껏 술을 채우자 이순신은 단숨에 털어 넣었다.

“…….”

이순신은 폐주가 죽자 미련 없이 사직했다.

다시는 관문에 들어설 일이 없으리라 다짐했다.

몇 년이 지나고, 내시가 찾아왔다. 대뜸 찾아와서 한다는 말은 왕이 뵙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불쾌했다.

그에게 왕이란 반역자들에게 무참히 당한 분이지, 신하로서 왕을 죽이고 빈자리를 차지한 찬탈자가 아니었다.

나아가, 즐비한 무관을 차치하고 고작 선전관 나부랭이나 지낸 자신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찬탈자라 믿을 사람이 없어 그나마 친분이 있는 자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왕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낙향한 사람을, 사적인 친분만 믿고서 불러 쓰려 하다니.

한평생 강직하게 살았던 자신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찬탈자도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기꺼이 어전으로 나아가 반항했다.

절대 신(臣)이라 자칭하지 않았고 찬탈자에게도 전하(殿下)라는 존칭을 쓰지 않았다. 찬탈자 밑에서 신하를 자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시위였다.

찬탈자는 죽은 왕에게 연연한다며 비웃었다. 모욕감을 참을 수 없어 충동적으로 소란을 피우고 말았다.

직후 내시와 위사들이 들이쳤다.

이순신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의 만행으로 역적으로 찍힐 가족과 집안 사람들이 생각났다.

내시가 반역자를 벌하자 간청했다.

-전하, 이자는 감히 어전에서 언성을 높이고 무력으로 항의하였사옵니다!

찬탈자가 말했다.

-그에게는 어전이 아니니 무방하다.

그 순간.

이순신은 왕의 배포에 압도됐다.

‘전하께서는 나를 무시한 적이 없거늘, 나는 전하를 찬탈자라 못 박고 여느 역적이나 폭군과 다름없이 치부했지.’

궐을 나서서는 며칠을 꼬박 앓았다.

과연 충이란 무엇인가.

거듭되는 고민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러다 병조를 찾았다.

“사정이 있었네.”

현실로 돌아온 이순신이 한숨과 함께 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침묵이 있었고 이순신은 애써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직접 조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시키는 대로 만드는 소인이 무엇을 알겠습니까만,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조총이 조금만 더 컸으면 합니다.”

“어째서인가?”

“그래야 위력이 더 세지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위력은 지금도 충분하네. 굳이 크게 만들어 봐야 실효는 거두지 못하고 조준만 힘들어지겠지.”

쇳덩어린 조총을 항시 지참하고서 돌아다닌다는 것은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게다가 조준을 위해서는 양 팔의 힘만으로 꼿꼿하게 들고 있어야 했다.

막 생산된 조총을 길들이는 일에 자원하여 밤낮으로 쏴대는 이순신이라 조총수들의 고생에는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조총수들이 늘 하는 말이 조총을 총통처럼 장대에 끼우고 싶다는 걸세. 땅에 대고 세울 수 있으니까. 물론, 그래서야 방아쇠를 당길 수는 없지.”

“어째서 말입니까?”

이장손이 태연하게 묻자 이순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보라는 듯 팔을 뻗었다.

“조총을 장대에 매달면 방아쇠가 저 끝에 있을 텐데, 어떻게 당길 수 있겠나?”

“장대를 개머리판이 아니라 총신 중간에 붙이면 다르지요.”

이장손이 손을 수직으로 겹쳐 T 형상을 만들었다.

그러자 이순신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아서, 이장손이 당혹해 물었다.

“어…… 제가 실수라도 한 겁니까?”

“아니! 자네는 천재일세!”

“예?”

“조총을 장대에 얹을 생각을 하다니. 수없이 조총을 쏴본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아는군!”

그동안 조총이 무겁다는 생각은 수없이 했지만 쇳덩이이니 어쩔 수 없다고만 치부했다.

계속해서 쏘다보면 팔에 힘이 생기지 않겠나.

이순신은 조총의 불편함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장대에 얹어서 쏘다니.

간단한 발상이었지만 엄청난 혁신이었다.

“조총의 맹점이 무엇인가? 1관(貫, 3.75kg)이 훌쩍 넘는 것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있어야 한다는 걸세. 장전할 때는 낫지만 조준할 때는 제대로 들어야 하지.”

이순신은 두 손으로 조총을 받치는 모습을 취했다.

“보통 고생이 아닐세. 하지만 장대에 받친다면 팔에 전혀 부담이 가지 않잖나. 게다가 수평을 맞출 수도 있지!”

“어.”

이장손은 그냥 내뱉은 말이 혁신으로 대우받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이순신은 저 혼자 신나서 진도를 뺐다.

“장대만으로도 효용은 충분하겠지만 날을 단다면 더 유용하게 쓸 수 있겠지.”

“창날을 말입니까? 끝이 뾰족한 창날에 총신을 댄다면 전혀 고정되지 않을 텐데요.”

“총신이 들어갈 수 있도록 창날을 양쪽으로 낸다면 무방하네.”

이순신은 소리굽쇠의 형상을 떠올리더니, 이제는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그래, 그걸세! 조총수의 맹점이 무엇인가? 적이 근접하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지!”

보조무기인 환도로는 대응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창을 들려준다면 근접전에서도 충분히 적에게 대응할 수 있네!”

“그렇군요…….”

신난 이순신과 달리 이장손의 대답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저 혼자 저만치 진도를 뺀 이순신을 따라잡을 수 없었고,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네는 정말 천재일세!”

아무튼 천재라니 기분은 좋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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