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12화
72. 너는 왜 이순신이죠? (3)
좌우에 제신이 시립한 가운데.
우의정 이이가 물었다.
“전하, 양주의 궁방전에서 큰 공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사옵니다. 부디 신들에게 사정을 알려주시겠사옵니까.”
신하들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이의 말대로 나는 도성의 동북쪽에 붙어 있는 양주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그 규모가 꽤 되었으므로 내막을 모르는 신하들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나랏일은 아니나 나는 기꺼이 답했다.
“백성들이 땅을 개간하는 데 고생이 많으므로 내가 돕고자 사업을 일으켰다.”
“아랫사람들의 노고를 덜어주시려는 마음은 지극히 바람직하오나, 어찌하여 신들에게 일언반구 없이 사업을 일으켰사옵니까?”
“나랏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사업이기에 백성을 도우나 나랏일은 아니라 하시옵니까.”
이이가 파고들었다.
지난 경연에서 몇 마디 듣고는 한동안 조용해졌으나, 어느샌가 기운을 차리고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유학을 빙자해 나를 가르치려던 버릇만 제외하고서 말이다.
평소 이이의 성정을 싫어하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기꺼이 그의 고집에 어울려주었다.
“크게 벌이는 것은 비료 만드는 사업이다.”
“비료, 말이옵니까?”
신하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백성들을 위한 사업이라니 비료를 만들어 어디에 쓸지는 뻔했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비료를 만든단 말인가.
“막 개간한 땅은 지력이 약하여 퇴비가 막대히 들어간다니 내가 개간지가 속히 정상화될 수 있도록 두엄더미를 조성하였다.”
“콩을 기르게 하여도 무방하지 않겠사옵니까.”
“무방하나 시일과 고생이 소요되니, 비료로 해결할 수 있다면 비료로 해결해야지 않겠는가.”
“모두에게 돌아갈 수는 없사옵니다.”
“원하는 자는 마땅히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신하들은 의아했다. 두엄더미를 아무리 크게 조성하더라도 모두에게 충분한 양의 비료가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왕은 당당했다.
신하들이 그동안 겪은 왕은,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방도가 있는 사람이었다. 다들 그러려니 하는데 이이가 물었다.
“크게 벌이는 것이 비료 사업이라면, 크지 않은 사업도 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
“무엇이옵니까?”
“종자 개량소다.”
비료가 단기적으로 소출을 늘릴 방법이라면, 종자 개량은 장기적으로 소출을 늘릴 방법이다.
이 시대에서도 종자는 개량되고 있다.
많은 알곡을 타고 난 작물의 종자는 다음 해에도 논밭에 뿌려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주먹구구식 개량에는 억겁의 시간이 소요 된다.
나는 확실하게 기준과 체계를 갖추고서 종자 개량에만 집중할 연구소를 짓기로 했다.
종자를 개량하여 기존과 비교해 알곡이 하나 더 맺을 가능성이 1%만 높아도 혁신이 되리라.
쌀알 100개 기준에서는 101개가 될 뿐이지만 백만 섬이 기준이라면 만 섬을 거저 얻는 셈이다.
“두 사업 모두 지극히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위한 일임을 알겠사옵니다. 허나 어찌하여 신들에게 맡기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동안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나의 개혁을 이행하고자 노력한 바가 많았는데, 최근 육진 너머의 해삼위가 편입되어 더욱 고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마당이니 사소한 사업이라면 내가 독자적으로 진행함이 조정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제신들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일감이라면 썩어 넘치도록 많았다.
백성을 위한 사업이라도 일손의 한계가 분명한 지금, 조정은 무언가를 더 벌릴 상황이 아니었다.
“북방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나?”
왕의 시선을 받은 영의정 홍섬이 나섰다.
“일단 함경도에 인편을 보내 연해도와 해삼도호부를 확보하게 하였사옵니다.”
“목민관의 선발은?”
“신료들이 지극히 꺼려, 아직은 인력을 선발할 적절한 방도를 논의하고 있사옵니다.”
“자원자는 없나.”
홍섬은 할 말이 없는지 입술을 말고 있다가, 어렵사리 운을 뗐다.
“경관 중에서는 사헌부 장령 정인홍만이 자원하였사옵니다.”
“정인홍이라.”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준 자였다. 나를 따르겠다며 손바닥을 칼로 그어 맹세했으니까. 한동안 접점이 없었고 폐주를 죽였을 때도 사직하지 않아 잊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군.
“정인홍에게는 해삼 부사를 맡기고 나머지 지역은 별시문과를 쳐서 충원하겠다.”
“별시로 충원한다 하심은, 바로 목민관으로 쓰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막 급제한 사람을 연해도로 보냄은 이치에 옳지 않다. 마땅히 기존의 인력을 차출하여 보내고, 빈자리는 별시 급제자들로 채움이 맞지 않겠는가.”
“지극히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제신들의 반발이 클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직을 내려놓고 싶은 자들은 미리 내려놓으라 해라. 어딜 감히 나랏일을 편하게만 하려 하는가.”
신하를 굴릴 때 나는 거의 무소불위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첫 관직인 회령판관도 자원한 것이었고, 세 번이나 전쟁에서 최일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궁궐에서 등 따시고 배부르게 지내는 주제에!’ 따위의 유치한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신하들을 마음껏 조질 수 있다는 뜻이다.
꼬우면 나처럼 참전훈장 3개 정도는 달던가.
“전하, 다양한 사유로 관직을 내려놓게 된 자들이 많사옵니다. 그들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 북방에서 기회를 줌이 어떻겠사옵니까?”
“제가 싫다고 관직을 버린 자들과 죄를 지어 벌 받은 자들을 부릴 바에야, 차라리 개에게 흑립과 도포를 입혀놓고 목민관으로 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적어도 중간은 갈 테니까.
“각사에서 합계하여 목민관들을 선발하라. 임명 이전의 사직은 죄를 묻지 않겠으나, 만일 임명되고서 사직한다면 나랏일을 우롱하는 것으로 알고서 엄벌에 처하겠다.”
본래 권력과 책임은 한 가지인 법이다.
그런데 따로 노는 줄 아는 인간이 많다. 권력은 누리겠지만 책임은 엿이나 먹으라는 마인드다. 이런 쓰레기 같은 태도로 어떻게 공무를 본단 말인가.
자연인이 이기적이건 이타적이건 나는 알 바 아니다.
하지만 공직자가 개념 없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내가 선조를 죽였다. 왕이라는 놈부터 개념이 없어서.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사정을 나에게 알리라. 마땅히 참작이 가능한 사유라면 편의를 봐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성명을 기록해두겠다.”
“제신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질 것이옵니다.”
“천만 백성 가운데 가장 잘난 사람들이 모였거늘 고작 이따위 일로 사기가 떨어지는 자라면, 진정으로 잘난 사람을 모집해야 하니 사직소를 제출하거나 대들보에 목이나 매달길 바랄 뿐이다.”
“…….”
홍섬은 더 따지고 나서지 못했다.
다른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면전에서 칼춤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애써 시선을 회피할 뿐.
한참이나 침묵이 감돌고 있으니 병조판서 을룡이 나섰다.
“전하.”
“말하라.”
“전 선전관 이순신이 복직을 청했사옵니다.”
“가납한다.”
* * *
의정부.
“큰일일세, 큰일.”
홍섬이 중얼거렸다.
주변에 자리한 좌우의정과 동벽, 서벽의 얼굴도 밝지는 못했다. 북방에 채워 넣어야 할 자리는 많은데 자원하는 사람은 부족하다.
이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신하들이 마땅히 신하로서 기능하지 않으니 한탄할 행태입니다.”
신하가 신하다워야 강조한 이이다.
당연한 소리였으나, 홍섬은 세상만사가 당연하게만 돌아가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관직을 지내며 그런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홍섬도 이이의 앞에서는 마냥 당당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우의정 대감의 말씀은 옳지만 지금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북방에 사람을 채워 넣을 방도요.”
“방도가 왜 없습니까? 참상관 중에서 자질이 충분한 자들을 선발하면 그만 아닙니까.”
“어허, 더 자원하는 사람이 없음이 무슨 뜻인지 모른단 말이오?”
“지금 영의정 대감께서는 나라의 대사를 마주하고도 의정부로 향할 화살만 걱정하시는 겁니까?”
이이 상대로 한마디 하려다 되려 정곡을 찔린 홍섬이었다.
왕이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은 덕으로, 목민관은 현직자 중에서만 선발하게 되었다.
그들 모두 크고 작은 권력과 발언력을 가지고 있었다.
목민관으로 선발된다면 자신을 고른 의정부를 향해 저주하고 비난하리라.
원성의 목소리가 섞이고 모이면 천하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재라도 앉은 자리가 편할 수만은 없었다.
홍섬이 차마 반박하지 못하자 이이가 따졌다.
“정 장령이 자신만 자원했다는 것을 알고서 한 말을 모르십니까? 관리들이 죄 보신주의와 안일주의에 찌들었답니다. 나랏일이 고된 줄을 모른다고요.”
“…….”
“윗물인 의정부부터 나서서 수고로움을 자처해야 할 판에, 장관인 영의정 대감께서 안위와 여론만 생각하셔야 되겠습니까?”
이이의 질책에 홍섬이 쓰게 토해냈다.
“이 사람의 생각이 짧았소이다.”
“원칙대로 합시다.”
홍섬은 무기력하게 끄덕일 뿐이었다.
원칙대로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법.
회의가 진행되던 와중 의정부 사인이 승정원의 소식을 전했다. 그새 열 건 이상의 사직소가 제출되었다는 비보였다.
목민관으로 삼을 현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아까운 마당에 무더기로 도망친 것이다.
공을 세워 높은 자리로 올라갈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자들이다. 그런데 가장 정직한 방법으로 공을 세울 기회가 오자 반나절 숙고도 없이 관직을 버렸다.
홍섬은 당하는 입장이 되자 불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라고 그들의 자리였다면 다르지 않았으리라.
북방은 이제 조선의 땅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명목상일 뿐이다.
말을 섞을 수 있는 동포라곤 찾아보기도 힘들 강 너머 최북단에서, 야만적인 오랑캐들 사이에 홀홀단신으로 부임하고 싶은 자가 어디 있겠나.
누구에게라도 쉽게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은 타협할 구석은 추호도 주지 않았다. 무조건 현직자 중에서 선발해야 했다. 그들이 원컨, 원하지 않건.
‘자원하는 사람이 몇 명은 더 나와도 숨통이 트이겠거늘.’
노을이 지자 홍섬은 회의를 파하고 의정부를 나섰다.
연말의 쌀쌀한 바람이 몰아쳤으나 가슴은 여전히 답답하고 무거웠다. 착잡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니, 익숙한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영의정 대감.”
“어…… 자네는?”
홍섬의 두 눈이 커졌다.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중무(仲武)가 아닌가.”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자네도 이제는 관직자이니 편하게만 부를 수는 없지.”
중무는 자로, 본명은 유극량.
중년의 그는 만호의 임기를 다하고서 도성에서 쉬던 중이었으나 본래의 신분은 노비였다.
어머니는 주인 집에서 도망한 노비였다. 유극량은 어려서는 몰랐으나 출신의 비밀을 우연히 듣고서는 대담하게도 주인을 찾아가 모친의 죄를 대신 지겠노라 청했다.
그 기개에 감탄한 홍섬은 유극량을 해방하고 무과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후원해주었다. 유극량은 무과에 급제하여 주인의 호의에 보답했다.
홍섬이 노비 출신임에도 대업과 학문을 이룬 을룡을 괜히 존중하는 게 아니었다.
유극량이 말했다.
“영의정 대감께서는 소관의 옛 주인이시고, 또 목숨으로도 값을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성명으로 부르심이 마땅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홍섬은 사양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혹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연해도의 목민관에 자원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이네.”
“자원하고자 합니다.”
유극량이 담담하게 말하자 홍섬이 난색을 표했다.
“자원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건 맞지만, 지금 내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 돕고자 자원한 것이라면 사양하겠네.”
“아닙니다.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헌부의 관리 단 한 사람만 북방에 자원하였다고 말입니다.”
“…….”
“조선의 관리로서 지극히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서는 사람이 없다면 소관이라도 마땅히 나서야지요. 어차피 오래 쉬었으니, 묘지기라도 절실한 참이었습니다.”
유극량은 노비 출신이라는 이유로 부하들에게도 무시를 당했다.
노비 출신이라는 점은 을룡도 마찬가지였으나, 유극량은 공신도 아니었고 왕의 최측근도 아니었으며 대신도 아니었고 문관도 아니었다.
이러한 연유로 상명하복이 지극히 중요한 군에서 유극량은 골칫덩이에 불과했다.
만호의 임기를 다한 지 삼 년이 지났거늘 어떠한 관직도 받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홍섬은 유극량이 관직이 급해서 자원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정으로 관직이 급했다면, 진즉 자원했을 테니까.
“원해서 자원한 것이니 아무 자리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 그동안 정원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자원한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 아닐세. 유중무, 고맙네.”
홍섬은 유극량의 손을 꼭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