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11화
72. 너는 왜 이순신이죠? (2)
“왕을 죽인 반역자가 곤룡포를 입고 어좌에 앉아 면전에서 질책하고 있거늘, 기껏 한다는 게 고작 말을 가리는 걸로 시위라니! 하!”
내가 하찮다는 듯 대소하자 이순신이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쾅!
“그날 밤, 육조거리에 있었다면 해야 할 일을 했을 겁니다!”
당연히 그랬겠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나를 향해 칼을 뽑았을 거다.
하지만 이순신은 현장에 없었고, 살아남았다. 지인들은 다행으로 여겼겠으나 이순신에게는 천추의 한으로 남았겠지.
죽지 못해 살아남아 남은 것이라도 챙기고자 조용히 사직한 것을 둘도 없을 구차한 행동으로 여겼을 거다.
면전에서 들리는 위안은 모두 조롱으로만 들렸겠지.
그래서 나는 이순신을 위안해 줄 생각이 없었다.
듣기에만 달콤한 모욕으로 회유해 봐야,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고 후회할 테니까.
차라리 밀어붙이고 밀어붙여 밑바닥까지 떨어뜨려, 일어선 후에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게 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나의 편으로 남지 않더라도 속은 편해지지 않겠는가?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이건 충신을 위한 배려다.
이미 죽은 자를 위해 몸 던지고 반역자에게 독설을 퍼부은 자들을, 구차한 삶을 살게 하는 대신 불멸의 충신으로 만들어준 것처럼!
“전하!”
맞은편 문이 요란하게 열리더니 상선 김기문을 필두로 내시들이 들어섰다.
“무슨 일이옵니까!”
그는 적대적인 시선으로 이순신을 내려 보았다. 그러더니 재빨리 나와 이순신 사이를 몸으로 막아섰다.
“괜찮다.”
“옥체를 보전하소서.”
“괜찮다 하지 않았느냐.”
안쪽의 소란을 들어서일까.
밖을 지키던 위사까지 쿵쾅쿵쾅 바닥을 울리며 집무실로 들이쳤다. 그러더니 내시들의 경계어린 시선이 이순신에게 향한 것을 보고는 환도를 뽑아 겨누었다.
나는 손을 들어 모두를 제지했다.
“그만!”
좌중의 위사와 내시들은 나의 반응이 당혹스러운지 주춤댔다.
“요란 떨 일이 아니다.”
엄중하게 말하니 김기문이 호소했다.
“전하, 이자는 감히 어전에서 언성을 높이고 무력으로 항의하였사옵니다.”
“그에게는 어전이 아니니 무방하다.”
“전하?!”
“내가 사람 하나 주체하지 못할 나약한 자로 보이느냐.”
“패려한 자이니 어떤 악독한 마음을 품고서 달려들지 모르옵니다!”
말이 오가는 와중에도 이순신은 단지 고개만 숙인 채 침묵하고 있었다.
지금도 고민 중이겠지. 차라리 지금에라도 몸을 날려 죽어야 하나.
하지만 그에게도 지켜야 할 가정이 있었다. 충성도 좋지만 죽은 왕을 위해 일가와 가문을 희생할 수는 없으리라.
그럴 수 있었다면 진즉 그랬을 터이니.
혼란 끝에 그가 충동적인 행동이라도 벌인다면 나만 손해였다.
“그만하라 하지 않았나.”
“부디.”
“지금 왕명을 거스르는 자는 저자가 아니라 그대들이다.”
“…….”
김기문은 입술을 말더니 천천히 물러났다. 그러나 아예 방을 나서지는 않았다. 그는 한쪽 구석에 서서 여전히 적대적인 시선으로 이순신을 노려보았다.
위사 하나는 만일을 대비하겠다는 듯 거친 손길로 이순신의 몸과 옷을 뒤졌다. 나오는 건 없었다.
사람은 잔뜩 늘어났으나 집무실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누구도 미동 없이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냉랭하다 못해 싸늘해진 가운데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지킬 사람이 없어져서 사직한다고? 왕촉의 일화에 깊은 감명이라도 받았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왕촉이 자결 직전 남긴 말이었다.
“역적을 모시는 충신은 충신인가, 역적인가?”
이순신은 답하지 않았다.
감히 왕인 나의 앞에서 언성을 높일 정도로 강골이니 주변 위사들이 겁나서는 아닐 거다.
단지, 입을 열어서는 나를 이기지 못함을 알아서겠지. 혹은 이마저도 유치한 시위의 일환이던가.
“내가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나 하지. 태조 대왕께서도 고려가 살아 있을 때는 역적이었다.”
그래, 파격 발언이다.
이성계의 후손으로서 왕위를 차지한 사람이 이성계가 역적이라고 인정했으니까.
대놓고 역적이었던 세조마저, 그를 조상으로 둔 후대의 왕들은 감히 노산군과 그에게 충성했던 이들을 좋게 평가할 수 없었다.
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정통성을 통째로 부정하게 될 테니까.
나라고 이성계를 부정하는 게 이로운 행동은 아니다.
단지 개인적인 자리기 때문에, 비교적 거침없는 성격에 힘입어 말하는 것이지.
물론 이건 고작 운을 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재미있는 건, 고려에 최후까지 충성했던 정몽주는 태조 대왕을 죽이려 했는데도 충신으로 남았고, 태조 대왕께 왕위를 떠다 바쳤던 정도전은 역적으로 남았다는 거지.”
“…….”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정몽주는 무수히 많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고려에 충성한 자이고, 정도전은 태조 대왕을 도와 망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세운 자인데.”
이순신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의 말을 애써 안 듣겠답시고 속으로 노래라도 부르는 건 아니겠지. 그건, 좀 너무할 정도로 유치한데.
살짝 걱정됐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이런 촌극이 벌어진 이유는 내가 잘 알지. 태조 대왕께서 고려를 멸망시킬 때는 정도전 같은 사람이 필요했지만, 조선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정몽주 같은 사람이 필요해서다.”
정도전은 공신과 유력자들이 깊게 반감을 가질 정책을 주장하고 추진했다.
기존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무너뜨린 추진력으로 개혁을 몰아붙이는 것이, 그에게는 자신이 그리는 이상사회를 실현할 최선의 방법이었으리라.
하지만 개국 직후인 조선은 공신과 유력자들의 지지가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걸핏하면 조선의 개국과 변화에 반감을 가진 자들이 들고일어났으니까.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리면 나라가 망하는 수가 있었다.
태조는 정도전이 나라의 대들보를 흔들어대도 친우이자 개국의 동지로서 존중했으나, 다음 왕인 태종은 나라가 안정되자 가차 없이 정도전을 숙청하고 역적으로 못 박았다.
반대로 정몽주는, 태종이 즉위한 해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후손들은 오늘날까지 조상의 덕을 보고 있었다.
“충과 반(反)은 환상이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의향대로 충신은 역적이 되고 역적은 충신으로 포장되었지.”
이순신이 물었다.
“유학에서 최고의 덕목으로 꼽히는 게 충인데, 유학자들의 나라인 조선의 왕이 되어 충과 반을 어지럽히십니까?”
“충과 반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야.”
“만일 충과 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학자는 무엇을 미덕으로 삼아야 합니까?”
“간단하지. 백성!”
나는 힘주어 대답했다.
“위정자들이 충의 실현을 위해 위만 바라보며 면상을 내 엉덩이에 파묻는다면, 나는 뒤를 닦는 수고도 덜고 이따금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백성들의 안위는 누가 챙기겠나?”
“…….”
“간언이 가치 있는 이유는 맹목적인 충성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여, 물론 나의 기준에서는 무의미하지만, 저들에겐 최고의 덕목인 충을 잠시 저버리는 행위기 때문이지.”
간언과 간관을 명분 삼아 까부는 자들도 더러 있지만.
“자네도 마찬가지야. 쌀이 익어서 밥이 되고도 사흘은 지났는데 언제까지 썩어 문드러진 폐주에게 연연할 생각이신가?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지만 청승맞게 굴다 뒈지는 게 인생의 지향점인가?”
나는 가당찮다는 듯 웃었다. 이순신은 여전히 말하지 않고 있었다. 생각보다 유치한 사람이었다. 이런 식의 시위라니.
“좋아. 정 어울려 주지 않겠다는데 내가 더 왈가왈부해서 무슨 소용이겠나. 마지막으로 하나만 당부함세. 그동안 떠드느라 고생 많았던 나를 위해서라도 말이야.”
“…….”
“과연 자네가 말했지. 무인은 많다고. 맞아. 무인들은 즐비하지. 개중에서 나에게 등을 돌린 사람들도 많아. 하지만 바쁜 내가 자네만 콕 집어 어전으로 불러, 이렇게 심력과 언어를 낭비하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친분이 있어서? 설마. 원칙주의자를 존중하기 때문에? 아니야. 깐깐하기만 한 인간은 자네 외에도 즐비하다고. 여전히 어렵나? 그럼 조금만 더 과거로 가보자고.”
나는 말을 이었다.
“내가 융통성이라곤 밥 말아 먹은 인간을 초면임에도 극진하게 존중한 이유가 무엇이겠나? 어째서 무과에 급제하도록 도와주었지? 앞으로 무인의 시대가 어떻게 변할지를 왜 알려주었을까? 잘 생각해 보라고.”
이순신도 나와의 인연이 평범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서 감명을 받았고 나의 앞에서는 딱딱한 성정을 조금이나마 굽히지 않았던가.
나아가 나의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인지하고 우려를 표했던 사람도 바로 이순신이었다.
하지만 나의 태도에 의문을 갖지는 않았겠지.
인연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지만 이제는 가져야 할 때였다.
“좋아. 이만 가게.”
내가 물러나라 손짓하자 내시와 위사들이 이순신에게 다가갔다.
이순신은 끌려서 나가지는 않겠다는 듯, 성큼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채로 집무실을 나갔다.
내시와 위사들이 뒤를 쫓았다.
주변이 단숨에 한산해지고 보는 눈도 없어지자 나는 어좌에 드러누웠다.
* * *
도성의 운종가 주막 어딘가.
과거철은 아니었으나 술 좋아하는 인간이 시기를 가리지는 않는다.
평상마다 사람이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술상을 끼고서 떠들어댔고 주막의 아낙은 바쁘게 상을 옮겨댔다.
그 가운데.
“나, 나으리.”
양인 사내 하나가 술상을 낀 선비 둘 앞에 불려나왔다.
빈자리 없나, 하고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것이 싸가지 없어서일까.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송구합니다요!”
사내가 사죄하자 주변 사람들이 곁눈질로 흘겼으나 금세 각자의 술상에 집중했다. 호기심은 동했으나 연관되기는 싫은가 보다.
날카로운 인상의 선비가 물었다.
“무엇이 송구하단 말인가?”
“그것이…… 쇤네가 인사도 드리지 않고 주변을 나다녀서.”
“하.”
선비는 가볍게 웃더니 맞은편 자리로 팔을 뻗었다.
“자리를 찾던데, 내가 공짜 술상을 대접할 테니 말벗이나 되어주게.”
혼나는 줄로 알았던 사내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양반 나으리들과 얽혀서 좋은 일은 없다는 격언이 양인들 사이에서는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었지만, 사내는 공짜 술을 마다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요?”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겠나.”
“그럼 감히 마다하지 않고 끼겠습니다요. 헤헤.”
사내가 자리하자 주막 아낙이 상을 가져다주었다.
국밥과 술로 가볍게 배를 채우니 선비가 말했다.
“나라에서 농기구와 쌀을 빌려주었는데, 자네는 탄 게 있나?”
“농기구를 빌렸습지요.”
“쓸만하던가?”
“아우, 예. 물론입죠. 튼실한 것이 역시 나라의 물건은 다르구나, 싶었습니다요.”
이전에는 나라에 필요한 물목을 각사에 배속된 장인들이 주어진 할당량만큼 알아서 냈다면, 이제는 철장 단지에 발주를 넣어 해결했다.
노동과 설비가 집약된 단지를 통해 종이 한 장 보냄으로써 질 좋고 통일된 형식의 물목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절차가 간소화되고 능률이 올라가자 각사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이산해가 철장 단지를 발안할 때의 회의적인 목소리도 쏙 들어간 지 오래다.
그리고 철장 단지의 혜택은 백성들에게도 돌아가고 있었다.
“농기구를 임대하려면 일정 크기의 경작지를 개간해야 한다던데.”
“예.”
“자네는 빌렸으니 개간을 해야겠군.”
“수확도 끝났겠다, 겨울 오기 전에 시작할 생각입니다요.”
“고생이 크겠군.”
“당장 고생은 크지 않습지요. 나라에서 개간에 필요한 농기구도 빌려주겠다, 오히려 개간은 땅을 뒤엎을 때보다 이후에 들어가는 고생과 시간이 훨씬 큽니다요!”
사내는 배도 채우고 술도 마셨겠다, 농사의 묘리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