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10화
72. 너는 왜 이순신이죠? (1)
“수천 기의 여진 기병들이 전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을지 아나?”
왕이 강조했다.
기병들은 전장에 존재하는 최대 전력이자 최대 변수다.
열세의 상황을 기병으로 극복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나아가 기병은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하고 승기에 못을 박는다.
만일 수천의 여진족 기병을 적으로 마주하게 된다면…….
“음.”
홍섬은 쓰게 침음했다.
“여진족들을 적이 아닌 아군으로 쓰려면 두 부족장은 반드시 회유해야 했어.”
“하오나 왜침의 사정을 모르는 제신들은 봉군을 과도한 처사라 믿을 것이옵니다.”
강성한 여진족 추장이 자발적으로 바친 토지와 부족민은, 왕에게는 치적이 되겠지만 나라에는 짐일 뿐이다.
늘어난 영토와 국경을 수비하고 말귀도 못 알아먹을 놈들을 위해 행정과 치안을 유지하는 데 들어갈 예산이 한두 푼이겠는가.
게다가 돈 들어갈 구석은 많은데 나올 구석은 없었다.
김자강과 율보리가 얼마나 어렵게 결단을 내렸건, 신하들 입장에서는 불청객이 과분한 대접을 받는 게 전부다.
“타고난 기병 수천 기를 거저 얻을 수는 없네. 그래서 경이 신하들 대표로 고생하지 않았나.”
“…….”
“공연은 광대만의 전유물이 아니지. 경이 나와 뒤에서는 어떤 친목을 다지건, 앞에서 그대가 나에게 굴복하고 마음을 달리 먹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신하들의 반발도 무마될 걸세.”
“정당한 불만은 가볍게 종식될 수 없사옵니다. 봉군에 대한 반발은 무마될 수 있겠으나, 대신 제신들은 신에게 따지고 들 것이옵니다.”
“나를 적으로 두는 것보다야 이따위 장난질에 놀아날 정도로 멍청한 놈들을 적으로 두는 게 편하지 않나?”
홍섬은 부정할 수 없었다.
철부지 같은 녀석들은 시끄럽고 귀찮을 뿐이지만, 왕을 척진다면 고작 시끄럽거나 귀찮은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의금부에 갇힐 때만 해도 죽는 줄 알았으니까.
토사구팽의 파멸이 면제되자 얼마나 안도했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다. 인생의 황혼이 되어 살아 있다는 느낌을 잊은 지 오래임에도 말이다.
“앞으로 이런 일을 꾸미신다면 부디 신에게도 알려주시옵소서. 진정으로 죽는 줄 알았사옵니다.”
“나도 경을 배려해 주고 싶지만, 경이 얼마나 연기에 능한지는 몰라서 말이네.”
“…….”
“그렇다고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나의 의중을 읽겠답시고 잔대가리 굴리지 말게. 경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수위를 높일 수도 있으니까!”
왕은 유쾌하게 말했지만 홍섬은 전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삐지지는 말게. 내가 굳이 자리를 마련하여 경을 위안하고 사정을 설명한 이유도, 진정으로 경을 믿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홍섬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왕이 친절하지 않아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의금부에서 성히 나오더라도 두고두고 토사구팽을 걱정했겠지.
죽는 순간까지.
늘그막의 나이로 근심, 걱정 많은 홍섬으로서는 지극히 다행이었다.
“망극할 뿐이옵니다.”
“내일 제신들이 찡찡댈 텐데, 내가 들어주는 척 경을 방면할 터이니 최대한 반성하는 척하게.”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경이 고생이 많았으니 이걸 선물로 주지.”
왕은 두툼한 천 주머니 몇 개를 꺼냈다.
홍섬은 일단은 받아들었으나 천 너머로 보이는 새카만 가루들의 정체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왕은 화약이 타는 빛으로 왜구를 정화하겠다고 했으니까. 혹시 자신도 화약으로 정화하려는 건 아닐까.
홍섬은 아닌 밤중에 폭사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무엇이옵니까?”
“경이 방금 해치운 음식들처럼 나의 위대함이 깃든 발명품일세. 흔들기만 하면 따뜻해지는 마법의 자루지.”
터무니없는 소리에 홍섬은 눈살을 찌푸렸다.
“흔들기만 하면 따뜻해진다니,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사옵니다.”
그게 가능하면 엄동설한에 얼어 죽는 사람이 왜 생긴단 말인가? 또 누가 땔감을 구해서 집을 데우려 하겠는가.
‘흔들면 따뜻해지는 마법의 자루’나 흔들어대고 있지.
홍섬은 왕이 개인적인 자리를 틈타 자신의 나사 빠진 광기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건가, 싶었으나 왕은 단순히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대단하고 미친 사람이지.
발음이 유사한, 대단하게 미친 사람이라는 표현과는 혼동을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양쪽 다일지도 모르겠지만…….
“음.”
홍섬은 시험 삼아 주머니 하나를 흔들었다. 사각사각, 하는 모래 소리가 나더니 신기하게도 정말 주머니가 따뜻해지는 게 아닌가.
“헉!”
홍섬은 악마적 의식이라도 마주한 사람처럼 기겁하며 주머니를 떨어뜨렸다.
“이봐.”
“소, 송구하옵니다. 놀란 나머지 그만.”
왕의 지적에 홍섬은 다급히 다리 사이로 떨어진 주머니를 챙겼다. 환각이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주머니는 여전히 따뜻했다.
“도대체 무슨 조화이옵니까?”
“설명하더라도 경은 이해하지 못할 걸세. 내가 잘났다고 유세 부리는 게 아니라, 정말이야.”
철 성분이 촉매로 반응이 촉진되어 급격히 산화하면서 열을 내는 원리이지만, 홍섬에게는 주술 읊는 소리와 하등 다르지 않으리라.
“한 번 쓰고 나면 다시 쓰지 못하는 것이니 삥땅쳐서 두고두고 써먹겠다는 얄팍한 생각은 하지 말고 옥에서 나오면 곱게 반납하게.”
“예…….”
“좋아. 경도 이만하면 나의 진심을 느꼈겠지. 이만 의금부로 돌아가 마법의 자루에서 나오는 나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편히 잠들게. 병판!”
왕의 부름에 을룡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홍섬은 마법의 자루를 챙겨 왕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을룡의 안내를 받아 터덜터덜 의금부로 향했다.
과연 마법의 자루 덕으로 홍섬은 춥지 않게 의금부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대낯이 되어 좁은 창에서 환한 빛이 얼굴을 밝히자, 홍섬은 멍한 상태로 일어났다.
그리고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는 혼란스러워했다.
금상은 홍섬이 경험한 어떤 왕과도 다른 사람이었으나, 어젯밤 경험한 금상은 단지 다르다는 표현만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에게 떠들어봐야 오히려 이쪽이 미친놈 취급을 당하리라.
빠르게 희미해지는 기억을 회고하려니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했나, 싶었으나 품 안의 ‘흔들면 따뜻해지는 마법의 자루’는 어젯밤 일이 개꿈 따위가 아님을 증명했다.
아침이 되자 홍섬은 과연 의금부에서 방면되어 어전으로 나올 수 있었다.
왕은 딱딱했으며 단호했고 이따금 친근하거나 가벼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어젯밤처럼 경박스럽다 못해 미쳐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회의가 파하자 홍섬은 마법의 자루들을 신속하게 넘긴 뒤 어젯밤 일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 *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육지의 이순신과 바다의 이순신이라니 진짜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이다. 그런데 둘 다 이순신이라니, 한 사람이 순과 신으로 나뉘어서 싸우는 거냐? 자아분열해서 싸우는 이순신은 진짜 레전드다…….
‘너무 긴장해서 멍청한 생각을 다 하는군.’
나는 함경도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내다, 임기가 다하기 직전 도성으로 돌아오라는 교지를 받았다.
그때 교지를 받들어 나에게 왕명을 전한 자가 이순신이었다.
그는 나와 함께 도성으로 귀환했고 다시 만날 것을 약조하고 헤어졌다.
이후 내가 선조를 죽이고 조정을 장악하자 이순신은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다.
남긴 것이라고는 무인으로서 지킬 사람이 없어져 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다분히 절제된 사직소 한 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내가 잃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이순신이 없다고 임진왜란을 막아내지 못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임진왜란에서 최대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둬야 했다. 전장에서 효율이란 승패를 가르기도 하지만, 무수히 많은 목숨의 생사를 가르기도 한다.
수많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금시대 조선에서 가장 유능한 장수이자 전략가인 이순신을 반드시 기용해야 했다.
다만.
‘최후까지 충성했던 이순신이 반역자인 나를 용서할 수 있느냐는 거다.’
이미 이순신은 나의 변화에 우려를 표한 전력이 있다.
육조거리의 여느 관리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
나는 ‘여느 관리들’이라는 기준에서 훌쩍 나아가 선조를 죽이고 목을 베었으며 왕위에도 올랐다.
철저한 원칙주의자인 이순신에게 나라는 존재는 어떤 감투를 쓰더라도 신하로서 왕을 죽인 반역자일 뿐이다.
나라고 그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지는 않는다. 단지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아득히 낮은 가능성이라도 시도할 뿐이다.
어차피 밑질 것도 없잖은가?
천하의 이순신이 내 편이 아니라며 못을 박는다면 아쉽기는 하겠지만.
“전하.”
밖에서 상선 내시 김기문이 불렀다.
“무슨 일인가.”
“이순신 입시이옵니다.”
“들라 하라.”
정문이 좌우로 열리며 이제는 어색한 사람이 입장한다.
우습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편전의 집무실을 찾던 이순신은 나였는데. 그 이순신은 왕이 되어 저 이순신을 편전의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구나.
“…….”
이순신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다. 하지만 자신을 신(臣)으로 소개하거나 나를 전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항의인가.”
“어찌하여 부르셨사옵니까.”
“일단 하나만 확실하게 하고 가지.”
나는 서안을 손끝으로 쿡쿡 찌르며 강조했다. 이순신은 반응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만 숙인 채 미동도 없을 뿐.
시위가 따로 없었다.
“그대가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면 적어도 사적인 자리에서 전하라 부르지 않아도 좋네. 아니면 금천부원군이라고 하던가!”
이순신의 눈동자에 의외라는 놀라움이 깃든다.
아주 돌덩어리는 아니었군.
“그보다 그대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게 있네! 내가 할 짓이 없어서 나 싫다고 낙향한 사람을 굳이 편전으로 부른 줄로 아나?”
“…….”
“오래전에 경고했지. 앞으로의 전쟁에서 창칼은 중요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대비하라고 말이야.”
이순신이 물었다.
“전쟁이 난다는 말씀이십니까.”
눈에 빛이 난다.
무인에게 전쟁만큼 관심 가는 주제는 없다. 의무감, 출세의 계기, 이유가 무엇이건. 결국 이순신도 무인은 무인이었다.
하지만 원칙주의자이기도 하다.
“전쟁을 방비하기 위함이시라면 유능한 무인은 많습니다.”
“맞는 말이야.”
나는 기꺼이 수긍했다.
“자네의 무예는 처참한 수준이지. 갑과 급제자라곤 하나, 솔직한 말로는 내가 자네보다야 더 잘 싸울걸.”
자만이 아니다.
세 번의 전투에서 나는 목숨을 걸었으나 죽지는 않았다. 살아남음으로써 내가 증명한 건 단순히 운만 좋다는 것이 아니었고, 매번 전장에 들어설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왔다.
“하지만 자네는 어떻지? 한평생 칼을 휘둘렀지만 정작 그 칼로 무언가를 죽여본 적은 있나? 왕을 죽인 반역자가 곤룡포를 입고 어좌에 앉아 면전에서 질책하고 있거늘, 기껏 한다는 게 고작 말을 가리는 걸로 시위라니! 하!”
내가 하찮다는 듯 대소하자 이순신이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쾅!
“그날 밤, 육조거리에 있었다면 해야 할 일을 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