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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209화 (20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209화

71.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3)

“영의정을 금부에 하옥하라.”

“저, 전하…….”

홍섬이 참담한 표정을 지었으나 저항은 없었다. 위사가 다가가자 알아서 가겠다는 듯 일어나 발을 돌렸다.

그렇게 의정 대신이 주춤주춤 위사들과 함께 빠져나가자 어전은 단숨에 냉각됐다.

“회령군과 해란군의 봉군에 감히 불만을 가질 자는 없으리라 믿는다. 두 사람은 이만 물러나서 쉬도록 하라.”

“예, 전하.”

두 사람은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신하들은 침묵했다.

홍섬은 과연 어떻게 될까. 왕의 눈에 났으니 몹쓸 꼴이라도 당하는 건 아닐까?

몇몇 신하들은 노신을 박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왕의 화를 살까 참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홍섬의 안위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왕의 변화였다.

혹시, 새로운 지지기반을 확보하고자 오늘을 기점으로 기존의 대신들을 하나하나 숙청하는 건 아닐까.

치세도 안정권에 들었겠다, 크고 작은 약점이 잡힌 대신들은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날 대신들의 치부를 모은 이유는 오늘을 위해서였나.

대신들은 금상의 설계에 부르르 떨었다.

* * *

당일 밤.

겨울이 다 되어 날은 으스스한데 의금부 감옥에서는 죄인들이랍시고 불도 거의 안 때고 있었다.

홍섬은 일인지하 만인지상 영의정에서 왕을 능멸한 죄인이 되어, 몸을 웅크린 채 스며드는 추위를 막고 있었다.

“X발, 내가 얼마나 충성했는데.”

홍섬은 체통도 없이 욕지거리까지 흘리며 한탄했다.

왕이 예견한 왜란은 중차대한 사건이긴 했지만, 당시 홍섬도 지적한 대로 무조건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었고 이를 막겠답시고 왕을 죽이겠다는 건 합리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홍섬은 1할의 가능성이라도 믿고서 종묘사직을 위해 금상과 결탁하고 폐주를 죽이는 데 동참했다.

국문장이 준비되었다는 명분으로 폐주를 궐에서 처형장이 될 야밤의 육조거리로 끌어낸 것이다.

만일 자신이 금상을 돕지 않고 고발을 하였다면, 과연 금상이 왕이 될 수 있었을까?

금상은 보통 비상한 인간이 아니었으니 반역이 쉽게 좌절되지는 않았겠으나, 자신 덕분에 편하게 찬탈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적어도 홍섬이 보기에는 말이다.

“X발 새끼, 흑흑…….”

홍섬이 서럽게 중얼대자 안쪽 어딘가에서 욕지거리가 울었다.

“누구야?! 야밤에 잠도 못 자게 징징대는 인간이!”

“뭐! 내가 누군지 알고서 감히 망언을 지껄이느냐!”

“네가 누군지 내가 알 바냐, 똑같이 의금부에 갇힌 처지에?! 그만 징징대고 잠이나 쳐 자! 재령에서 뒤지게 패줄 테니까 거기서나 실컷 징징대라고!”

“이, 이, 이, 고연……!”

홍섬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노기에 떨었으나, 감옥에 갇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홍섬은 날도 늦었겠다, 주변의 지푸라기를 주섬주섬 주워 몸을 덮었다.

은혜를 뒤통수로 갚은 야비한 주상을 저주하면서…….

“이봐.”

그때 누군가 홍섬을 불렀다.

코앞에서 나는 소리라 처음에는 나졸 나부랭이도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가 싶었으나,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쾌할 정도로 익숙한 목소리였다.

홍섬은 자는 척했다…….

“안 자는 거 다 안다.”

홍섬은 입술을 깨물고는 이제 일어난 척 눈을 비비며 되지도 않는 연기를 하면서, 어기적거리며 불청객에게 인사했다.

“전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어인 일로 오셨사옵니까.”

“하하하.”

왕은 재수 없게 웃더니 말을 잇는다.

“경은 지금 내가 그대를 누추한 의금부 감옥에 가두었다고 투정이라도 부리는 건가?”

“그럴 리 있겠사옵니까.”

“단단히 삐졌군.”

“아니옵니다.”

“일단 나오게. 바람이나 좀 쐬자고.”

절그럭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감옥의 문이 열렸다.

홍섬은 이게 무슨 병을 주고 약을 주는 지랄인가 싶었으나, 한시라도 냉골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망극한 일이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서 주섬주섬 일어나 지푸라기를 털었다.

“따라오게.”

“예.”

밖을 나오니 익숙한 사람이 홍섬을 맞아주었다.

“병판.”

최근 병조참판에서 판서로 어물쩍 지위가 올라간 이을룡이었다.

처음 그가 참판에 제수되었을 때만 해도 중신들은 을룡의 출신보다는 능력을 의심했다.

한평생 공부만 한 자신들도 어려운 나랏일을 과연 노비 출신으로서 배운 게 하나도 없을 을룡이 맡아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지극히 합당한 지적이자 우려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을룡은 조금 맛이 간 주인보다 훨씬 교양 있었으며 학식도 있었다.

노비로서 주어진 것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학문을 성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홍섬은 적어도 을룡을 무시하는 축은 아니었다.

“전하께서는 진즉 대감을 찾아뵙고자 하셨습니다만 날이 충분히 늦기 전에는 오해의 소지를 만들 수 있어 소관이 극구 만류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 아닐세.”

홍섬은 을룡의 주인을 향한 여전한 충심에 감탄하고는 손을 내저었다.

“따라오시지요.”

일행은 의금부를 나와 북촌으로 향했다.

주변에는 언제 붙었는지 모를 사내들이 무장까지 하고 있어, 홍섬은 혹시 으슥한 곳에서 자신을 쓱싹해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금방 자신이 가는 길이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머지않아 도착한 곳은 관광방의 흰 벽돌담 집이었다. 왕이 과거 머물렀던 사가였다.

본래 왕이 민간에서 살던 시절의 거처는 궁으로 승격하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마련인데…….

을룡이 대문을 가볍게 두드리니 안에서 사람이 나와 맞았다.

누가 본다면 왕의 잠저가 아니라 반가의 평범한 거처로 알리라. 그만큼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일행은 뜰로 들어섰고 홍섬도 금세 익숙해졌다.

“전하, 도대체 어떻게.”

“향수병이라 치게.”

“흔히 나오십니까?”

“잊을만 하면 찾는 정도지.”

“내시들이 만류하지 않았사옵니까?”

“만류는 하더군.”

그럼에도 나왔다는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왕이었다.

홍섬은 역시 금상이 보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비껴간 느낌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이 풍기는 분위기가 이러할까.

“듣는 사람도 없으니 솔직하게 말하겠네. 영의정은 내가 기대한 대로 정확하게 움직여 주었어!”

“신을 조종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어디서 굴러먹다 기어왔는지 모를 오랑캐 추장들이 문명대국의 고관인 자신들도 못 가진 군호를 가진다는데, 불만이 어떻게 없을 수 있나.”

홍섬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으나, 반사적으로 툭 튀어나온 입은 그가 단단히 삐졌다는 걸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왕은 그런 홍섬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영의정. 삐지지 말게. 그대는 나에게 놀아난 것이 아니라, 충성을 이행한 걸세.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된다고.”

“전하께 놀아난 것이 어떻게 충성이 되고 자랑스러운 일이 되겠사옵니까?”

“경이 고생하는 모습을 모두가 보았으니 적어도 중신들은 회령군과 해란군의 봉작에 별말 하지 않을 걸세.”

왕이 의도한 바대로 움직여서 한 몸 희생했으니 충성 아니겠는가.

홍섬은 놀아났다는 기분이 가시지 않았고 입술은 여전히 툭 튀어나와 있었다.

“만일 내가 영의정을 진심으로 싫어했다면 어떻게 이런 자리를 마련했겠나?”

왕이 박수를 딱딱, 치자 저택의 사람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휘황찬란한 주안상을 꺼내 왔다.

홍섬으로서는 본 적 없는 진귀한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알음알음 들어본 적이 있는 것들이었다.

가수저라.

전 영의정 권철은 마치 구름을 먹는 기분이라 묘사했다.

노란 사각형의 형상에 위아래가 갈색이었다니 지금 눈앞에 있는 음식이 무엇인지는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우유를 곁들이면 대국의 황제조차 부럽지 않다던가.

중앙에는 갈색의 길쭉한 덩어리가 기름을 흘리며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왕이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낼 시절 그의 밑에서 경성판관을 지낸 이준은 이후 다른 고기는 먹지도 못하게 됐다며 한탄했다.

꿀꺽.

홍섬은 그들의 이야기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은근히 욕심이 났지만, 왕에게 먹는 것으로 비굴해지 싫어 내색한 적이 없었다.

또 남들은 못 먹어보았으니 과장인지 사실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잊었다.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까지 차려준다면…….

“신은 전하께서 언제나 하해와 같은 은혜로 신하들을 어루만지고 보살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사옵니다.”

삐져서 입술을 쭉 빼놓을 때는 언제고 순식간에 태세변환하는 홍섬이었다.

“하지만 X발 새끼시고?”

들었나!

홍섬은 눈앞의 진수성찬이 이제 최후의 만찬으로 보였다. 바짝 긴장하고 있으니, 왕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영의정이 실망할 수도 있지. 단지 구설수가 나오지 않게 조심하라고. 경이 나를 욕보였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

“며, 명심하겠사옵니다!”

“들게. 순대와 맥주로 배를 채우고 가수저라와 우유로 마무리하는 걸 추천하지.”

“예!”

홍섬은 소시지를 조심스럽게 맛보더니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리고 맥주로 목을 축이니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천지에 어떻게 이런 술과 음식이……!”

“마음에 드나?”

“전하께서는 혹시 신선이시옵니까?”

황혼의 연배에 늦은 시각까지 잠을 못 자서인지 헛소리를 하는 홍섬이었다.

“그럴 리가.”

“실로 천상에나 어울리는 호사이옵니다!”

“마음껏 들게.”

맥주로 마지막 순대를 해치운 홍섬인 기대되는 마음으로 가수저라와 우유를 들었다.

구름을 먹는 기분이며, 이 순간만큼은 대명 황제도 부럽지 않다던 권철의 말에는 한 치의 과장도 없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든가?

오래전부터 왕과 함께한 권철은 확실하게 때깔 좋은 귀신이 되었으리라.

홍섬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떤가.”

“어찌하여 선인들께서 입의 호사를 멀리하셨는지 알겠사옵니다.”

비어버린 접시를 마주하고는 현자타임이 온 걸까.

“다 먹고 나서 선인의 말을 회고해서는 소용이 없네.”

“…….”

“경이 나 때문에 고생하긴 했지만, 사적으로 불러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내가 경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주었으면 해서이네.”

“망극할 뿐이옵니다.”

딱 얼어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난방하는 의금부 감옥에서 지푸라기를 덮고 있다가, 주변에 좌등을 세워 따스하게 한 자리에서 입으로 극진한 호사를 누린 참이었다.

왕의 은혜가 없냐, 있냐에 따라 짠맛과 단맛의 극을 본 홍섬이다. 어느 쪽이 자신의 안녕에 도움 되는지는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선언처럼 강조하며 이어가는 연설이 있네.”

홍섬은 경전이나 사서에 그런 구절이 있던가, 고민했으나 기억나지 않았다.

“신이 미욱하여 모르겠나이다.”

“경이 모른다고 흠결이 되는 부류의 연설이 아닐세.”

오히려 알면 신기한 축에 속하는 연설이지.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이니까.

“그는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 없으며, 오직 빛만이 가능하다 하였네.”

“현명한 말이옵니다.”

“맞는 말일세. 그런 차원에서, 나도 꿈이 있지.”

왕이 운을 떼자 홍섬이 물었다.

“무엇이옵니까?”

“조선 땅을 밟으려는 왜구들을 총구 화염과 신기전 추진체의 빛으로 정화하는 걸세.”

“……어둠은 어둠이 아니라 빛만이 몰아낼 수 있다는 구절이 그런 의도로 인용될 수 있는 것이옵니까?”

“적어도 왜구들이 빛은 아니잖나.”

“그렇긴 하옵니다만…….”

홍섬은 길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금상은 신하였던 시절 폐주로 인한 부담감이 컸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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