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08화
71.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2)
김자강과 율보리는 어째서 자신들을 고향으로 보내주지 않는가 항의하러 왔다.
주로 입을 연 쪽은 김자강이었다. 나와의 두터운 연을 믿기 때문이겠지. 혹은 조심성이 부족하거나.
그가 물었다.
“전하께서는 저와 율보리를 높게 사서 곁에 두고 싶다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북방을 지배하고자 신들을 도성에 묶어두는 게 아닙니까?”
“아니라고는 못하겠군.”
순순히 인정하자 김자강은 더 말하지 못한다. 내가 고집이라도 피울 줄 알았단 말인가.
“하하.”
나는 웃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자강과 율보리는 당혹한 투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고작 그런 근시안적인 이유로 자네들을 붙잡아두는 거라 생각했나.”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이유 중 한 가지는 될 수 있겠지. 단지 주된 이유가 아닐 뿐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내가 그대들의 귀환을 막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김자강과 율보리의 부족이 군소했다면 나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신하들도 마찬가지였겠지.
하지만 아니잖은가.
두 사람의 부족은 강대했다. 방대한 영역에 수많은 부족민을 거느렸다. 이제 각 부족의 주인인 김자강과 율보리가 제 발로 도성을 찾아왔다.
“신하들이 그대들의 귀환을 막겠지. 자네들은, 지금처럼 어떻게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테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신은 개의치 않습니다.”
“신경 써야 할 걸세. 한동안 후방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고 태만해진 건가?”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왕이지 않습니까.”
“대국을 지배하는 원리는 그만큼 간단하지 않지.”
나에게 힘이 없지는 않지만, 굳이 나의 손을 떠나겠다는 두 사람을 비호할 가치는 없었다.
신하들이 나라의 미래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후환을 제거하자는데 왕이 사적인 친분으로 대사를 그르쳐서야 되겠는가.
“자네들은 내가 내 사정만 생각한다고 믿지. 하지만 자네들이라고 다르지는 않네.”
“신들은 전하께서 하명하신 대로 조선의 관복도 입었습니다. 몸에 익지 않아 불편하거늘 신이 불평 한 마디 한 적 있습니까?”
“관복을 입힌 이유는 내가 그대들을 구경거리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리들에에 친숙하게 보이기 위해서였네.”
“신들이 원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김자강 그대는 조선의 개국자가 누구인지 아나?”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렇다면 동북면에서 개국 이전의 태조 대왕을 보필한 자들이 누구인지, 각기 다른 아버지를 모시면서 호형호제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잘 알겠군.”
이성계의 집안은 다루가치, 쌍성총관의 사위, 삭방도만호를 지내며 동북면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했다.
해당 지역은 주인이 고려에서 원으로, 원에서 고려로 다시 바뀌었으나 실질적인 거주자들은 여진족들이었다.
그래서 이성계 집안은 여진족들과 빚은 마찰도 많았으나 동시에 여진족과의 협력도 두터웠다.
수많은 족장과 부족이 이성계를 따랐고 의형제이자 수족으로서 충성했던 이지란도 여진족 천호였다.
“태조 대왕께서 청해군(青海君, 이지란의 군호) 생각하듯 그대들을 생각하여 곁에 두고 대업을 이끌 양팔로 생각하는데, 그대들은 기어코 떠나 나를 실망케 하려는가?”
“…….”
“어차피 도성을 떠나더라도 그대들과 그대 부족이 영원불멸의 자유를 누리지는 못할 거다. 내가 그대들이 아닌 그대들의 후사를 걱정하듯이, 그대들은 내보다도 나의 후사는 걱정하지 않는가?”
조선은 전통적으로 변방에 강력한 부족이 생기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했다.
그럴 일도 없지만 나 한 사람이 김자강과 율보리에게 특혜를 주더라도 나의 후손은 그러지 않을 터였다.
또 그러지 않아야 하고!
“내가 이렇게까지 아쉬워하고 걱정하는데도 그대들이 이 나라 대신으로서 천하를 주유하는 대신 고작 한 줌 흙과 풀을 그리워해 돌아가겠다면, 돌아가라!”
나는 손을 내저었다. 미련 따위는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고향에서의 단잠이 끝난 다음에는 나의 후의를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대들이 나를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함께 달릴 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라고 그대들을 배려할 필요는 없겠지!”
호소이자 겁박이었다.
아쉬워하고 걱정한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내가 왕이 되는데 직간접적으로 공헌한 바가 있었다.
직접 나서지는 않았으나 수하를 보내 무력에 보태게 했고, 나의 자산을 손대지 않고 직접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물론 나를 배신했다간 미래가 아니라 당장 전쟁이 벌어진다는 걸 알아서겠지만, 놈들이 배신을 작정했다면 막대한 양의 자산부터 가로채고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이라고 나를 경계만 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김자강과 율보리는 서로 눈치를 보더니 한참이나 침묵했다. 그러더니 한참이 지나 김자강이 회한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전하께서 진정으로 신을 청해백이나 수족처럼 생각하신다면, 어찌 믿고 놓아주지 않으십니까?”
“나라고 그대들이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북방을 내달리고 싶은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인간 이순신은 그대들의 의향을 존중하고 인정한다. 하지만 조선의 왕 이순신은 그렇지 못할 뿐이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시끄럽게 오가던 대화의 분위기도 잦아들었다.
한참이 지나 율보리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이 전하를 따르게 된 이유는 옥에 갇혀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되어 당장의 목숨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안다.”
율보리는 자신의 목숨보다는 부족을 구원하고자 나에게 굴복했다.
만족했을지는 의문이지만 이 시점에서 율보리의 해란강 부족은 예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일대 북방을 김자강과 양분하고 있었으니까.
“신이 자의로 전하를 따르게 된 것은 아니나, 단 한 번도 그때의 결정을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나를 따르는 게 후회할 결정이 아님을, 내가 다시 증명할 기회를 주라.”
“전하께 귀부하겠습니다.”
율보리는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김자강이었다. 그는 율보리보다 먼저 나와 협력했으며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당시의 충성과 지금의 충성은 무게가 다르다. 동등한 자에게 표하는 존중이 아니라 명백히 상하관계에 놓인 위치에서 수하로서 주인에게 맹세하는 충성이다.
부족의 땅과 백성들을 바치면 족장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쉬운 결단이 아니었다.
김자강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이 자리에서 해주신 말씀을, 신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토사구팽한다면 원망할 것이고 은혜를 거두지 않는다면 죽는 날까지 감사하겠다는 뜻이리라.
“나도 마찬가지일세.”
“전하께 귀부겠습니다.”
김자강도 깊게 허리를 숙였다.
* * *
“전하께오서 두 사람을 총애한다는 것은 아오나, 사심으로 나랏일을 결정해서는 안 되옵니다.”
홍섬이 간했다.
나는 김자강과 율보리를 제신 앞으로 불러 각기 회령군과 해란군으로 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홍섬이 보여주듯 신하들은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귀인지 모를 여진족 오랑캐 나부랭이들이 저들도 못 받은 군호를 받는다고 불만을 토했다.
“영의정은 두 사람이 어째서 군호를 받는지 아는가?”
“전하께서 즉위하시기 전부터 충성하였고, 나아가 폐주를 주살하는 데 공을 세웠기 때문이옵니다.”
다분히 감정적인 발언이었다.
왕으로 즉위하기 전부터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거느렸다는 게 무슨 뜻인가. 반역자라는 소리였다.
또한 폐주를 주살하는 데 공을 세웠다 함은, 본인도 폐주를 죽였는데 왜 코빼기도 안 비친 오랑캐들이 칼자루 몇 개 빌려줬다고 봉군까지 되냐는 항변에 가까웠다.
늘그막에 해내고 싶은 게 많은 건 알겠지만 오냐오냐 했더니 버릇이 나빠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야말로 제 발을 스스로 거는 짓이었다.
“경도 내가 즉위하기 전부터 충성했고, 폐주를 주살하는데 공을 세우지 않았나?”
결국 홍섬도 반역자에게 충성한 자였고 폐주를 죽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선조를 죽인 일로는 홍섬이 나를 상대로 약점을 잡을 자격도 명분도 없었다.
“내가 폐주를 죽인 일로는 누구도 공신이나 군으로 삼은 적이 없거늘, 그대는 이 나라의 영의정이 되어서 고작 한다는 것이 질투인가?”
“질투가 아니옵니다. 저들은 여진족이 아니옵니까? 막대한 은을 가져와 바쳤다고는 하나 그것은 전하의 재산이었지 저들의 재산도 아니었잖사옵니까.”
“그래서?”
내가 어쩌겠냐는 듯 따져 묻자, 홍섬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아서인지 삐질거리며 답했다.
“단지 짐을 옮겼다는 이유로 외부의 사람을 가벼이 아조의 군으로 삼는다면, 누가 군호를 가진 이들에게 존중과 존경을 표하겠사옵니까?”
“그들은 짐꾼이 아니라 이 나라에 수백 리 강토와 수천의 백성을 이끌고 귀부하였기에 마땅히 군으로 삼아 충성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는데, 감히 의정대신이라는 자가 조선의 문화에 귀부한 자들을 한낱 오랑캐와 짐꾼으로 폄하하며 왕을 능멸하는가?”
“…….”
홍섬은 입을 반쯤 연 채로 침묵했다.
좌우에 시립한 신하들은 사실이냐는 듯 중앙에 시립한 김자강과 율보리를 바라보았으나, 두 사람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가 이 나라의 신하와 사대부들을 아껴 갖은 배려를 다 해주었거늘 영의정이라는 놈이 생각이 짧아 주인을 업신여기는구나!”
-쾅!
어좌의 팔걸이가 울었다.
신하들은 놀라 움찔거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졸지에 제신들의 대표로 항의하던 홍섬은 죽일 놈으로 찍히자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시, 신이 사정을 몰라 함부로 입을 놀렸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사정을 몰랐어? 뭐! 내가 일국의 군주로 대업을 이행하겠다는데 신하에게 일일이 해명하고 인가를 받아야 하나!”
“아, 아니옵니다!”
“함부로 입을 놀린 죄를 알면서도 끝까지 왕을 우롱하는 걸 보니 영의정도 갈 때가 다 되었군! 바깥에 위사들 있느냐!”
내가 신하들 너머로 외치자 궐 밖에 시립해 있던 위사들이 들어왔다.
“부르셨사옵니까.”
이에 좌의정 노수신이 함께 무릎을 꿇고 청한다.
“전하. 영의정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전하께서 즉위하시기 전부터 충성한 자인데 어찌 불충한 마음을 품고서 성총을 어지럽혔겠사옵니까. 단지 의정대신으로서 나랏일에 관심을 가진 발로로 결례를 끼친 것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노수신이 부복하고 청하자 좌우의 다른 신하들도 함께 부복하며 외쳤다.
최근의 일로 신하들은 자신의 잘못을 자기 손으로 직접 써서 왕에게 바쳤다.
약조한 대로 처벌은 없었으나 수많은 신하가 약점이 잡혔다. 비리와 부패로 얼룩진 사건들을 저질렀노라 인정했고, 크게 자비를 입어 용서받았으니까.
이런 마당에 어떻게 큰소리친단 말인가.
끝난 일이랍시고 안면몰수했다간 세간에 과거의 잘못이 ‘우연히’ 알려져 때려죽이자는 여론이 만들어지는 수가 있었다.
본인과 일가의 명예는 추락하고 자백으로 기껏 보전한 자리에서는 제 발로 내려와야겠지.
그러고 싶지 않다면 홍섬이건 홍섬 할애비건 설설 기어야 했다.
“설령 의정대신으로서 나랏일에 마땅히 가져야 할 관심을 가진 발로라도, 감히 왕의 판단을 의심하고 귀부하여 공을 세운 군(君)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으며, 당장을 면피하고자 죄를 인정하면서도 같은 죄를 저질러 왕을 능멸하였으니 가벼이 용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