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07화
71.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
과거 백성들은 등허리가 휘도록 세금을 내는데 이상하게도 나라는 갈수록 가난해져 배와 등이 운명의 만남을 가질 정도였다.
이 엄청난 간극이 어디로 갔겠는가?
나는 간극의 향방이 어디로 갔는지 잘 알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한경록에게 줄을 대었던 방납업자 열일곱 놈에게, 비공식적으로는 최근 증가한 실종 사건 수백 건의 주인공들에게다.
을룡을 통해 사악한 반혁명분자들을 조용히 손봤지.
방납으로 뜯어먹을 구석이 없어졌다고 하루아침에 회개하고서 착하게 놈들이 아니었으니까.
“세율을 조금만 높게 조정했어도 되었을 듯하옵니다.”
이산해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호조의 장관으로서 이제는 돈 생각밖에 못 하게 된 이산해는 최근 별명을 하나 얻었다.
미철재상(米鐵宰相).
국고를 투입해 철장 단지와 광산을 개발한 그는 쌀에서 철을 연성했다고 쌀 미에 쇠 철을 붙여 미철재상이 되었다.
어감이 이상했지만 그것대로도 재미있는지 세간에서는 이산해를 흔히 미철재상이라 불렀다.
“내가 수미법과 영정법을 시행한 이유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백성들을 방납의 폐단에서 구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당장 세율을 올린다면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겠는가.”
100을 잘해주고도 10을 못해주면 100을 잊는 것이 사람 본성이었다.
어차피 세입은 폭증했으니 증세를 닦달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보다 확실하게 세입을 확대할 방법이 있었다.
홍섬이 입을 열었다.
“제도의 효용이 명확하게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타 도의 백성들도 앞다투어 함께 시행해 주기를 간청하니, 마땅히 팔도 전에 수미법과 영정법을 확대 적용함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이제야 수확이 끝났고 각지 수령들도 세곡을 보내기 전인데 벌써부터 다음 해 세입을 논하는 홍섬이었다.
그렇게도 돈이 좋은가?
다행이다.
나도 좋아하니까.
“일체 시행하되 북방의 두 개 도는 사정이 다르니 적절한 적용법을 고안하는 편이 좋겠다.”
“명을 받드옵나이다!”
“내가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신하들에게 잘 대해주지 못함을 매번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경기도의 세입이 좋으니 녹봉은 충분히 정상화할 수 있으리라 본다.”
개국 이래 줄어들기만 할 뿐 늘어날 기색은 꿈에서도 없던 녹봉!
원칙대로 주어진 적도 손에 꼽을 정도라 말이 정상화지 인상이나 다름없었다.
극도로 부유한 자들은 적은 녹봉이 조금 늘어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으나 가정과 가문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던 대다수 관리는 쌍수 들어 반길 일이었다.
“성상께서 신하들을 아껴주시니 신들은 그저 망극할 뿐이옵니다.”
이 인간들은 자기 기분 좋을 때만 성상이야.
하기야 백성들도 왕이 멀쩡하면 나랏님이요, 조지면 나랏놈이니 신하들이라고 다르겠나.
멀쩡하면 전하고 조지면 폐주다. 잘하면 성상도 되는 거지.
‘아직은 순항이로군.’
농기구도 이전보다 훨씬 좋은 품질로, 한 해가 시작되기도 전인데 목표치의 절반 이상을 생산했다.
어마무시한 속도여서 한곳에 모아두지 못하고 각 고을에 미리 보내두고 있었다.
덕분에 각 고을은 농기구 보관용으로 창고를 새로 지어야 했는데,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지시가 있기도 전에 미리 창고를 지어버렸다고 한다.
저 좋겠다고 한 짓이지만 백성들이 역에 자원하다니 이상사회가 따로 있지 않았다.
“지주들은 여전히 시끄러운가?”
자기들이 비축한 농기구가 쓸모없어졌다고 각지에서 언성을 높여댔다.
공공정책으로 손해를 보았으니 억울한 마음이 들 수는 있다. 하지만 대토지를 가진 주제에 농기구 몇 자루로 지랄이라니.
건방지기 짝이 없는 친구들이었다.
홍섬이 답했다.
“지주 몇 명이 불충한 발언을 한 죄로 재령의 교화소에 배치되자 반발이 수그러들었사옵니다.”
“지주라면 대개 반가의 일원으로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일 터인데 맞아야 말을 듣는다니 통탄할 일이다.”
“관리와 백성의 노고를 모르기 때문이옵니다. 교화소에서 노동으로 심신을 정화하면 생각을 달리하지 않겠습니까.”
잔혹한 처사라며 학을 뗄 때는 언제고 노동 교화의 위대함을 몸소 주장하는 홍섬이었다.
부려먹는 놈들도 중벌을 받은 죄인들이겠다, 밥만 축내던 식충이들을 교화 명목으로 부려먹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정당하고 수지맞는 장사인가!
“사대부들이 정년이 되면 21개월 정도 교화소에서 복무시켜 나랏일과 백성의 어려움을 알게 한다면 좋겠거늘.”
이이가 학을 뗐다.
“교화소는 죄가 중한 자들을 교정하는 시설이옵니다. 일부 사대부들의 자질이 심각하게 떨어진다고 무고한 이들까지 장기간 노역에 처하는 것은 과한 처사가 아니겠사옵니까?”
“흠. 내가 아는 나라는 단지 장정이 정년에 이르렀다는 이유로 2년 정도 가둬놓고 노역을 시키거늘.”
“신이 학문이 부족하여 어느 나라의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본받을 이유가 없는 야만적인 풍습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런가? 하하하!”
한바탕 웃으니 신하들이 의아하게 바라본다.
나는 손을 저어 분위기를 환기했다.
“보고할 다른 일은 없나?”
홍섬이 나섰다.
“전라감사가 치계하기를, 무안현감 전응정이 백성의 빚을 대납하고자 내려온 미곡을 멋대로 가져가 지인의 거처에 맡겨두었다고 하옵니다.”
“멍청한 놈이군. 주변의 다른 고을들도 똑같이 시행하는 일을 어떻게 덮으려고?”
아무리 나랏돈은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지만 생각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일단은 추포해 둔 상태라 하옵니다.”
“업이 도적도 아니거늘 나랏일 한다는 놈이 도적질이라니 폐단이 그치질 않는구나.”
“부정한 자들의 폐단은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옵니다.”
홍섬은 남의 이야기하듯 답했다.
그의 뒤가 깔끔하지 않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꼴에 유학 배운 놈들이라고 면전에서는 청렴이니 근검이니 입에 발린 소리를 지껄이면서 후장으로는 온갖 것들을 집어넣는 부류가 이 시대 관리들이었다.
“삼사에 하명하여 전현적 관리들의 부정 행위를 대대적으로 밝힘이 옳을 듯하옵니다.”
“좌참찬.”
심수경.
내가 폐주를 죽이고자 조정을 장악하자 본인 몸값을 높이고자 간을 본 놈이었다.
개념이 없지는 않은지 굴복한 후로는 협조적으로 변했다. 대세가 기울었다는 걸 알아서겠지.
“관리들의 부정은 마땅히 밝혀내야 하는 바이다. 하지만 좌참찬이 나에게 권하다니 별일이로군.”
“마땅히 드려야 할 말씀을 드린 것뿐이옵니다.”
“청백리라고 티내는 건가?”
“아니옵니다. 흠흠.”
어전에서 새삼스럽게 청백리로 언급되자 심수경은 콧대를 높인다.
웃기는 놈이었다.
심수경은 청백리로 녹선되기 두 해 전, 전라감사로 있었는데 병을 얻어 골골대는 와중에도 기생을 끼고 살았다.
청백리로 녹선되고 다음 해에는 사모하던 기생이 죽자 애가 절절 끓는 추도시를 짓기까지 했다.
그러고선 마음에 들었는지 본인 문집에 넣질 않나, 십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철은 안 들어서 현재 진행형으로 기생과 서얼 자식을 만들고 있었다.
웃기는 점은 이러고도 자식 사랑이 없지는 않은지 서얼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거다.
대단한 청백리 납셨지.
병신.
“관리가 국법을 우롱한다는 것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권력을 남용하여 장오를 저지른다는 것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도적질이 좋으면 도적이나 할 것이지 감투는 왜 탐낸단 말인가.
“삼사의 장관들은 전현직 관리들의 부정과 비리 사실을 철저히 밝히라. 만일 나의 귀에 삼사에서 보고하지 않은 죄상이 들어온다면 삼사의 모든 관리에게 무능과 방만의 책임을 묻겠다.”
엄중한 명령에 대사헌과 대사간이 잔뜩 긴장한 채 허리를 숙였다.
“무안현감 전응정은 삭탈관직하고 속전 없이 장일백을 집행한 다음 재령 교화소에 투입하라.”
“명을 받드옵나이다.”
“죄인을 포함해 앞으로 발생하는 모든 장오죄는 형과는 별개로 착수하였으나 결과를 보지 못한 경우, 시도만 한 경우를 불문하고 대상이 된 공금의 열 배 가치에 달하는 석철을 추가로 납부해야 한다.”
1억을 삥땅치려 했으면 지갑에 넣었건 못 넣었건 10억으로 토해내란 소리였다.
홍섬이 조언했다.
“사안이 크다면 죄인이 아무리 노동하더라도 다 갚지 못할 것이옵니다.”
“구 할은 보유 자산으로 납부할 수 있게 하라. 공금의 일 배수는 무조건 교화소에서 석철로 납부케 하며, 규모가 커 죄인이 다 납부하지 못하고 노동이 불가해진 경우 부모와 아들에 한하여 현물 또는 석철로 납부케 한다.”
“장오에 연좌를 묻는다면 처벌이 과하다는 말이 나올 것이옵니다.”
“일개 백성의 도둑질과 관직자가 공금을 횡령하는 것을 어찌 같은 선상에 둘 수 있겠는가? 분명 나라에 해를 끼치는 행위임을 알 터임에도 시행했다는 것은 그 이상의 죄악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한다는 뜻이다. 마땅히 적신(賊臣)과 반신(叛臣)의 행위로 보고 엄벌에 처해야 한다.”
반역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조심스럽던 홍섬은 무어라 하지 못하고 침만 꼴깍 삼켰다.
어전을 쓱 둘러보니 제 발 저리는 친구들이 많다.
고위 공직자라는 놈들이 포커페이스도 유지 못하고 새파랗게 질린 걸 보아하니 보통 구린 게 아닌 모양이다.
하나씩 불러내 빠따 치고 싶지만 일은 잘하는 이놈들을 병신으로 만들어서야 오리의 배를 가르는 격이겠지.
과거에는 나라가 가난해서 녹봉도 제대로 지급을 못 받았으니, 놈들도 변명거리가 없지는 않다.
“과거의 일로 벌 받을 것이 두렵다면 자신의 죄상을 상세히 써서 바치라. 반성할 마음이 있는 것으로 알고서 시일과 경중을 구분하지 않고 묻어두겠다.”
이미 벌어진 일에 매일 수는 없으니까.
앞으로가 중요했다.
늘어난 세입으로 녹봉부터 원칙적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나아가 녹봉을 현실화할 방안도 구상 중이다.
줄 만큼 주는데도 생계형 비리 운운한다면 종자부터가 그른 것으로 알고서 삼족을 교화소에 처박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반성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자백하지 않고 죄상을 숨기고 있다가 고발 등의 사유로 발각된다면 나의 분부와 자비를 우습게 여긴 것으로 알고서 각별이 엄중한 사안으로 취급하겠다.”
“타 관청에도 분부를 전하겠나이다.”
홍섬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 * *
“전하…….”
김자강과 율보리가 난색을 표했다.
“왜 그러나?”
“신들에게는 지키고 보살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네. 내가 자네들을 대신해서 그 사람들을 지킬 테니까. 이미 병조에서는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 군사시설과 상비군 배치에 대해 논하고 있네.”
나의 담담한 말에 김자강이 당혹한 투로 묻는다.
“전하께서는 저와 율보리를 높게 사서 곁에 두고 싶다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북방을 지배하고자 신들을 도성에 묶어두는 게 아닙니까?”
일침을 날리는 김자강이었다.
보다 원숙한 율보리는 겁을 먹었는지 고개를 숙였다.
나랏일은 단순히 옳고 그름만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법이며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은 대체로 일신과 가정의 안녕에 도움되지 않았다.
일개 부족의 수장에 불과한 김자강이라지만 이 미묘한 불합리함을 모르지는 않았을 거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로 보아, 그라고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은 아니겠지. 동시에 나의 처사에 진정으로 항의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김자강이 솔직하게 말했으니 나도 솔직하게 답해주는 게 도리겠지.
“아니라고는 못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