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206화
70. 철의 나라 (4)
제신들의 시선이 모였다.
보름 전만 하더라도 미쳐가서 일 때려치우겠다며 징징대던 인간이, 잘 쉬었는지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철 수급과 농기구의 품질도 개선할 방법까지 마련했단다.
왕이 듣고서 좋아한다면 금의환향이라는 멋진 그림이 그려지겠지만, 아니라면 개쪽이 따로 없었다.
신하들은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이산해의 방안을 경청했다.
“……하여, 신이 상고해 보건대 이전에는 없던 제도이나 제대로 작동한다면 다방면으로 유용하게 활용될 줄로 아옵니다.”
이산해는 자신 있게 발언을 마쳤다.
그러나 주변 제신들의 표정은 호의적이지 못했다.
홍섬이 대표로 물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개발해 둔 광산을, 고작 운영비를 전담하는 대가로 민간에 관리 감독을 전담시키고 임의로 인부를 모집할 권한까지 준다니?”
홍섬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인부에게는 일부 역을 면제해 주자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일세! 만일 부유한 아전이나 유지가 광산을 운영하겠다며 친분이 있는 자들을 인부로 편성하여 혜택을 준다면 폐단이 끝도 없을 걸세!”
“호조와 광산이 있는 현지의 수령이 부정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엄중히 감시할 것입니다.”
“언제나 말은 쉬운 법일세. 애초에 일개 백성이 다른 백성을 모집할 권한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인부랍시고 수백 명을 모아서 무슨 수작을 벌일지 누가 안단 말인가?
홍섬만이 수비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다른 신하들도 조정의 부담이 크고 일개 백성에게 과도한 권한이 주어진다는 점에서 하나둘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이 사람이 생각하기에 최선의 방도는 아는 듯하네.”
홍섬이 마무리 차원에서 반대 의견을 정리했다.
하지만 이산해의 제도를 시행할 것인가, 반려할 것인가는 신하들에게 달린 일이 아니었다.
곧 모두의 시선이 결정권자가 있는 어좌로 향했다.
“괜찮은 방법이군.”
왕이 말했다.
“아조의 광업이 미진한 지금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광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지원이 필요하다.”
“전하, 역을 면제해 주고 무리까지 짓게 해주는 특권을 지원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경은 대안이 있는가?”
홍섬은 더 항변하지 못했다.
갑자기 대안을 논하라니 급작스럽기는 하지만, 사실 광산의 개발을 촉진하는 방도는 이전부터 호조와 의정부에서 함께 논의되고 있었다.
홍섬이 할 말이 없는 이유는 정말로 통박을 굴려봤음에도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홍섬은 의문점을 파고들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광산을 개발했다면 민간에 맡기지 않고 나라에서 운영하여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옳지 않겠사옵니까?”
“관리보다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게 옳다.”
“엄중히 선발된 관리가 어찌 일개 백성만 못하겠사옵니까.”
“광산 운영에 사활을 걸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광산의 지표가 불안해질 때마다 담당 관리의 목을 칠 수는 없잖은가.
하지만 민간은 다르다. 일을 못한다면 자신의 목을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나아가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애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게 제한적인 공무원과는 임하는 태도도 결과물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나 민간에서 광산을 운영해본 자가 얼마나 되겠사옵니까. 일단은 국영으로 시작하였다가 백성들의 자질이 갖춰졌을 때 차차 전환함이 옳을 것이옵니다.”
그동안 조선의 광업은 전적으로 관의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는 말이다.
세종 대왕은 적절한 외교로 조공의 품목에서 금과 은을 제외했다.
덕분에 조공으로 납부해야 할 금은을 채굴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으나 대신 나라에서 운영하는 금은 광산을 전부 닫아야 했다.
조선 땅에서는 금은이 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제외했는데 금은 광산을 운영한다면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또 금은이 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니겠다, 검소를 미덕으로 삼으며 상업마저 미진했던 당시 조선은 쿨하게 금은 광산을 닫았다.
‘백성의 입장은 달랐지.’
금은은 썩거나 상하지 않지만 물건이란 공급도 없이 무한히 유통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조선은 신기하게도 ‘공식적’으로 운영되는 금은 광산이 없음에도 귀금속 장식품이 민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영국의 경제학자 토마스 그레샴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다고 했다.
실제로 고려는 고단위 화폐인 은병의 품질이 떨어지자 민간에서는 고품질 은병은 모아두고 저질 은병만 거래하며 경제 몰락을 가속화했다.
그런데 현물 경제인 조선에서는 어떤 화폐보다 가치가 높은 금은이 사라지지 않는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제신들도 민간에서 알음알음 잠채(潛採)를 통해 광산을 운영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잠채란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채굴한다는 뜻이다.
백성들은 관의 허락 없이 숨어서 귀금속을 채굴했다.
대부분은 알음알음 강바닥의 사금(砂金)을 채취했지만 작정하고서 광산을 개발하는 간 큰 종자도 잊을 만하면 발각됐다.
“그렇다면 죄인을 감독자로 삼아서 쓰자는 말씀이시옵니까? 사익을 위해 공공의 법을 기만한 자들인데, 벌을 주지 않고 도리어 감투만 씌워준다면 누가 법을 엄중히 여기겠사옵니까!”
“죄를 묻는 방법이 반드시 격식에만 묶일 필요는 없다.”
노동 교화소도 도형의 일종으로 치부되고 있었지만, 이러한 체계적인 집중 투역 노역에는 이전에는 없던 방식이었다.
“신은 무척이나 회의적이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조의 사정은 제도를 전면적으로 시행할 여지도 되지 않잖은가. 두어 곳을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결과에 따라 확대와 축소를 논하면 그만이다.”
“음.”
홍섬은 쓰게 침음했다.
제신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왕의 태도가 완고하니 별수 없었다.
그동안 왕이 추진한 개혁이 항상 좋은 말만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논란의 여지만 제외한다면 결과가 좋지 않았던 적은 없다.
실패한 선례가 없다면 통찰력을 믿을 수밖에.
그들은 몰랐겠지만, 이산해가 제안한 방식은 지금보다 미래의 조선이 취할 별장제(別將制)와 유사한 면이 컸다.
“호조에서 준비하라.”
“예.”
이산해는 대답과 함께 허리를 꾸벅 숙였다. 논의는 끝났으나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할 말이 남아 았다는 걸까.
“농기구의 품질을 개선할 방도도 마련하였는가?”
“그러하옵니다.”
“말해 보라.”
이산해는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이어나갔다.
신하들은 다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홍섬은 이미 개쪽을 당했으므로, 그를 대신해 좌의정 노수신이 마치 자신이 스테이지 2 보스라는 투로 나섰다.
“이제는 양민들만 아니라 공장(工匠, 장인)까지 한곳에 모아놓겠다는 건가?”
“예.”
“고을마다 흩어져 있는 공장들을 강제로 움직이게 한다면 반드시 가혹하다는 말이 나올 테고, 또 그들이 모인다면 필시 적지 않은 수가 될 터인데 어떻게 전부 수용하겠다는 말인가.”
“수고를 자처할 대가를 약속한다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고, 머물 장소는 미리 마련해 둔다면 뒷말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랏일에 대가라니?”
노수신은 그게 말이라고 하냐는 듯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나라를 위한 헌신은 대가 없이 당연히 자발적으로 이뤄져야 할 영광스럽고 신성한 의무라는 투였다.
과거 그는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 권신들과 맞설 정도로 용기와 의기를 보여주었다.
충분히 존중받을 이력과 성품이지만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남들도 다 자신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백성들이 생각하는 방식은 좌의정 대감이나 소관과는 다릅니다.”
“그렇다고 나랏일에 대가를 바라는 불충한 태도를 교정하지는 못할지언정 독려를 하겠단 말인가?”
노수신이 이단이라도 본다는 듯 경멸어린 표정을 지었으나 이산해는 담담하게 대응했다.
“백성들의 사고는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여러 선대왕과 선인들이 백성을 교화하고자 각고로 노력하였으나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 않습니까?”
“……크흠.”
“언젠가는 백성들이 사소한 것이 아닌 큰 것을 추구하게 되겠지만 당장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순간에 맞는 방식으로 백성들을 다루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산해 냉정하게 목소리를 내자 노수신은 침음할 뿐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이상을 추구한다고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답이 없는 이상주의자 노릇만 하기에는, 노수신은 인생을 오래 겪어보았고 책임질 게 많은 위치에 있었다.
이산해가 부연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닙니다.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수년 전 황해도 금천에 자화요 단지가 조성되지 않았습니까.”
운하 공사에 필요한 막대한 양의 석회를 수급하기 위해서였다.
모래 흩뿌리듯 지방에 산재한 자화요와 석회 굽는 인부들을 모아, 거대한 자화요를 몇 개 세우고 인부들에게 합심하게 하니 좋은 품질의 석회가 넘치도록 나왔다.
단지가 운영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인근의 금곡포창이 석회로 가득 찼고, 그때 내가 직접 석회를 적재한 배를 타고서 태안의 공사 현장까지 갔었다.
어쩌면 이산해는 장인들을 규합하여 제철 단지를 조성하자는 아이디어를 자화요 단지에서 얻었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힙을 합치면 단순히 두 사람분 이상의 일을 해낼 수 있는 법이다.”
나 역시 이산해의 제안을 거들었다.
언제까지 토법고로 수준으로 남아 있을 텐가.
설비 집적화는 비용, 체계, 분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규모의 경제를 발생시키며 존재 자체만으로 기술 수준을 반 단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장인 개개인이나 관청에서 적당히 마련한 최소한의 설비와 작정하고서 구축한 설비의 수준은 현격한 차이가 날 테니까.
“이 역시 마음에 든다.”
“망극하옵나이다.”
“하지만 내가 호조판서에게 쉬라고 하였거늘, 정작 쉬지는 않고 나랏일만 해냈구나.”
“충분히 쉬면서 구상한 바이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쉬어야 할 때도 나랏일을 걱정하는 모습을, 내가 신하들에게 감히 귀감으로 삼으라 할 수는 없겠으나 호조판서의 노고에 가상함을 느낀다.”
이산해는 뿌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망극할 뿐이옵니다.”
* * *
“전하, 경하드립니다!”
정전에 등장하기 무섭게 홍섬이 외쳤다.
이 양반이 뭘 잘못 먹으셨나.
왕이 어좌에 자리하지도 않았는데 신나서 경하를 외치고 있었다. 나는 진정하라는 차원에서 손을 들어보이고는 먼저 어좌를 찾았다.
비단 방석의 부드러운 촉감이 엉덩이에 닿고서야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경기도 각 고을의 조세를 집계하였는데 예상 수치의 9할 7푼이 납부되었으며, 예년 조세와 비교하면 2할 이상 늘어난 수치이옵니다.”
“오.”
처음 이산해가 세입을 추산했을 때 중신들은 회의적이었다.
그렇게 생각대로 세입이 풀쩍 뛰겠냐며,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진즉 선인들이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냐며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참으로 고집 센 인간들이었다.
나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세상만사가 예상대로 돌아가는 건 아닌지라 수확이 시작됐을 때 긴장타고 있었는데, 좋은 결과가 있어 다행이었다.
“9할 7푼이란 사실상 완납과 다르지 않고, 또 예년에 비해 2할 이상 늘었다면 실로 막대한 효과가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낮은 단위에서 2할이란 백만 원이 백이십만 원이 된 애매한 느낌이지만, 국가 단위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한해 세입이 500조인데 세출이 550조인 국가라면, 작년에는 50조를 빚졌는데 올해는 세입이 600조가 되어 50조를 남기는 거다.
“백성들의 반응이 무척이나 좋사옵니다. 그동안 백성들도 긴가민가했는지 이렇다 할 말은 나오지 않았는데, 각 고을에서 수미법과 영정법을 지켜 수취하자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외쳤다고 하옵니다!”
“태평성대라.”
그거 좋지.